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대련에 사는 동생이 우리 위챗 가족모임에 흰눈이 소복이 쌓인 사진을 올렸다. 동생과 동생딸이 눈사람을 만든 사진도 있었다. 아  흰눈, 눈사람, 어릴때는 매년마다 보고 만들던 흰눈과 눈사람이 지금은 사진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연변의 한 두만강변 마을에서 동년을 보낸 나한테 있어서 겨울은 곧 흰눈이였고 흰눈과 눈사람은  아름다운 동년추억중 빠질래야 빠질수 없는 중요한 한페지였다. 

   지금은 지구온난화때문인지 무슨 원인인지 연변에도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지 않지만 내가 소학교를 다니던 90년대초중반에는 매년겨울마다 함박눈이 펑펑 많이도 내려서 무릎위까지 올 정도로 쌓여있었다. 눈이 오면 밖에 쌓아둔 땔감이 눈에 묻힐 일과 눈을 칠 일을 염려하여 어른들은 눈이 오는걸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들의 근심걱정을 모르는 우리 개구쟁이 아이들은 눈싸움을 할 생각과 눈사람을 만들 생각에 눈이 오면 무작정 좋아했었다. 

   아마 소학교 1학년때였을거다. 일기예보도 그닥 정확하지 않은 그때, 아침까지는 날이 개였는데 오전부터 펑펑 내리던 함박눈이 우리가 하학할 시간이 거의 되자 무릎위까지 오게 쌓여있었다. 우리 1학년생들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눈이 깊게 쌓여있었다. 농촌에는 아직 전화가 없었던 그시절, 애들을 어떻게 집에 보내지? 하면서 담임선생들이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만 풀풀 내쉬는데 하학시간이 되자  기적이 일어났다. 아버지들이 학교문앞에 가득 모여있었기때문이다.그리고 한사람한사람 자기자식을 업고 눈길을 힘겹게 헤치면서 집에 돌아갔다. 그런데 그 가슴뭉클한 부성애를 못느끼는 아이가 한명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나였다. 꼼꼼한 성격의 어머니는 그날따라 집에 없었고 데면데면한 성격의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던것이다. 그날 나는 다른 아버지들의 큰 발자국을 따라서 간신히 집에 돌아와서  크게 울었다. 그리고 그날의 실수를 만회라도 하려는듯이 눈이 발목까지 쌓이는 날 아버지가 하학시간 한시간전에 나를 데리러 학교에 와서 선생님들이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소학교 3학년쯤, 어느 눈오는 날의 체육시간, 우리는 따뜻한 교실에서 자습을 해라는 체육선생을 꼬셔서 밖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었다. 농촌소학교인지라 학생이 많지 않았는데 아마 남학생 10명 여학생 8명인것으로 기억된다. 남학생들이 함께 커다란 아래몸을 만들고 여자애들이 좀 작게 웃몸을 만들었다. 그다음 난로에 때는 석탄을 가져다가 눈을 만들고  싸리나무가지를 끊어서 입을 만들었다. 여자애들이 자기가 쓰고있던 모자를 가져다 씌워주고  목수건을 둘러주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분홍색 모자와 노란 목수건의  큰 눈사람. 지금 같으면 핸드폰으로 찍어서 기념을 남기겠지만 그때 그시절인지라 기억속에만 남아있다.

  겨울방학이면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두만강에 가서 놀았다.  소학교애들이  썰매를 타고 중학교언니오빠들이 스케트를 탔었다. 그때 다른 애들의 썰매는 나무판밑에 스케트날을 달아  만들어서 아주 멋져보였다. 하지만 우리집에는 스케트날이 없었기에 아버지가 나무판밑에 쇠줄을 고정시켜 스케트를 만들었다. 그래서 처음에 썰매를 안고 나갔을때 동네애들한테 좀 놀림도 받았었다. 웬 썰매가 그 모양이냐고.  근데 웬걸. 내 썰매가 다른 애들의 썰매보다 더 잘 미끄는것이였다. 그래서 다른 애들이 서로 나랑 썰매를 바꿔 타겠다고 난리가 났었다. 그 쇠줄썰매가 왜 스케트썰매보다 더 잘 미끌어졌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이다.

   썰매를 타다 지치면 우리는 제방뚝에 가서 스키?를 하며 놀았다. 그 시절에 웬 스키냐 하겠지만 물론 인차 머리속에 떠오르는 그 스키가 아니라 우리들만의 스키이다. 우리 마을과 두만강사이에는 홍수가 져도 강물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어진 제방뚝이 있다. 그뚝이 경사져 있으며 겨울이면 그 경사진 곳에 눈이 많이 쌓인다. 그 곳에 가서 노는 사람이 별로 없기에 눈이 온지 반달이나 한달정도  지나면 그 곳의 눈이 땅땅하게 굳어져서 밟아도 인차 꺼지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 경사진 제방뚝은 우리만의 스키장이 된다. 우리한테는 스키같은 좋은 도구가 필요없다. 큰 헤로곽(纸箱) 에 앉아서 미끌어내려오는 애가 있나 하면 아무것도 없이 눈우에 풍덩 앉아 쭉 미끌어내려오는 애도 있었다. 그렇게 영하 십몇도의 추위를 우리는 추운줄 모르고 즐겼었다.

  하지만  영하 십몇도의 날씨는 뛰여다니지 않고 느끼기에는 살을 에이는 추위가 틀림없다. 나는 한해에서 제일 춥다는 대한(大寒) 이튿날에 태여났다. 그래서 내 생일날에는  누구나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만 가만히 있는다.  내가 열일곱살 되는 해의  생일 이틀전, 엄마는 일이 있어서 동생을 데리고 연길에 갔다. 그러면서 니 생일날에 꼭 돌아와서 생일 쇠줄게 하고 약속했다. 하지만 엄마가 떠난 이튿날, 그러니까 내 생일 전날 눈이  많이 왔었다. 연변은 원래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인지라 눈이 왔다 해서 뻐스가 인차 다 끊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웬간하면 연길에서 우리 진소재지까지 오는 뻐스는 끊기지 않는다. 그런데 진소재지에서 우리마을까지 오는 뻐스는 작은 눈에도 쉽게  끊긴다. 진소재지에서 우리 마을까지 6,7리길을 뻐스없이 그 추위에 강바람을 맞받아 걸어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엄마가 내 생일날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단정짓고 생일날은 먼저 간단히 보내고 며칠후 엄마가 돌아온후에 다시 쇠자고 나한테 말했었다. 나도 어린나이가 아닌지라 섭섭한 마음 전혀 없이 그러자고 홀가분하게 대답했다. 근데 내 생일날 반전이 일어났다. 오후쯤에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집에 들어섰던것이다. 둘다 얼굴과 손이 빨갛게 얼어있었다. 나보다 세살 어린 동생은 길에서 얼마나 얼고 아팠는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엉엉 울었다. 강바람을 맞받아 눈길을 걷다보니 평소엔 50분정도 걸리는 길을 엄마와 동생은 그날 한시간반이상 걸었다고 한다. 그날따라 짐도 많은데 짐을 드니 손이 너무 시린지라 눈길에 짐을 질질 끌고 왔다고 한다. 다행으로 눈길인지라 짐이 잘 미끌어주었단다. 아버지가 그 추위에 왜 돌아왔느냐 책망하는 투로 말하자 엄마는 약속은 지켜야지 하면서 추워서 덜덜 떨리는 입술로  대답했다.  그날 생일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제일 뜻깊은 생일이였다. 지금도 그 정경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난다.

  사계절의 변화를 잘 못느끼는 남방도시에 살고있는 지금, 눈구경이나 눈사람만들기는 요즘의 나한테 있어서 사치이다. 

  어제 다섯살난 아들이 귤 두개를 쌓아놓고 나한테 물어본다. [엄마, 이게 눈사람 같아?]  [그래, 신통하게 눈사람같네] 웃으면서 긍정해주었지만 마음이 서글퍼난다. 북방에 있었으면 아들과 함께 진짜 눈사람을 만들어보면서 동년을 한번 느껴보겠는데.  아니, 코로나만 아니여도 이번 주말에 당장 동생이 있는 대련에 가서 아들과 동생딸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겠는데, 아쉽다.

  이제 코로나가 종식되면 다음해 겨울에는 연변이나 대련에 가서 흰눈과 추위를 느껴보고싶다. 제대로 된 겨울을 느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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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자연을 사랑하고 언어, 문학, 역사를 사랑하는 30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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