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앞서: 영화평을 쓰기에는 제가 함량 미달입니다. 그냥 영화 한 편을 보고 느낀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걸로, 귀엽게 봐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글인 만큼 주제어는 하나 잡았습니다, ‘파괴’. 영화는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 천만을 찍은, 이준익의 ‘왕의 남자’입니다.

세계적 공연예술가 백남준 선생과의 인터뷰 중에 기자가 물었다. “예술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다소 충격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예술은 사기다.” 이 문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마도 백남준 선생은 상식의 파괴야말로 예술의 본령이자 역할이라는 의미를 전하고자 반어법을 썼던 모양이다. ‘상식의 파괴’는 영화 속 광대의 공연을 관람하는 다양한 계층에서도 발생했다. 임금으로부터 신하,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경험한 ‘파괴’가 어떤 것인지 하나씩 서술해보고자 한다.

영화는 장생과 공길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광대놀음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먼발치에서는 어떤 양반 나리가 비스듬히 앉아 공연을 구경하는데 공연보다는 공길을 눈여겨보면서 하인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한다. 그리고 그날 밤 양반은 공길을 성적으로 범하려고 한다. 공길이 아무리 곱상하게 생기고 광대놀음 중에 여성 역할을 했대도 그는 엄연히 남성이었다. 유교 성리학을 신봉하는 양반이 저지르기에는 너무 문란한 행위였다. 동성에 대한 양반의 성적 대상화는 분명 이성 결합이라는 기존의 질서, 상식에 대한 파괴로 볼 수 있다.

양반집의 하인을 죽이고 도성으로 피한 장생과 공길은 거기서 육갑이 이끄는 광대 패와 조우한다. 그리고 이들은 결합해 한양에서 가장 큰 판을 벌이기로 한다. 백성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임금과 그의 애첩인 장녹수를 희롱하는 놀이판을 벌인다. “개나 소나 입만 열면 왕 얘기”이기는 하지만 백성 중 그 누구도 감히 왕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임금은 신분 사회 속 지고 지상한 존재로 희화화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사람들의 통념이다. 하지만 바로 광대들이 이 통념을 파괴해버린다. 나아가 백성들은 광대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을 가능성도 크다.

사실 상식이라는 것도 절대적이지 않을뿐더러 선험적인 지식이다. 누구에게나 어떤 ‘상식’에 대해 반기를 들고자 하는 욕구가 꿈틀거린다. 하지만 사피엔스는 굉장한 실리주의자여서 명분 없이는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때 광대들의 농지거리는 보는 자에게 최상의 명분이 되어 준다. 예컨대 왕인 연산군은 광대 패의 연극을 보면서 중신들을 파직시키기도, 처단하기도 한다. 연산군이 유교 윤리를 거부하고 절대권력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주지하는 바다. 또 경극을 지켜보던 왕은 선왕에게 사약을 받은 생모인 폐비 윤씨를 떠올리며 그 자리에서 선왕의 두 후궁을 칼로 찔러 죽인다. 어쩌면 광대 패의 공연은 연산군을 위한 더없이 소중한 해원, 즉 살풀이의 매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왕뿐만이 아니다. 광대들의 공연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던 중신들은 마침내 이들에게 동물분장을 하게 한 다음, 사냥을 가장하여 이들을 모두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 또한, 나중에는 성스러운 궁에서 광대놀음을 거행하는 것이 유교적 질서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왕에게 반기를 들었고, 끝끝내 그를 임금의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광대들에게 있어서 입궐과 궁 생활은 일생에 단 한 번 해볼 수 있을까 말까 한 경험이다. 이들은 그것을 천운과 호재로 인식했겠지만, 이내 세상의 권력과 명리에 포박되어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살고 있음을 자각한다. 입궐한 후로 자신들의 이야기는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왕이 원하는 서사로 공연을 진행했으니 말이다. 보는 자에게 광대들이 벌인 놀음판은 상식의 파괴, 즉 본인의 실리를 채우기 위한 일종의 명분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광대들에게 놀음은 무엇이었나. 필자는 부채를 버리고, 공중으로 힘차게 뛰어오르는 장생과 공실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비로소 어렴풋이 진실에 접근한 듯싶다. 한양에서 가장 큰 판을 벌이고, 입궐에 목말랐던 장생. 그에게도 상식의 파괴가 일어난다. 진정한 자유란 얻을 때가 아닌 버리고 내려놓을 때 일어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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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 Neru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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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사당 광대든 어떤 희극이든 웃음과 해학의 탈을 빌어 통찰을 얘기하고 이슈를 폭로비판할 때 뭔가 예술의 경지를 얘기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개콘의 인기코너도 그런 면에서 이어지지 않나 싶구요. 웃고 떠드는 사이에 자연스레 무너뜨리는 “파괴”야말로 진짜 강력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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