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나에게 너를

종이장에 ‘나’와 ‘너’라는 글자를 쓰고 한참을 응시한다. ‘나’는 가시를빼여든채 서있고 ‘너’는 속에 가시를 품은채 밀어낸다.‘나’라는 글자를 원형으로 가득 이어 쓰니 수많은 가시를 달고 있는 ‘나’들이 된다. 반대로 ‘너’를 가득 써놓으니 수많은 가시를 품은채 등을 돌려버린  ‘너’들이 된다.
단순한 글자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슬퍼졌다. 본능적으로 서로를 향해 날카롭다고 여겨져 인간들의 관계가 비정하고 랭혹해보이고 두려워진다.

‘나’들은 왜 항상 찌르려고 하는 것일가? 그처럼 공격적이고 파괴적이고 야만적일가? 그 가시들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면 결국 한낮 람루한 욕심을 바탕으로 한 야비한 짓거리들이였을 뿐이다.
그때마다 ‘너’들은 가시를 고스란히 받아안고 상처를 입고 아파하면서 묵묵히 이겨내느라 애썼을 것이다. 그 흐느낌마저 들리는 것 같고 흐르는 고름의 냄새가 아릿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안스러운 ‘너’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들은 가시의 방향을 돌려 자신의 내면을 찔러대며 후회하고 반성하고 사정없이 질책했다. 스스로에게 잔인하리만치 잘못을 적라라하게 펼쳐놓고 용서를 받으려고도 했다. 리기적인 동시에 또한 완전히 리기적이지 못하기때문이다.

어쩌면 ‘나’들이 내든 가시는 여리고 연약한 내심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하고 아프고 울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나’들의 가슴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멍도 들고 피도 흘렀다. 가시들은 속으로 파고들어 견디기 어려운 아픔도 주었고 끊임없이 쑤셔대며 정신까지 흔들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벼파는  가시를 따뜻하고 물컹이는 가슴으로 품어서 아물리며 새살이 돋도록 노력했다. 내심의 원망과 분노를 버려가며 건강한 관계를 다시 꿈꾸기도 했다.

이 모두는 한 인간에게 공존하는 서로 다른 본질적인 측면들이다. ‘너’든 ‘나’든 다같은 모습이다. 나의 립장에서 너를 보면 너는 너이고 너 역시 너의 립장이 되여 나를 보면 나는 너가 될 것이다. 그렇게 수시로 립장이 바뀌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나’가 되여 상대를 찔러 온 것이고 서로 ‘너’가 되여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인가 ‘너’는 복수를 꿈꾸며 독기 어린 가시를 품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너를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버린 것이고 너는 또 그 가시의 정당성을 항변하며 그 책임을 나에게 전가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만큼 무고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너는 또다시 나가 되여갈 것이다. 삶이 그렇게 아픈 순환인 것이다. 얼기설기 엉킨 관계의 가시줄은 수시로 조여들어서는 인간의 살 속을 파고들어 피에 젖고 살점을 뜯어냈다.

서로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친근하고 익숙한 자신의 모습이여서 련민의 감정이 든다. 나가 없는 너도 없고 너가 없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 너나 나라고 말할 때 이미 가까이에 있음을 인식했으며 분리되고 싶지 않은 원초적 욕망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만큼으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하고 끈끈한 관계이다. 거부할 수 없는 립장이고 련계이며 불가피한 운명이다. 비록 언제나 서로의 삶에 겹쳐져 온기를 나누거나 서로의 령혼에 향기로 차오른 것이 아니고 수시로 미워하고 배반하고 실망하며 살아왔지만 말이다.

다시 ‘너’와 ’나’를 바라본다. 가시를 빼들었든 품었든 가슴마다 텅하니 비여있다. 저 빈 가슴, 그것은 얼마의 어둠이며 공허며 허무일가? 얼마의 고픔이고 바람이며 갈구일가? 얼마의 간곡함이며 갈급함이며 집요함일가? 저 깊은 심연은 무엇으로 메워져야 할가?

사랑 뿐이다.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알뜰히 비여진 것이다. ‘너’와 ‘나’를 합치면 그것은 한팔로 자신을 그러안고 다른 한팔고 누군가를 껴안고 싶은 우리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유치한 말 같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그리고 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우리의 진실한 모습이다. 나와 너라는 단어는 형상적으로 이런 근원적인 의미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내면은 얼마나 예쁘고  진실한가. 얼마나 다른 인간에게 몸을 기울여 집중하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서기 어려워하고 두려워한다. 너와 나 사이에 하나의 금을 그어놓고 그 금을 넘지 못하도록 늘 경계한다. 넌 리기적이야 너무 차거워 너무 허위적이야 너무  파렴치해 너무 음특해 너무 진지해 너무 딱딱해 너무 불편해 왠지 그냥 싫어… 나 역시 남들이 그은 그러한 금들에 의해 금안에 들어가지 못한채 배제당하고 주변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요즘은 교묘하고 은밀하게 상대의 만만한 살속에 가시 하나쯤 박아주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래서 그 가시를 가슴에 박은채 말도 못하게 끙끙거리게 만들어주고 자신은 오히려 당돌하고 당당하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도리여 내색이라도 낼라치면 뒤틀린 심사쯤으로 남에게 보여지거나  괜한 동정이나 구걸하는 짓거리로 루추해지거나 함부로 오해하거나 헐뜯는 못된 놈으로 전락된다. 그게 아니라면 요즘 그 흔한 심리질병중의 병명 하나쯤을 받아안게 될 뿐이다. 아무리 아리고 쓰려도 통증을 잘근잘근 씹어가며 아무렇지도 않은듯한 표정을 짓도록 주변에 의해 강요되였다.  그런 가증스러운 관계에서는 쉽게 화합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가끔은 큰 상처를 주었더라도 깊어진 미움의 계곡을 메워오는 상대의 진심에 감동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만은 절대로 용서하거나 리해하거나 묻어두거나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수시로 자신에게 경고했지만 그 힘을 잃는다. 응결되여 단단했던 마음이 풀리며 다정해지려 하고 손이 넘어가려 한다. 그때면 자신에 화가 나서 손을 재빨리 거두어들이고 흔들리는 의지를 바로잡는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하다보면 용서때문에 갈등하는 것이 더 괴롭고 힘들어진다.

이런 저런 서늘하거나 괴로운 일들이 무수히 일어나도 나와 너는 서로 어우러져 지금까지 질기도록 관계를 맺어왔다. 그것은 이 세상속의 오래된 하나의 기적이다. 너였든 나였든 가끔찌르든 찔렸든 서로 주고받은  어떤 슬픔이나 아픔은 의연히 오래 갈 것이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 다행히 우리는 서로를 응시하여 다 같은 너와 나임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으며 행복할 수있는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과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아직 서로를 영원히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았기때문이다.
너를 사랑하므로 나를 너에게 보낸다. 나를  사랑하므로 너도 나에게 와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과 약간의 추함을 가진 시간들이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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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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