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라는 이름의 구체(球体), 그건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는, 보는만큼 아는 세계이다. 때론 의식의 그림자속에 부풀어 존재하다가, 우리가 들여다보면 비로소 가시적인 존재로 탈바꿈한다. 

그것은 어둠의 색갈이자 내부의 색갈이다. 햇볕이 들지 않고 눅눅해서 과시할게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피가 돌기 시작하면 곧바로 화려한 치장이 허용된다.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적당히 명석한 질문이 제공되면 알아서 이해할 거라고 조용히 단정짓는다.  또 자꾸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에게 대답한다. 그러고는 지금껏 아무것도 몰랐던 비밀을 자신에게 털어놓는다. 

즉 세상은 보는 만큼 안다. 

우리 주변에는 세상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세상을 확장하거나 과대평가하기 보다는 줄일 필요가 있다. 조그만 상자, 이를테면 피자박스 같은데 쑤셔넣고 가끔 심심할 때 들여다보고 싶다. 

뭔가를 글로 묘사한다는 것, 역시 그것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해서 결국은 그것을 망가뜨리게 된다. 색깔이 엷어지고 모서리는 닳아 희미해진다. 그 강렬하게 느꼈던 존재감을 되살리려 애쓰고 글의 소곤거림에 귀를 기울였을 때 즈음에 비로소 충격을 받는다. 

진실은 가혹했다. 즉 뭔가를 글로 쓴다는 건, 그것을 파괴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그 파괴된 파편조각속에서 찾는 각자의 세상은 유동성과 기동성, 환상성을 보인다. 

세상은 언제나 원본과 마주했을때 만큼 만족스러운 순간은 없다. 따라서 복사본이 많아질수록 원본의 위력은 더욱 짙어진다. 마치 디지털 언어로 내뱉는 새로운 <아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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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니

글로 내 생각과 내 마음을 표현할수 있는건 굉장히 행복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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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물의 원본성(진품성)은 그 사물의 “지금, 여기”(세상에 딱 하나, 딱 한곳)와 결부되여있는 이른바 시간적, 공간적인 1회성을 지니고있다. 하지만 아무때나 여기저기 산재해있는 복제는 진품의 1회적 현존성을 위협한다. 이로써 손상을 입게 되는것은 예술의 진품성이고,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것은 사물의 권위다 (벤야민).”

    1. 벤야민,아무라논쟁,디지털매체시대…어쩌면 페이커뉴스로 범람하는 지금은 사라진 아우라의 빈자리에 문화산업의 오락성이 메워져가는 사태와 비슷한거 같아요. 앤디워홀의 핍아트 같은 새로운 예술의 탄생이 각광받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존의 예술의 틀을 깨고 있지만 뭐나 복제품이 차고 넘치는 만큼 진품의 가치가 더 올라갈거란 생각이 드네요. 우리는 항상 진짜를 추구하고 진실을 파헤치려고 하지만 사회부속품이 되어가죠. 괴테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노예화 된 사람은 없다라고 했죠…

    1. 맞아요, 그런 리얼리티 현실속에선 사실 이론의 입증이나 통계는 의미자체가 무색할때도 많죠. 반박할수 없는 논거에 끊임없이 의심도 품어보고요 ㅋㅋㅋㅋ 그런 내면의 움직임을 자각하는데서 이상한 감수성도 느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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