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상경을 한 지 어언 9년 세월이 된다. 돌아보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어제일 같은데 시간이 꽤 흘렀다. 지인이랑 서로의 상경기를 스펙 자랑이라도 되는 듯 열을 올려 말하고 보니 갑자기 그 시절이 너무 그리워진다.
◇ 어서 와, 북경은 처음이지?
25살, 결코 일찍하지 않은 나이에 나는 희미하게 꿈꿨던 상경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박사공부를 할 것인가 아니면 취직을 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서 잠간 방황을 하다가 취직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전에 북경에 잠간 다녀갔던 적은 있었으나 이제 장기 거주를 하려고 이불짐 지고 나타난 나에게 북경은 생소한 도시였다.
받아주기로 한 직장이 있었고 들기로 한 세집도 해결된 상태였다. 그리고 주머니에도 두둑하게 6천원의 현금이 있었다. 그 돈이면 년말까지 돈 걱정은 안하고 살 것이라는 근거 충분한 자신감도 있었다.
바로 이튿날 석달치 세집 입주금과 계약금으로 4,800원의 뭉치돈이 빠져나가자 그 두둑한 자신감이 갑삭 줄어들긴 했지만 불안까지는 아니였다.
부피 큰 캐리어를 끌고 택시를 타고 예정된 세집까지, 고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후텁지근한 대기 속을 달리며 나는 마냥 부풀어 있었다. 내가 쭉 있게 될, 어쩜 평생 있게 될지도 모를 도시구나. 여기서 살게 되겠구나. 막연하게 꿈꿨던 청사진에 색채가 입혀지며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들뜨기만 했다.
세집은 아늑했다. 나는 어떤 어린 부부랑 한집을 쓰게 되었다. 다들 조선족이라 집도 깔끔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짐을 부리워놓고 나는 필요한 것들을 사러 마트를 찾았다.
처음으로 내게 속한 나만의 공간을, 비록 낯도 코도 첨 보는 사람들이랑 나눠 써야 하는 공간이긴 하지만 어쨌든 오롯한 나의 공간을 내 맘대로 꾸며보고 싶었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커튼도 사고 침구도 여벌로 사갖고 즐거운 마음으로 세집으로 돌아왔다. 청소를 하고 그 커튼을 달 때까지도 나는 이 집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로 넉 달 뒤에 쫓기다 싶이 나오게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바쁜 사이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네댓달 훌쩍 지나 양력설도 지난 어느 주말, 건너방에 사는 어린 남편이 몹시 놀란 얼굴을 하고 내 방문을 두드렸다. 요즘 북경 왕징 집세가 다 올랐는데 집 주인이 이 세집 가격을 600원 올리겠다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한 방당 300원씩 더 내야 하는데 계속 거주할 생각이냐 묻는 것이었다. 자기네는 이 집을 나가기로 거의 생각이 굳혀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 번에 석달치 집값을 내야 하는데 그러면 당장 내 예상보다 900원을 더 내라는 소리다. 그리고 꽤 맘에 들었던 이 사람들과도 함께 지내는 게 아니고 또 새로운 사람들과 지내야 한다면…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당장 음력설이니 그동안 좀 더 생각하고 고향에 다녀온 담 더 생각해보면 어떠냐고 했더니 그럴 시간이 없단다. 돈을 더 내든가, 방을 빼든가 당장 결정해야 한단다.
하…설 때 고향집 가서 부모님께 희떱게 내놓을 돈을 겨우 천원 모았는데, 갓 태여난 아직 보지도 못한 조카에게 줄 선물 살 돈도 남겨두어야 하는데…
◇ 어서 와, 세집 찾기는 처음이지?
하는 수 없이 집 찾으러 나섰다. <모이자> 사이트의 게시판을 올리 훑고 내리 훑으며 세집을 찾아 보았다.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어떤 여자의 광고를 보고 솔깃하여 전화를 걸었더니 내 음성을 듣고는 “연변 사람이에요?” 하고 경상도 말투로 묻는다. “네.” 하고 대답했더니 “연변사람은 안 들이려구요.” 하고 무우 자르듯이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였다.
아니, 출신 지역 때문에 퇴짜를 당하긴 또 처음이였다. 전화를 놓고 생각해보니 화가 치솟았다. “연변 사람이 뭐 어때서? 자기는?” 하고 씩씩거리며 들리지도 않는 혼자 욕을 막 퍼부어댔다.
왕징은 한국 사람, 국내 각 지역 조선족들이 다 몰려 살고 있는 동네이다. 그렇게 오구작작 모여서 같은 집을 세 내서 살아가다 보면 모순도 많았을 것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녀자는 그 무렵 ‘연변사람’에게 꽤나 크게 데였던가 보다.
게시판에서 괜찮아 보이는 집을 몇 개 찜하고는 직접 보러 나섰다. 그날은 왜 그렇게 춥던지. 일년 중 해가 제일 짧다는 동지날이였을 것이다. 수중에 있는 돈에 맞춰 보러 다닌 집은 하나같이 초라해 보였다. 맘에 드는 집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던 길에 왜 그랬던지 설음 같은 게 북받쳐서 바보 같이 길옆에 쪼크리고 앉아 울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으로 한 집만 보고 돌아가자 하고 갔던 집이 그래도 여러모로 마음에 들어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거실 하나 방이 세 개였는데 큰 침실은 나랑 계약을 맺은 혼자 사는 녀자 가 살았고 맞은편 방에는 어린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나랑 계약을 맺은 그녀는 집 주인이 아닌 “二房东”이었다. 고향 사투리 중에 본분에 충실하지 않고 어중이떠중이 생활을 하는 자들을 가리켜 ‘얼방디’라고 하는데 아마 어원이 저 ‘二房东’ 아닐가 싶다. 그만큼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말이 되겠다.
25살의 어리지도 않은 시골 아가씨는 집 계약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른 채 그렇게 덥석 또 ‘얼방디’랑 계약을 하고야 말았다.
◇ 어서 와, ‘얼방디’는 처음이지?
그 집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흠이야 많고 많았지만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랬다고 사람에게는 가능한 것에 대한 성실성이라는 게 있다. 본인 능력으로 가능한 것 내에서만 불만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내 수중에 있는 돈을 생각하면 꽤나 만족스러운 집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게 있다면 옷장은 없고 커다란 책장만 덩그러니 있는 것이였다. 갖고 온 책을 다 집어넣어도 책장은 많이 남았다. 대신 옷 걸 데가 없어서 나는 옷들을 하나하나 개여서는 책장에 쌓아놓았다. 그랬더니 아침에 찾아 입기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며칠 지나 옷장을 사러 시장에 나갔다. 몇 달 쓰지도 못할 커튼을 비싼 돈 주고 산 것을 교훈 삼아 언제든 버려도 아깝지 않을 싼 간이옷장을 사기로 했다.
조립하기가 쉽다며 너 같은 초보라도 반 시간이면 뚝딱 조립할 수 있다는 가게 주인의 감언리설에 속아 국방색 격자무늬의 간이옷장을 사갖고 집으로 와서 펴보니 아뿔싸! 이 많은 나사와 쇳대들을 대체 어찌하란 말씀입니까. 허리춤에 량손을 지르고 그 나사들을 한식경이나 쏘아보다가 그래도 손을 대서 하기로 했다.
씩씩거리며 두시간 여를 싱갱이질한 끝에 비스듬하나마 옷장이 세워졌다. 국방색 격자무늬 천을 뒤집어 씌우니 꽤나 그럴 듯해보였다. 옷들을 다 걸어놓았더니 그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설 때부터 조금 비스듬하던 옷장은 70도 각으로 기우뚱하니 서있었다. 다시 나사를 조여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괜찮겠지 하고 지나갔다. 일주일이 흘렀던지.
그날은 직장에서 회식이 있은 날이었다. 술도 좀 마시고 늦은 밤 집으로 와서 불을 켜려고 간이옷장 뒤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는데 옷장이 무너질 줄이야. 며칠 간이나 기우뚱하니 서있던 옷장은 더이상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내 가벼운(?) 터치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노오란 등불 아래 국방색 무늬 옷장은 더구나 궁상맞아 보였다. 그날 나는 점도록이 무너진 옷장 위에 앉아 눈물을 흘렸었다.
“나는 지금 하나도 슬프지 않아. 이까짓게 뭐.” 하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던 것은 취기때문이 었을 것이다.
심심하고 외로운 생활이 계속되자 나도 남자친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할 때 짐도 날라주고 이를 테면 옷장도 조립해 줄 수 있는 남자친구가 있으면 참 좋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 그러니까 옷장도 뚝딱 잘 맞추고, 먼저 퇴근해서는 밥을 해놓고 부인을 기다리는 맞은편 집 어린 남편이 부러워서였던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나니 몇 달 지나 나에게는 정말로 이사짐을 잘 날라줄 것만 같은 성실해 보이는 남자친구가 생기게 되였다.
이 남자라면 평생을 같이 해도 대화거리가 마르지 않을 것 같다 하는 확신과 이사짐을 잘 날라다 줄 것 같은 성실한 인상에 결혼까지도 생각하게 되였다.
환상은 깨지라고 있는 것일까? 그 남자는 한 번도 이사짐을 날라 주지 않았다. 아니, ‘날라 주지 못했다’ 가 적절하겠다. 이사를 하는 날, 그 남자가 하필이면 출장이 잡혀 있은 게 문제였던지, 그 남자가 출장을 가는 날 하필이면 내가 이사를 한 게 문제였던지는 모르겠다.
그럭저럭 맘에 들었던 그 집에도 오래 있지는 못했다. 4달이 흘렀을가? 또 집값을 올린단다. ‘얼방디’와의 계약은 그렇게 휴지 조각이 될 가능성이 많았던 것이다.
출장 중이던 남자친구는 내 새 집 찾기에 도움을 줄 수 없었지만 나는 언제라도 도와줄 수 있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 어서 와, 이런 인구 밀도 높은 세집은 처음이지?
다시 또 고만고만한 세집을 찾아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집세 시세는 날로 오르고 내 수중에 돈은 그대로다보니 내가 찾는 집은 점점 조건이 못해갔다. 그 집은 널판자로 방을 가로 세로 막아놓고 열 명 되는 입주자들을 마구 집어넣은 곳이었다. 화장실이 늘 붐벼 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야 했다. 빨래를 하려고 열었던 공용 세탁기에선 커다란 남성용 운동화가 흙물을 뒤집어 쓰고 나와서 놀랐고 공용 주방에 있는 랭장고에선 시시때때로 악취가 풍기는 과일들이 나와서 충격을 먹기도 했다.
내 방 건너편에 혼자 사는 키가 훤칠한 남자는 자주 열쇠를 가지지 않고 외출해서는 늦은 밤 만취한 채 초인종을 눌러댔다. 자정이 넘은 시각 울리는 초인종은 가끔 공포스러웠다.
출입문이랑 가까운 방에 든 누군가가 열어주겠지 하고 기다리면 초인종은 끝도 없이 울려댔다. 각 방에서 욕하는 소리도 들렸다. 참다 못한 내가 나가서 문을 열어주면 그는 만취해 벌겋게 충혈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谢谢哈~” 하고는 비틀거리며 제방으로 걸어들어가는데 나는 너무 무서워 잠을 더 잘 수 없었다.
내가 있는 이 방은 안전한가? 저 얇은 널판자를 장정의 힘으로 툭 밀면 바로 넘어지지 않을가? 취객이 들어오면 나를 구해 줄 사람은 있을가? 다행히 그랬던 적은 없었고 그런 내 걱정들은 기우였다.
그리고 네 번째 세집은 고마운 선배님 덕분으로 위치는 조금 편벽하고 회사와는 조금 떨어졌지만 깨끗하고 널직한 집을 통채로 세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쯤엔 결혼도 하게 되여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그곳에 틀게 되였다. 그 집에서 아이를 낳고 새 집도 장만했다. 그러는 사이 ‘명랑소녀’는 꽤나 억척스러운 ‘아줌마’가 되였다.
걸어온 자국들을 되새겨보니 고비마다 결코 쉬운 걸음은 아니였지만 힘들다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백화점에서 맘에 드는 코트를 하나 봐두고 네 번이나 찾아가 입어 보다 월급날 찾아가서 어렵사리 사다 머리맡에 걸어두고서는 자다가도 일어나 흐뭇하게 쳐다보던 그런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코트 몇 개쯤 살 수도 있지만 그런 감격은 사라졌다.
어느 가을비 내리는 주말에는 혼자 798예술구에 가서 그들먹히 차오르는 감격으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냥 그 자리에 서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던 것 같다.
나는 꼭 필히 잘살 거라는 그 근거없는 자신감은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처자라 가능했다.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가난은 ‘슬픔’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랑만’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래일 당장 월급날인데 수중에 1원이 남아 전전긍긍하던 시간도 있었지만 그러했기 때문에 고마운 친구가 찾아왔을 때 지갑 사정 생각않고 밥 한 끼 살 수 있는 지금에 나는 만족한다.
세집 찾아 추운 날, 왕징 밤거리를 전전하던 날들이 있어서 내 크지 않은 보금자리에 행복하다.
명랑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소녀’는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될 수만 있다면 명랑 ‘아줌마’로 남고 싶다. 여전히 꿈 꿀 수 있다면 명랑한 ‘아줌마’가 되는 건 어려운 건 아니지 싶다. 그렇게 명랑 ‘아줌마’, 명랑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은 큰 욕심을 부려본다.
뭐 사진으로 보니 아직 “명랑소녀”군요? 글이 아주 발랄하고 재치 만점임다. 기대하겠슴다.
금방 상경하셨을때의 어찌보면 힘들엇던 일들을 참 재미있게 잘 적엇네요 ㅋㅋ 북경에서의 행복한 삶을 응원합니다!
집 떠나 타향에서 쉽지 않았을, 그리고 갑자기 불쑥불쑥 닥쳤을 허무한 상황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이겨낸 경험이 보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영화로 만들어도 되겠슴다. ㅋㅋ
북경에서의 적응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