아이가 거의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다.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인물들을 하나씩 그려낸다.

 <명탐정 코난> 만화책을 읽고 애니메이션을 보더니, 同人文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태권도(毛利兰처럼 空手道를 배우려다)를 배우고 그림을 그린다. 

기쁘다. 무엇보다 스스로 찾아낸 좋아하는 일에 꾸준히 몰두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그리고 뿌듯하다. 아이의 시간을 빼앗지 않고 내버려둔 보람이 있다. 아이 아빠는 "내가 계몽한 덕분이야" 하면서 공로를 자칭한다. 

꽃은 합으로 핀다고 했다. 해빛, 비, 흙, 공기, 꿀벌, 나비, 혼자서는 결코 필수 없다. 우리 아이는 어떻게 코난 만화 그리기를 즐기는 어린이로 자랐을가, 돌이켜봤다. 

***

신영복 선생님은 <강의>에서 유년시절의 경험은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셨다. 

만화속 인물들에 공감하고 각자의 특징을 분별하고 이야기에 빠져드는건 아마도 이야기책을 많이 읽고 애니메이션을 많이 봐서일 것이다. 아이가 다섯살 때 한달에 로알드 달의 책 8권을 읽어준 적이 있다. 너무 재미나서 아이보다 내가 멈출수 없었다. 여섯살에는 郑渊杰의 동화에 빠져 있었고.

신영복 선생님은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이라고 한다.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란다. 

이렇게도 말씀하신다: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

가슴에서 손발까지 가려면, 느낀 감정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외부에 표현하려면 여유가 필요하다. 지난 여름방학에 그림 세장을 그리고 나서 이번 겨울방학이 올때까지 점 하나조차 찍지 않았다. 잠결에 어렵게 일어나 학교로 가야 하는(겨울이면 어둠을 헤치고 찬바람을 맞받기까지 해야 하는)  월요일이 어김없이 예상보다 일찍 찾아오다보니 주말에 시간이 있어도 마음의 여유는 없었나보다. 

오소희 작가는 <엄마의 20년>에서 균형을 강조하면서 넘치는 것은 덜어주고 모자란 것은 더해주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넘치는 것은 공부, 인터넷, 전자기기, 스트레스, 경쟁심, 인공적인 공간 등등이고 모자란건 자유, 오프라인의 소통, 자연, 필사적인 삶의 자세, 자기주도성, 창의성, 협동, 운동 등이라도 한다. 

신영복 선생님은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이라고 하셨다. 

자유, 방학에나 실컷 누리라고 온전히 내버려뒀더니, 자기주도성도 늘어 슬금슬금 할일을 찾다가 그림을 택한 것이다. 

***

왜 그림이냐, 그건 아마도 아빠가 심어준 씨앗이 싹 튼것이다. 꼬꼬마이던 시절 아이는, 시험준비를 하느라 설계도면을 그리는 아빠에게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아빠 따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오소희 작가는 어릴 때부터 가족문화에 노출된 아이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그것에 젖어든다고 한다. 요리, 영화, 산책 등 가족의 시간 중에서 모두 같이 즐기는 활동이 무엇인가 유심히 관찰해보고 그 활동을 온 가족이 모여 정기적으로 하면서 가족문화를 만들어 가는 방법을 권한다고 한다. 한가지만 꾸준히 해도 즐거운 추억이 굉장히 많이 쌓일 것이고 가족 간에 할 이야기도 많아질 것이라 한다. 

그러나 아이가 그 안에서 진로까지 찾아야 한다는 부담을 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그 반대로 어른의 활동이 가족들 눈에 안 띌 정도로 미미한 경우에도, 활기에 차서 씩 미소만 지어도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는 눈부신 순간들을 더 많이 공유하게 되므로 그것만으로도 긍정의 문화라는 가족문화를 저절로 이루게 된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우리집 가족문화는 그림인듯 하다. 아빠는 직업으로 그림을 그리고 엄마는 재미로 그림을 그린다. 

한때 집에 혼자 있으면서 '응답하라 1988'을 울고 웃으며 보고나서 그 감동을 달랠길 없어 그렸던 그림이다. (역시 자유로워야 한다)

***

아이가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여 진로와 련관시킬 생각은 없다. 아이가 자발적으로 원하기 전에는 미술학원에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냐 못 그리냐보다 중요한건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본인만의 방식으로 꾸준히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이 바뀌여도 좋다. 대상이 중요한게 아니라 시스템이 중요하다: 자발적으로, 꾸준히, 몰두. 

신영복 선생님은 <강의>에서 득어망전得鱼忘筌 득토망제得兔忘蹄 이야기를 언급한다. 물고기를 잡고나면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을 나누신다: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이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은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수 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网)인 것이다.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아버리든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물이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다. 중요한 것은 한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다. 남은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다. 남는 것은 그물이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남는건 그림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움, 작품을 보는 뿌듯함, 가족과 나누는 기쁨과 같은 감정, 그리고 무슨 일이 됐든 좋아한다면 꾸준히 몰두할수 있는 시스템이다. 

신영복 <강의>

오소희 <엄마의 20년>

이 글을 공유하기:

hana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좋아요 좋아요
16
좋아요
오~ 오~
0
오~
토닥토닥 토닥토닥
0
토닥토닥

댓글 남기기

  1. 우와~ 저 우에 코난 캐릭터들을 모두 아이가 직접 그린거라니 감탄이 나옵니다. 캐릭터 얼굴 라인들이 살아있네요, 눈과 특징들도. 육아를 참 재미있고 현명하게 하시는거 같습니다. 아직 100일도 안된 아기를 둔 아빠지만, 저도 육아중인 일인으로서 매번 잘 배우고 갑니다. 때가되면 글에서 언급한 방법들을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아, 응팔 캐릭터도 대박입니다 ㅋㅋ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