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사랑노래 컨셉이 아닌 <죽음>이라는 다소 어두울수 있는 소재를 한편의 뮤지컬처럼 밝고 웅장하게 풀어낸 아름다운 노래가 있다. 

바로 가인의 <카니발>이란 노래인데 몇년전 나온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봐도 엄청 세련됐다. 가사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언어의 마술사 김이나 작가가 썻는데다가, 뮤비는 영롱한 파티 축제분위기인데 슬픔이 묘하게 어우러진 신비하고 퇴페적이고 거침없는데 또 발칙하고 사랑스러운 필름의 연속이다.  한때는 정말 무한반복해 돌려봤던…뭐 무튼 그랬었다.

무엇보다 천천히 내가 처음으로 없던 날로 돌아가는 과정을 카니발에 비유하면서 마지막에 카니발의 문이 열리고 클라이막스로 다닿는 폭죽씬은 진짜 압도적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죽기직전까지의 걸어온 삶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이처럼 완벽하게 기억되는 순간으로 춤추는, 이토록 후회없는 과거형으로 간직되는 형식이 뭐가 더 있을까…

확실히 요즘 다시보니 명곡인게 분명했다.  그래서 공유하고 싶어졌다. <나는 거기 있었고 충분히 아름다웠다. 밤은 사라지고 우린 아름다웠다. 나 또한 내 삶의 주인공이었음을> 이 대사를 들으면서 난 내 눈물버튼이 마비됨을 몇번이나 경험했다. 진짜 행복은 슬픈 순간을 축복하기 위해 존재하는것 같았다. 

정말이지, 진짜 내 인생이 영화라면 난 이 곡을 앤딩크레딧에 넣고 싶을 정도다. 

이런 흥쾌하고 몽환적이면서도 판타지스러운 멜로디와 다르게 가사를 곱씹어보면 처연할 정도로 슬퍼지는 쟝르는 언제나 미치게 아름답고 순수하고 독보적이다. 

죽음은 언제나 산 사람의 몫이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죽음이 있어 삶이 의미가 있고 생명은 죽음위에 위대함의 가치를 보여준다. 

BTS -Love myself 앨범에서도 말한다.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도 모두 나이니, 나를 사랑하라고.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잘 살기 위해 태어났고 더욱이는 잘 죽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잘 죽는 방법은 삶의 이유속에 있다. 죽음이라는 슬픔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한다고 하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한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만 아름답게 표한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은 재미없다. 아침에 눈을 뜨고 싶은 이유는 분명 수없다: 그게 인생이고 어느날인가 죽음을 대면했을 때 당황하며 삶을 엉거주춤하게 마감하지 않는 방식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같은 고전을 읽어보면 인간의 나약함과 죽음의 의식, 삶의 궁극적 의미가 곱씹어진다. 

우리는 죽어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끝내는 날까지 아름다웠다라고 말할수 있어야 한다. 인생은 죽고나면 화려한 나날들이었단 걸…

인간은 당연한 것은 쉽사리 인식할 수 없다. 종종 그 어떤 계기가 그걸 되새겨준다, 아마 지금같은 순간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단지 그 편견에 둔감할 뿐 전혀 인지 못하는 것은 또 아니다. 좋은 날들이 많다, 앞으로 더 많을거다. 

그래서, 또 공유하고 싶은 영화 하나가 생각났다. 이렇게 근사하고 로맨틱하게 <존엄사>라는 주제를 전달한 영화는 기억에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감히 말한다. 

간절함, 죽음, 행복,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 순간순간은 그냥 그 존재 자체로만도 퍼그나 큰 의미가 있다. 

<미 비포 유>에 남자주인공의 편지 한구절로 오늘의 공유글을 마감하고 싶다.

<클라크, 슬퍼하지 말아요. 그냥 잘 살아줘요. 그리고 대담하게 살아요. 저는 당신 앞으로의 삶에도 늘 함께할꺼니까.> 

인생은 신나고 화려하고 다채로운 카니발이다. 생이 부여 된 매 공간과 시간에  충실하고 맘껏 즐겨야 한다. 인생은 한번뿐이고 그 마감인 죽음도 축제니까. 

우리 삶은 카니발이다. 정신없고 자극적이고 설레는 또 잔잔하고 소소하고 사랑이 넘치는 카니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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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니

글로 내 생각과 내 마음을 표현할수 있는건 굉장히 행복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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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 시대는 왜 죽는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상실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것일까? 죽음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삶 속에서 수없이 이별을 마주치면서 살지만 정작 슬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른다.
    현대 사회는 죽음에 대한 슬픔과 절망을 빨리 떨쳐내어 일상적 패턴을 회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슬픔을 오랫동안 품고 있는 자들을 향해 쓴 소리를 내뱉는다.
    그래서 결국 잊혀 져서는 안 될 죽음은 잊혀지고 애도 받지 못한 자들의 영혼은 그대로 묵살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까? 그것은 슬픔을 기억하고 무덤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그 무덤은 텍스트로 쌓아올리는 무덤이다.

    1. 사람은 보통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자아의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데, 대부분은 이미 대본이 있는 즉 정의내려져있는 사회적개념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즉 론거랑 론증이 주관적이고 현학적인 관점들뿐인, 이 두가지 경로를 통해 의식세계를 리셋한다. 본질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분석하는 대신 보여지는 것에 더 포커스를 맞추고 소위 대부분이 선망하는 결론이 맞는것이고 더 우월한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슬퍼도 왜 슬픈지 모르고 기뻐도 그 기쁨을 나눌 상대가 딱히 없다. 마치 도서관에 빼곡이 쌓여진 베스트셀러들이 같은 말만 서로 반복해도 인기있는 이유처럼. 그 누가 확실히 가지주장을 밀고가는 문헌이나 고전, 논문같은 건 학자들이나 연구해야 하는 소외된 분야로 인식되는 세상이지 않는가. 사회적인 행복론과 가치론은 결코 내 자신이 용납할수 있는 법위에 간주되는 바탕일뿐 전부이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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