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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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울컥했습니다. 혁명이요, 정의요 하는 낱말보다는 꽉 막혀버린 병사리 속에서 껍질 벗겨지며 탈출하려는 벌레들의 몸부림이 너무 속을 막 할퀴어 놓았습니다. 푹 숙성시킨 오이 같은 나그네답지 않게 오열이 윽윽 거리며 터지는 것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01
‘공융이 배를 양보하다’라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공자의 직계후손이기도 한 이 공융은 죽기 전에 배를 양보하는 말보다 더 유명한 명언을 남깁니다.
“애비구 에미구 어디 다 봐줄 물건짝들이더냐? 애비란 놈은 제 재미 보느라구 종자를 싸 갈겼구, 에미란 것은 그 종자로 생긴 물건 잠시 보관해놓은 병사리 같은 거지. 물건 다 꺼냈으면 작업이 끝난 거지 뭐 더 볼게 있다구(父之于子,当有何亲?论其本意,实为情欲发耳。子之于母,亦复奚为?譬如物寄瓶中,出则离矣)”
이러한 명언이 나오기까지는 승상님이 베푸신 은덕이 제일 큰 뒤받침을 해주셨죠.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이리 분장시키고 저리 우롱하고 합니다. 대신들을 생각하기로 발바닥에 난 털처럼 여겨서, 잡고 싶을 때 잡아 피를 봅니다. 세상을 백골더미로 만들고 백성들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어도 다 승상님이 이루어야 할 큰 뜻에 비하면야 여든 살에 감기 타령이죠. 다른 세력 무너뜨리고는 남의 부인을 자신의 노리개로 데리고 삽니다. 원담을 쫓아 버리고는 부자 세 놈이 한 여자에 눈독 들여서 울고불고 나꿔채는 활극까지 벌리죠. 그래도 승상님은 가르치심에 엄하시어 세상은 효로 다스린다고 하십니다(以孝治天下). 그래서 공융님의 명언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대바른 어르신께서는 그럼 딱딱 교과서에 쓰신 대로 사시고 나 같은 놈들은 지레 사람이길 포기할게요, 이런 겸손함이죠. 젠장 사람도 아닌 놈이 속이 빈 병사리를 똥통에 처넣던 산속에 버리던 어르신님이 비칠 일은 아니죠, 이런 호기겠죠. 그런데 공융님처럼 이렇게 똑똑한 분도 모르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사람질 하기 싫어서 작은 병사리는 내쳐버린대도, 결국 벌레로 변해 기어 다니는 놈도 더욱 큰 병사리에 담겨있다는 것을.
속담에 “양반의 문자 속에 어둡다고 상놈의 말속까지 어두우랴.”는 말이 있습니다. 빈대떡 두 개에 국화주 한잔 받아먹고도 깜냥엔 신설놀음 호사를 한 상것들은, 입만 나불거리는 상전들과는 달리 살겠다고 빠득거리며 할퀴여지는 한 몸으로 자기 본분을 배웁죠.
슬픔에 설움에 아픔에 농(弄, 농담)기름을 뺀질뺀질 치고 막 헤덤비는 무모함은 하늘을 찌르지요. 무모하기에 분수를 모르고, 분수를 모르면 막대기에 얻어맞고, 그래서 억울하기에 울분스럽고, 울분스러워서 비굴하기도 모질기도 한 우리는, 병사리 마개를 손톱이 닳도록 발톱이 닳도록 긁어댑니다.
02
설움과 한에 미친 벌레들이 피 터지게 외치다 진압당하던 장면 그려보며 ‘사람이 하늘이다’ 하며 울부짖던 동학당인들이 새삼스레 떠올랐습니다. 몰락한 양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 여의고 궁핍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다가, 처가집에 얹혀살기도 하고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며 밑바닥 삶에 장알이 박힌 최제우란 양반은 서른 여섯 살의 나이에 갑자기 신들림을 받았다고 고집합니다.
하늘의 뜻을 갑자기 깨달았다고 역설하면서 천하창생을 위한다는 이유로 정통유교사상 견지에서 보면 이단에 가까운 학설을 체계적으로 엮어갑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천심인즉 인심이다’ 이렇게 기초적인 이념들을 전제하여 놓구는 위계질서를 상엄하게 고수하는 정통유교사상에 도전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내세웁니다.
가혹한 수탈과 벌레보다 못한 대우에 헐떡이던 밑바닥 인생들에게 해탈의 가능성을 제기한 것처럼 보인 동학학설은 짧은 시간 내에 폭풍의 영향을 몰아오는데, 이로 하여 최제우는 마흔 살 되든 해 간악한 학설로 민심을 현혹시킨 죄명으로 참수당합니다. 하지만 교주의 순교로 하여 동학은 더욱 강렬한 현실 비판 색조를 띠게 되며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밑바닥 인생들 현실 항거의 이데올로기로 부상하게 됩니다.
당시 반도의 상황은 이미 풍전등화의 지경이었습니다. 나라 힘이 쇠진될 대로 쇠진되어 있고 자기한테 손을 뻗치는 열강은 모조리 상전으로 모셔야 하는 굴욕적인 처지입니다.
영국한테 거문도를 강점당하고도 영국과 청왕조 눈치 두려워 빼앗을 생각 못 하고, 러시아 눈치도 보여서 포기하겠단 말도 못 하고 열강들 사이에서 분주히 돌아치며 누가 역성들어주겠는가에만 목을 걸지요. 문 꾹 닫고 있으니 주변 나라들과 국력 격차가 점점 늘어나고, 문 열자니 바퀴무리처럼 욱실대는 일본 상인들이 값싼 서양상품 들고 와서 빈약한 국내 수공산업 박살 낼게 뻔하고.
더욱 두려운 것은 문호 개방하면 신식문물과 함께 문화사상 침투를 막을 길이 없고, 경직되고 고리타분한 지배사상이 그걸 배격해낼 힘이 아예 없어 쇠약한 통치구도가 마구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국력이 쇠잔하고 사회생활상이 궁핍할수록 기강이 풀리고 권력에 대한 감독이 결핍해 지배세력이 서민들에 대한 수탈은 가혹해지기만 합니다. 백성의 기름을 짜내서 자기 배에 더부룩하게 채워 넣는 일은 거의 관례처럼 행하여지고 크고 작은 권력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손을 뻗칩니다. 때문에 아무리 양을 늘구어 백성들에게서 조세를 거두어들여도 국고에 들어가는 부분은 언제나 임무를 달성못 하지요.
야만적인 수탈에 더는 살길이 없는 전라도 고부에서 항쟁이 본격 시작됩니다. 농민들이 바친 조세쌀을 창고에서 쥐들이 축을 내고 또 쌀이 마르면서 무게가 줄어든다고 정한 양의 사할을 인상해서 받습니다. 그렇게 다 빼앗아 내고는 국고 들어갈 때 무게가 너무 많이 모자라서 또 다시 한번 더 거두겠다고 선포합니다.
관개수로는 농민들을 인부로 뽑아 면비로 만들어 놓구는 농민들 보구 사용비 내라 합니다. 벼가 자라지 않는 생지를 가진 자작농들한테는 거기 자란 풀도 마르면 땔감에 쓰인다고 세금을 거두어 갑니다.
더는 살길이 없어진 농민들은 동학당인 전창혁 등을 장두로 선정하여 군수에게 억울함을 상소합니다. 그게 대역무도로 몰리어서 전창혁은 형틀에서 고문 못 이겨 죽습니다. 이 전창혁이 바로 동학농민봉기 수령 전봉준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고부에서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먼저 민란을 일으킵니다. 연이어 전주에서는 자경농의 토지를 균전으로 속여 올려보내 과도한 조세를 강요하다가 민란이 일어납니다.
익산에서 민란이 일어난 사연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지요. 역대 관리아치들이 조세를 탐오 하느라고 이미 거두어들인 조세를 미납으로 기록합니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나서 익산군은 미납한 조세가 삼천칠백칠십이석이나 됩니다. 그리고는 익산군수가 그 구멍을 메우려고 모르쇠를 대며 아래 관리들에게 밀린 조세를 한꺼번에 다 받아서 국고에 바치라고 호령합니다.
농민들이 상소문을 만들어 사연의 진상을 까밝히니 전라도 관찰사는 그 진정서 받아들여 익산군수를 파면시키지만, 좀 지나서는 상전을 모욕시켰다는 죄명을 들씌워 장두인 오지영을 체포하고 잔인하게 학대합니다. 다 털리운 다음에도 울분을 호소할 곳이 없고 아무런 살길을 찾을 수가 없는 익산 농민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민란은 더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택시운전사’에서 벌레들이 주먹밥 들고 노래 부르며 명절기분으로 시위 떠났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진짜 한데 뭉친 울부짖음으로 변하는 것과 비슷한 거죠.
동학당이 운동을 조직한 것도 아니고 거사에 대해 호소한 것도 아닙니다. 더는 살길이 없는 벌레보다 못한 족속들이 자연발생적인 폭발을 선택한 것이죠. 동학인들이 이때 나서서 사태를 해석하고 자신들의 교리로 상것들의 울분을 대변하고 방향 인도의 책임을 짊어졌을 뿐입니다.
‘사람이 하늘이다’는 기치를 내걸고 동학인들이 치가 떨리는 가슴으로 운동의 격문을 만들어 격조 높이 만방에 고합니다.
“∙∙∙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는 망하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도닥여줄 방책에는 등한하고, 자기 배 채우기에만 여념이 없어 나라의 비축만 갉아 먹으니 무슨 정의 따위를 논할소냐? 우리 같은 상것들도 임금님의 땅 위에서 임금님이 씌워준 껍질을 걸쳤으니 나라의 멸망에 어찌 눈만 펀히 뜨고 좌시할 수 있을소냐? 조선팔도 일심협력하고 억조의 뜻을 모아 의로운 깃발 받쳐 들고 보국안민의 일에 생사를 같이할 것을 호소하노라. 오늘의 아수라장이 끔찍하지만도 거기에 경동하는 일 없이 일월승평의 밝은 아침을 맞이하여 우렁차게 외치자.”
하늘이 되고 싶은 기승스런 벌레들의 반란은 황야의 마른 풀을 휩쓰는 듯 기승스레 전라도 땅을 훑어나갑니다.
급해 난 고종은 윤음을 내려 선정을 약속하지만 봉기군은 결국엔 진압하러 온 관군을 무찌르고 전주성을 깨뜨려서, 탐관오리와 양반아치들의 피로 옹이고 맺혔던 울분을 삭입니다. 사태수습이 어려워진 고종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한켠에서 호시탐탐하던 일본은 얼싸 좋다 군사개입을 개시합니다.
사태가 커져서 국제적인 세력각축으로 비상 되고 하늘 같은 벌레들의 무장도 정규무장한 국가폭력에 타격을 입자, 동학인들은 왜놈에게 침략의 빌미를 만들어주지 말자는 민족대의의 명분과 자신들의 청원을 궁정에서 접수해주는 조건으로 봉기군을 해산합니다.
하지만 일본놈들의 확장신념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노골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며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중국세력에 대한 철저한 배격을 꾀합니다.
역사적인 숙적 일본놈들이 조선의 패권을 쥐고 임금을 억류하고 민족의 존엄을 유린하니 동학인들은 다시 해산했던 봉기군들을 모아들입니다. 몽둥이 호미 칼 엽총을 든 오합지졸의 상것들이 나라를 구한다고 벌레들처럼 기여모아 정규적인 근대화 무장을 한 일본군과 맞받아 덤벼듭니다.
빛나는 위용을 자랑하는 관군세력은 약삭빠르고 이치 바르게 일본군 쪽에 서서 벌레 잡기에 신명이 났지요. ‘택시운전사’에서 일사의 흐트러짐 없이 일본식 전법으로 빨갱이 잡는다고 광주시민들을 때려눕히던 그 모습과 딱 닮았지요. 또 빨갱이란 단어는 우리말이 아니고 일본어 赤(적)아까 그대로 번역한 말이에요. 일본도 쓰기 꺼려하는 아까를 한국은 대통령 선거 발언에서도 서슴없이 쓰고 있지요.
우금치에서 일곱 날 오십여 차례 격전 거쳐 벌레들은 수입제 국가폭력에 모두 때려 엎어지고 전봉준도 체포됩니다. 민심을 달래 우는 견지에서 일본놈들은 전봉준을 백방 포섭해보지만 전봉준은 죽기만을 요구합니다.
만신창이 되어 으스러진 몸을 왜놈 의원이 치료해주려 하자 “죽을 몸에 구태여 그런 야단까지 떨겠는가.”하고 거절하며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죽음을 선포하자 의연히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원통하지 않으나 역적으로 몰려 죽는 것이 원통할 따름.”이라고 당당하게 외칩니다.
배포 넓은 고종왕은 동학당 잔예세력에 대한 숙청을 명령하고 지조 높은 관군은 일본놈들과 결탁하여 벌레들을 색출하여, 동학인은 무려 30여만 명의 희생자를 기록합니다. 난폭한 국가권력은 벌레들의 몸뚱이들을 말뚝에 박아서 풍화시켜 위계질서의 상엄함을 과시합니다.
사람이 하늘이라고 광분하며 외치던 동학당봉기는 이렇게 국가권력의 몽둥이 아래서 피울음을 한 많은 대지에 뱉어 넣으며 막을 내립니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울부짖었지만 결국은 벌레라는 껍질마저 벗겨지고 드러난 알몸마저 몽둥이에 깨부셔서 말뚝 위에서 풍화되고 맙니다.
혁명이 상것들에게 무엇을 앗아갔을까요? 상것들의 껍질을 벗기고 알몸을 깨부셨죠. 정도를 위해 죽으련다고 충정은 절절했지만, 염원과는 달리 외국세력의 피 비린 각축을 불러왔고 일본놈들 발톱에 단단히 옥쥐여 졌습니다.
국모가 살해당하고 국권은 완전한 통제를 받았으며 일제의 올가미는 날로 옥쥐여가 훗날 러일전쟁 이후에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좀 지나서는 아예 나라가 완전히 일본에 병합되어 버리지요.
만약 넋이란 게 있다면 이런한 혁명의 결과에 전봉준님도 여전히 정도를 거듭 주장할까요? 아니면 사마천처럼 이러실까요. 余甚或焉,傥所谓天道,是耶非耶? 혁명이 상것들한테 무엇을 얻게 했을까요? 그 울부짖음이 피 터지고 피가 낭자하던 아수라장이 상것들에게는 무슨 의미로 남은걸 가요?
03
벌레들의 혁명 얘기는 이만큼으로 각설하고, 아래 병사리를 빠져나온 벌레들의 이야기를 계속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학당혁명으로 야기된 청일 갑오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여지없이 패배당하는데, 패배한 청나라는 수십년간 국고를 털어가며 키워온 아세아최강을 자랑하던 북양함대가 전멸될 뿐만 아니라 조선에 대한 지배권도 완전히 일본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청나라는 대만열도, 요동반도, 팽호열도를 통째로 일본에 빼앗기고 은 2억 냥을 배상하게 되는데, 이로하여 일본은 제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다지게 됩니다.
고유문화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원숭이처럼 유럽 문명의 흉내만 낸다고 동아세아에서는 조상을 배반하는 쓸개 빠진 놈이라고 욕을 먹고, 유럽인들에게는 겉 흉내만 그럴듯하게 낼 줄 아는 미개한 족속들이라고 조롱받던 일본이 갑자기 횡재를 하여 일약 제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갑작스런 궐기는 기성 제국세력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하는데 조선반도와 요동지역을 눈독 들이고 있던 러시아제국과는 직접 대결의 위치까지 이르게 됩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과격한 간섭으로 일본은 수중에 넣었던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게 되며, 러시아는 1897년에 중동철도 구축을 협상하고 1903년에는 철로를 개통시킵니다.
조선반도에도 노골적으로 손을 내밀어 일본과 직접적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각축합니다. 그래서 명성황후가 일본 괴한에게 능욕당하곤 불에 타 돌아가는 참사가 발생하고, 고종이 왕비 폐출 조서에 거부한다고 세자(순종)에게는 칼까지 대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아관파천이요 대한제국 이러한 것들은 누구나 다 익숙한 것이니 이만큼 짚고 넘어가고, 이야기를 다시 돌려 러시아가 중동철도를 부설하는데 그때 동원된 노동력들이 바로 조선반도 북부와 연해주에 이민한 조선인 인부들입니다. 철도가 부설된 후에도 많은 조선인들은 철도 부근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기타 노역에 참가합니다.
때와 같이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고 그것을 빌미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는데 러시아가 국자가로 침입하니 중국인들은 길림방면으로 대이동하고 그 빈자리에 대량의 조선이민들이 들어옵니다. 지금 막 일부 사람들이 민족통일의 모델이라고 그 의미를 급부상시키는 심양 서탑도 1901년에 조선인 집단부락으로 첫 모습을 보입니다.
기실 조선인들의 만주땅 대량 이주는 그보다 한 이십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1875년 청나라가 서간도에서의 봉금령을 취소할 때부터였습니다. 1881년에는 간도에서의 봉금령을 취소하고 1883년 조선도 두만강 봉금령을 취소합니다. 1885년 청나라는 아예 봉금령을 전폐하고 조선이민에 의한 개간을 장려하는 정책까지 내오게 됩니다.
1677년부터 이백여 년이나 진행되어온 조선인들 간도로의 밀입을 상엄하게 단속하고 월강죄만 발견되면 가족 씨종자까지 다 말리워 죽이던 가혹한 봉금령이 이렇게 전폐 된 데는 여전히 러시아제국의 확장야욕이 작용을 한 것입니다.
1860년 북경조약에 의해 연해주를 러시아에게 빼앗겨 버린 청나라는 시시각각 이 우둔한 곰이 또 발톱을 밖으로 내미는 것을 경계해야 한 것입니다.
국경은 건실히 해야 하는데 제국들의 야만적인 도발은 끝이 없고, 대내로는 태평천국 소도회 이러한 민란이 끝이 없고, 북양해군 창설에 돈은 물 붓듯이 쏟아부어야 하니 국경경비에 추가할 예산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토지에 대한 애착이 유별나고 수전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할 수 있는 조선이주농민들을 장려하여 그 조세로 국방경비를 충당하고, 인구가 집거하는 촌락들이 형성됨으로 하여 변경국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속셈에서 이렇게 파격적인 수단들을 동원한 것이지요.
청나라에서 국경 안정의 수요로부터 장려했던 조선이민의 토지 개간은 똑같은 목적으로 러시아가 만주를 차지한 후에도 계속 유지됩니다.
1904년에 이르러 러시아와 일본은 요동반도와 조선반도의 지배권 때문에 모순이 백열화되어 끝내 전쟁이 일어납니다. 승산이 만당해 보였던 러시아는 신진제국 일본에게 육로와 해상에서 보두 보기 좋게 얻어 부쉬워서 참패당하며, 일본은 러시아를 몰아내고 패권을 독점함으로써 초대강국으로 향하는 길로 일장월취하게 됩니다.
러시아를 몰아낸 일본은 조선을 떡 주물듯이 주무르며 조선을 핍박하여 문호를 자기네한테 완전히 개방하게 하고, 자기네들의 단수 높은 근대공업체계로 아직도 농경상태에 머물러 있는 조선의 빈약한 산업체계를 박살 냅니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토지조사라는 수단으로 대량의 자경농들을 파산으로 몰고 가며 토지 잃은 농민들에 거의 야만적인 노동력 착취를 감행합니다. 이로 인한 대량의 조선인 이주와 그 후의 개척단 이러한 것들은 너무 많이 말해서 누구나 익숙한 내용이니 이만큼 각설하고, 하여간 이렇게 조상들로부터 뻗어오던 잔뿌리를 뼈아프게 잘라내고 조상이 물려준 껍질과 피 흐르는 알몸을 부둥키고 중국땅에 이주한 조선인은 1945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시기에 이르러 170만 명을 초과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주민으로서의 조선족의 정체성 화제입니다. 흔히 듣는 말로 “우리의 뿌리는 한반도에 있다.” 이러는데 필자는 여기에 정말 공감이 안갑니다.
먼저 명칭부터 말한다면 우리 선조들이 두만강 건너 압록강 건너 오랑캐령 넘어 이 땅으로 이주할 때 우리 선조들이 간직하고 있던 이름은 조선이지 대한민국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세력한테 얻어맞고 주물림 당하면서도 곰방대에 고리타분을 태우며 대의명분만 내세우고, 세상 물정에 어둡고 밑바닥 인생들에게는 가혹하기만 했던, 일본놈한테 급살 맞은 그 조선이라는 이름이 조상분들께 간직돼 조선족이란 말이 생긴 것입니다. 중화민족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는 조선인이었고 그 후에는 조선족이 된 것입니다.
다음 우리 조상들이 거기에 붙은 잔뿌리를 뼈아프게 잘라 내여 설움으로 하얀 껍질과 피 흘러 빨간 알몸을 부둥키며 떠나오던 그곳도 한반도라고 불리우던 곳이 아니라, 살아서는 죽지 못해 부대끼고 죽어서는 초혼소리만 가슴 찢던 그 조선이란 곳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뜻에서 뜯어 맞춘 한반도라는 곳도,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뜻에서 말하는 조선도 아니고, 그 급살맞은 조선왕조라는 의미에서 생긴 조선에서 우리의 껍질이 생기고 우리의 알몸이 생기고 우리의 뿌리가 잘리어 온 것입니다.
한국문화든, 조선문화든(흔히 말하는 북한문화), 조선족문화든, 고려인문화든,조선인문화든 모두 한 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와 부동한 맥락으로 발전한 병행문화임이 분명한데, 지금 어떤 분들은 배심 좋게 뱃살 척 드러내놓고 우리가 모태문화고 니네껀 다 변종들이야 하고 넉살을 피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통을 이어받아 원뿌리 원줄기니깐, 변종됐고 수준에 도달 못 한 낙제생 문화들은 우리한테서 테스트받고 우리 가르침을 고맙게 생각해야 돼, 이런 태도이지요.
거기다 어떤 약삭빠른 우리 문화인들도 “모국 찾아 뿌리 찾아야 하오.” “조상의 넋을 기리어 선진문화를 따라가야 하오.” 이러고 있어, 정말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은 초라하고 내놓기 부끄러운 낙제문화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죠.
이러한 문화시각이 현실적인 부분에도 옮겨져 중국조선족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태도에도 나타나죠. 언제나 조선족은 좀 덜 깬 족속들, 문명한 한국문화로 버릇을 고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말릴 수가 없는 족속들. 그래도 같은 민족이라고 좀 구제해볼까 하면 배은망덕하게 중국인 신분 내세우는 놈들. 중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짜구배 인간들. 니네들 도와주려고 외국인이 아니고 동포라고 불러주는데 니네는 결국 중국사람이니깐 우리 한국사람 대우는 바라지도 말라…
기실 당신네들이 아주 간단한 문제를 문화편견으로 보기에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죠. 국적이 중국이니 당연히 중국사람이고,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부동한 환경에서 부동한 모습으로 피어났으니 서로가 생소한 건 당연한 일이고, 그러고 한국 가서 한국문화를 접수해가는 건 거기서 일하니깐 교류의 수요로 한국문화를 익히자는 것이지 한국문화 익혀서 한국인 되고 다시 고향마을까지 한국 새마을로 바꾸자는 건 아니죠. 국교가 이루어진 후 뿌리 찾아 모국 가본다,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우리 문화가 발생한 그 원줄기를 찾아보겠다는 말이지 지금 이 모습의 한국문화 배우러 간다는 말이 아니었겠죠. 지금 한국문화가 조선족문화보다 우세지위에 있고 거기에서 우리 문화가 자양분을 많이 섭취하는 것은 누구나 부인 못 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조선족문화가 한국문화의 한 개 속종이여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죠.
수천 년간 중국문화도 조선반도 문화보다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하였고, 그 앞에서 조선문화는 대부분 접수와 소화의 태도를 지녀왔는데, 그러면 조선반도 문화는 중국문화의 한 개 속종이여서 그랬을까요? 그러고 당시 중국인들이 조선사람들 보면 “야 미개한 것들아, 빨리 우리꺼 배우고 중국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강요했던가요?
빈약한 문화가 선진문화한테서 배우고 자양분 흡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다 해서 어느 것이 다른 것에 종속되어있기에 그렇게 되는 건 아니죠. 딱 찍어 말하면 조선족문화는 한국문화, 조선문화, 고려인문화, 조선인문화 이런 것과 다 동등한 위치에 있는 한 개 뿌리에서 나와 부동한 모습이 된 병행문화이지요. 어느 게 모태문화다, 이런 명제 자체가 거짓 명제이지요. 만약 지리학적 위치가 어느 것이 모태문화란 걸 결정 짓고 순수하게 정통문화만 그대로 고수한 문화가 존재한다 이렇다면 이거야말로 수컷이 새끼 날 일이지요.
모태문화만 순수하게 계승하셨다면 지금 한강 작가는 박지원 2세, 정약용 3세, 홍명희 4세, 이기영 5세 막 이렇게 되나요?
다른 병행문화가 변종이 됐다면 모국문화도 변종이 되어왔죠. 그렇게 말하자면 한국문화는 일본 유럽 중국 여기저기서 더 많이 받아들여 지금의 모습이 돼가지고 다른 병행문화가 변종이 어떻고 말할 자격이 더욱 없지요. 이건 너무 명백한 도리인데 여기서 너무 지루하게 오래 말하는 거 같으니깐 마지막으로 조선족 신분 요것만 집고 갑니다.
짜구배가 된 족속들을 바르게 가르치려고 동포 대우 해주며 외국인과 다르게 엄하게 채찍질하는데 요놈들이 본질적으로 중국인들이더라, 요런 말은 너무 들어서 귀에 창이 박힐 지경이죠.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거든요. 같은 핏줄은 맞으니깐 동포인 것은 당연한 거고 국적이 중국이니 중국인인 거도 명백하고, 이래서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모국문화 입장에는 숨겨진 이런 뜻이 있는 거죠. 너희들은 중국 가더니 우리와 다르게 변질했다. 너희들이 변질했다고 생각하는 그 뒤에는 이런 숨은 뜻이 또 숨어있는 거죠. 우리는 순수문화 단일혈통. 그러니 우리가 민족정기를 받아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거야.
그럼 우리 문화가 피와 살이 막 섞였다 그렇게 가정하고, 그럼 순수문화 단일혈통 이런 거 주장하는 한국은 과연 순수문화 단일혈통이 옳을까요? 순수문화 이거는 너무 어처구니없으니까 각설하고, 단일혈통 이것만 살펴봅시다.
종종 조선반도는 단일민족 단일혈통 이렇게 자부하시는 고견들이 지면을 메우고 있던데, 필자는 정말 의심 들어요. 정말 천박해서 몰라 그러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다른 목적으로 억지로 그렇게 주장하는 건지.
단일혈통이라. 그럼 고구려, 백제, 신라, 마한, 진한, 변한 모두 같은 혈통인가요? 다 예맥인만 살았나요, 아니면 다 옥저인만 살았나요, 아니면 다 한인만 살았나요? 그렇게 말하면 고구려는 정말 문제가 되지요. 고구려에는 여진인도 살고 옥저인도 살고 예맥인도 살고 연해주의 모해족도 살았고, 이게 다 한 개 혈통이지요?
짱개 짱개 하며 중국인들이 더럽고 혈통이 복잡하고 하는데 이거 어쩌지, 한국인의 피에는 바로 이 짱개들의 피가 질벅히 섞여 있지요.
많이 실례들지 않아도 중국 진나라 때 만리장성을 쌓는 고역을 피하느라고 산동, 하북, 요동지방의 한족서민들이 벌떼처럼 진한에 모여들어 그 지방에 새로운 문화를 심어줍니다.
조선 삼국시기때는 아예 동일한 혈맥이란 개념조차 없이 세 나라가 싸웠을 뿐이지 뭐 한 혈맥에 부동한 이념을 가지고 싸운 건 아니죠. 고려 때 와서 조선반도를 급격히 침탈하는 거란, 여진, 몽골 등 유목민족들과 대항하기 위하여 동족개념으로 지칭되는 고려인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그렇다고 고려인이 단일혈통인 건 아니죠.
그때도 화척이란 족속이 반도 내에 어울려 살았는데 그게 오랜 후에 다시 백정으로 바뀌는 거죠. 이 사람들은 반도에 살아있는 유목민족의 후예로서 전체 족속이 모두 몽골, 여진, 거란 혈통이죠. 만약 단일혈통을 따지면 그런 백정인 임꺽정은 조선사람이 아닌 거죠.
지지구구 많이 얘기했지만 말하자는 건 딱 하나, 우리 문화는 한국문화의 설익은 속종이 아니고 우리는 한국인이 되려고 한국문화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의 동포는 맞지만 중국사람이라는 뜻입니다.
04
흰두루미 무리들처럼 행렬을 지어서 거친 간도땅을 들어오면서 오랑캐령을 지날 때, 이주민들은 언제나 그 영고개에 올라서서 고국을 돌아보며 부둥켜안고 가슴을 뜯었다고 합니다. 오랑캐령을 넘으면 이젠 시선이 막혀 조상의 땅이 보이지 않습니다.
얼기설기 얽혀있던 그 뿌리에서 자기의 것을 억지로 당겨 뜯고, 뼈 깎는 아픔으로 그것을 갈고 갈아 보습으로 만들어 이방의 땅을 갈구하여 나섰습니다. 그들은 쫓기우는 몸, 한스러운 고국의 땅에는 더는 뿌리 내릴 곳이 없어 쪽박 차고 보습 메고 살길 찾아 떠났습니다. 다시 보이지 않는 조상의 땅에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가슴 뜯으며 오열 토하고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내디뎌서 영고개를 넘어섭니다.
나에게 보습 대일 땅만 있었으면, 뜨뜻한 구들목에 아내, 자식 앉혀놓고 토실토실 감자라도 배부르게 먹이고 다리 펴고 재워보았으면. 이런 소박한 소망으로 우리 할아버지들은 피도 안 멎은 뿌리를 갈아서 날이 선 보습으로 만들어, 차고 딴딴한 땅을 억척스레 갈아 번집니다. 치발역복하라고 강요받고 꼬리빵즈라고 손가락질해도 과묵한 입을 꾹 악물고 머리 숙여 보습으로 땅을 갑니다.
조세 제대로 못 바쳐 악다구니질 당해야 하고 딸년 사창가에 팔아 넘겨라구 막 삿대질해도 꿋꿋한 수염에 매운 엽초 연기를 토하며 밝아 올 내일을 기대합니다. 지주에게 뜯기우고 관청에서 수탈하고 마적들이 빼앗아도 뜨거운 땅에 씨앗을 계속 뿌립니다. 본분에 맞지 않는 욕심을 쓰지 않고 모진 칼파람 다 감내하며, 뜨거운 보습으로 갈고 떨리는 두 손으로 씨앗을 뿌려 흙을 묻습니다.
고국에서 가져온 껍질이 갈라 터지면 진 붉은 피 굳혀서 땜질하고, 억새풀처럼 굽힐 수는 있어도 끊을 수는 없는 그런 끈질김을 고집합니다. 백의흑관의 껍질을 끈질기게 고수하다가 땅을 빼앗고 추방시킨다는 협박에 머리태를 드리우고 껍질만은 하얀색으로 고집합니다. 그것도 안 된다고 호통을 치면 상투를 틀고 껍질을 호복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껍질을 바꾼 굴욕에 조상이 준 핏줄을 더욱 광적으로 고집하여, 결국은 당국의 타협으로 귀화역복해야만 토지수요권을 승인한다는 법령을 철폐하게 합니다. 창씨개명한다고 야단치고 황국신민 되여라고 선동해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자식 사람 되는 도리 엄하게 가르치고, 등뼈 깎아 자식 공부시킵니다.
의혈단이요, 독립군이요, 항일련군이요, 빨치산이요, 광복군이요 하며 이데올로기들이 막 설쳐도 내 보습으로 내 땅을 갈고 자식들은 사람답게 사는 도리 배워서 집문 나서게 합니다. 내 핏줄 내 자식이 있어서 물자 대주고 위험 무릅쓰고 삐라 뿌려주고 소식 전해주고 그런 거지, 무슨 민족대의요 고국해방이요 이런 건 벌레들은 모릅니다.
조선족 하면 ‘독립군의 후예’ 하며 자기 얼굴에 립스틱을 마구 칠하지 마세요. 조선족도 독립군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토벌대도 나왔고, 항일용사가 나왔을 뿐만 아니라 매국역적 인간망나니들도 나왔습니다. 똑똑한 놈, 의로운 놈, 우직한 놈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멍청한 놈, 저질쓰레기 간사한 놈 다 나왔습니다. 인간 사는 동네 어디나 다 마찬가지지 어느 곳의 명당이 그리 좋아서 우량품종만 나오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타계하신 박창욱 교수님한테 들은 적 있는 말이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매국역적 가문, 독립투사 가문 이렇게 말하지 말아라. 매국역적 가문에도 민족영웅 나온 적 있고 독립투사 가문에도 망나니 나온 적 있어. 그 가문들 자기 민족 다 팔아먹고 다른 민족 호적에 올리지 않은 이상 다 중국조선족이다. 좋은 가문, 나쁜 가문 따로 없이 그런 가문들이 있었기에 조선족이란 게 존재한 게구. 있은 거 있었다구 그대로 말하는 게 맞는 태도야.”
이 말대로 우리가 독립군 얼만큼 지지해서 조선족이 된 게 아니고 토벌대 얼마 지지해서 조선족이 못된 것 아니지요. 보습으로 파고 또 파서 뿌리를 내리고 조선종자라는 뚝심으로 모든 칼바람 이겨내고, 용사도 만들고 망나니도 만들고 하며 굳건히 자기 자리 지켰기에 조선족이라는 짜구배가 생긴 거죠.
혁명이란 것이 상것들한테 무엇을 얻게 했나 구요? 혁명이란 것은 상것들한테 벌레처럼 죽어서 사는 방법을 배워주었습니다. 병사리 마개를 아무리 꽉 조이고 몽둥이로 아무리 내리쳐도, 껍질이 벗겨지면 껍질을 벗고 알몸이 깨지면 깨진 조각을 부둥켜안고 벌레들은 그렇게 죽은 듯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꼬리빵즈 욕하고, 치발역복 강요하고, 창시개명 협박하고, 황국신민 강조해도 우리 할아버지들은 자기 보습으로 자기 땅 갈고 거기에 뿌리를 내려 조선족을 만들었습니다. 오랑캐령을 넘으며 가슴 찢어 뜯으며 오열 토한 후 영마루를 넘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여기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뿌리에서 잔뿌리를 잇어온 우리는 우리 할아버지 내놓고 다른 조상은 모릅니다.
당신들이 무시하는 짜구배 조선족은 생겨날 때부터 ‘사람이 하늘이다’라고 믿으면서도 벌레처럼 살아야 했던 족속입니다. 약삭빠르지 못하고, 계산에 밝지 않고, 배운 게 많지 않고, 제일 더러운 일 제일 위험한 일만 하면서 무시란 무시는 다 당하며 살지만,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건 당신들이 아무리 내리쳐도 그 사람들은 죽지가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께서 계승 받은 제일 값진 유산이 이를 악물고 자기가 맡은 땅에다 자기 뿌리를 깊숙이 박고 흔들림 없이 버텨가는 것입니다.
당신네들이 건교 초기 조선족 인부를 한 마리 두 마리로 계산하며 모욕줄 때도 그대로 참으며 일해왔고, 해본 적이 없는 고깃배 작업장에서 제일 밑바닥에 짓밟아 깔아놓고 불알쪽 터지게 때려도 이를 악물고 돈을 벌었습니다. 제일 더럽고 제일 독한 것들이라고 손가락질하여도, 그걸 못 듣는 척 무시하고 돈 벌어서 거기서 가게 꾸릴 자본을 마련합니다.
맨주먹밖에 없는 사람들이 등뼈 휘어들게 일하여 가리봉동, 대림 상권 만들었고, 그래서 당신들에게는 대낮에 도끼 들구 다니는 곳 이런 소일거리도 생겼죠.
간또 대지진 때 일본놈들이 그렇게 조센진들이 나쁜 일을 했다고 몰아세우면서 잡아 죽여도 일본에 조센진들은 다 죽지 않았고, 살아남은 조센진들은 수모 속에서 더욱 질긴 넝쿨들처럼 얽히어서 오늘날의 조선인사회를 만들었지요.
일본식 위계질서에다 일본군부세력이 서민층 다스리는 방식까지 딱 그대로 흉내 내는 당신들이 아무리 손가락질하고 삿대질해도, 우리 중국조선족들은 벌레처럼 죽어서는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우리 할아버지 내놓고 다른 조상은 모릅니다. 소수레에 모든 가장집물을 싣고 오랑캐령을 피눈물 삼키며 건너던 할아버지가 감사합니다. 눈파람 기승 치는 산속에서 자기 발목 도끼로 잘못 찍으면서도 나무를 해오던 아버지가 감사합니다. 손마디가 휘어들고 두 팔이 마비될 때까지 환자 치료하며 등뼈 휘어드는 작업을 하시는 어머니가 감사합니다. 짜구배 조선족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게 감사합니다.
아무리 벌레처럼 살아도 사람은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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