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의 무더위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풀이 죽은 상추 잎파리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그래서, 여름이면 밤이 기다려진다. 해가 떨어지고 조금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여름밤은 맥주 한잔 하기 딱 좋다. 팥빙수 한그릇도.
어렸을 때, 여름만 되면 나는 저녁에 가족들이랑 夜市(야시장?)를 찾아갔다. 그건 마치 하나의 룰 마냥 매일 반복되었고, 특별한 이유없이는 거르지 않는 우리집만의 일상이었다.
아빠가 제일 앞에서 걷고, 그 다음은 나, 엄마는 늘 느릿느릿 뒤에서 따라온다. 아빠가 너무 앞서가면 잠깐 발걸음을 늦추게 하고, 엄마가 너무 뒤쳐지면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 夜市대오를 일정한 속도로 발란스를 유지하면서 도착지까지 무사히 이동시키는게 내 임무였다. 각자의 발폭이 다르니 셋이 비슷하게 걷기란 쉽지 않았다.
아빠는 운동이 목적이었고 엄마는 산책이 좋았으며 나는 그저 夜市에 鱿鱼串이 매일 먹고 싶었을뿐이다.
도착전까진 일단 걷느라고 서로 별로 대화가 없다가, 夜市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 먹고 싶은게 다르니 말도 많아진다.
맥주가 마시고 싶다는 아빠, 팥빙수가 먹고 싶다는 엄마, 더러운거란 더러운 건 골라서 좋아하는 나.
아빠는 내가 먹고 싶다는 걸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사주지 않고, 엄마는 아빠가 마시고 싶다는 맥주를 <동무 배 좀 보셔, 맥주 마심 배 더 나옴다.> 란 이유로 제지한다. 아빠는 날씬했다. 배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우리 셋은 늘 엄마가 좋아하는 팥빙수를 먹는다. 어쨋든 엄마가 즐거워야 한다. 이건 중요한 일이다. 좀 더 컸을 때라고 생각하면 아빠랑 내가 맥주 마시기를 동시에 찬성했을거니 즉 2:1이니까 절대적인 승부를 봤을텐데, 그땐 내가 어려서 아빠의 맥주동반자가 될수 없었다.
가끔 鱿鱼串이 꼭 죽도록 먹고싶은 날이 있다. 전생에 鱿鱼串을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은 듯. 그런 날이면 팥빙수고 뭐고 혼자 鱿鱼串 기본 5개는 먹는다. 수량이 적어보인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지만 한개의 크기가 어마어마했음. 그런 날은 엄마 아빠도 체념한다. 같이 鱿鱼串파티다. 그럼 또 맥주가 빠질수 없지. 둘은 扎啤 하나씩 더 오더한다. 그사이 나는 양꼬치 10개를 더 먹는다.
결국 夜市까지 갔다왔다 왕복 두시간 거리를 운동한다는 핑계로 우리는 매일 밤 뭐를 먹고 온다.
또 먹은거치곤 걷기를 해서 그런지 잠자리에 들 때면 단 한번도 속이 더부룩한 적이 없다.
식상한 <夜市먹거리는 맛있는데 너무 더럽다.>는 아빠의 쓸모없는 잔소리와 오늘은 뭐를 먹는가 하는 메뉴쟁탈전에서 늘 우승인 엄마, 그리고 돌아오는 길 내내 먹어서 후회된다는 나의 의미없는 말들. 이 모든 건 여름밤 매일매일에 반복됐다. 그렇게 한 여름을 우린 <산책이라 쓰고 먹빵이라 부르며>보내버린다.
우리집은 서쪽끝에 있었고 , (서시장도 있었지만) 우린 늘 동시장夜市를 택했다. 오래 걷기 위해서, 많이 칼로리를 소모하기 위해서. 그때는 참 먼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보니 그게 훈춘의 동쪽부터 서쪽끝까지의 총 길이었다.
걸어서 한 도시의 처음 끝부터 다른 끝까지 갈수 있다니.. 그걸 여름만 되면 매일밤을 왔다갔다 왕복을 했다니.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런 도시라는 생각밖에 안든다.어쩌면 그 정도로 작을수가 있는가 ㅎㅎ, 어쩌면 그 공간이 그땐 그렇게 커보였던걸까.
6시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세식구가 편안한 옷차림으로 출발 준비를 마치면 7시. 夜市를 돌고 집까지 오면 보통 10시. 가는데, 오는데, 먹는데 대충 1시간씩 소요. 가끔 오는 길에 이쁜 꽃을 보고 감탄을 하거나, 멋진 밤구름에 빠져서 구경을 하거나, 화제 하나를 둘러싸고 셋이 변론대회를 열거나, 너무 먹어서 발걸음이 1.5배속으로 느려지거나 등등 경우를 생각하면 늦어서 10시반 도착. 싰고 누우면 11시.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집 식구들은 11시-11시반 사이면 언녕 꿈나라로 갔던 거 같다. 불면증이란 생각할수도 없는 단어였다.
그렇게 여름밤의 공기는 夜市의 냄새로, 여름밤의 운동항목은 빨리걷기로, 여름밤의 수다는 온갖 중요치 않은 잡담으로, 여름밤의 기억은 오랜 세월 내 가슴에 남겨졌다.
아빠는 꽃을 좋아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심했던거 같다. 여름밤 산책길에 보이는 모든 화려한 꽃옆에 나하고 엄마를 가서 서라고 했으며, 엄마는 짜증을 냈다. 매일 보는 꽃을 매일 찍고, 매일 가서 서는거도 피곤하다고.
엄마는 꽃보다 팥빙수를 더 좋아했던 거 같다. 매일 먹어도 매일 행복해하면서 맛있다고 했다. 다행이, 내가 꽃을 좋아하는 편이긴 했다. 근데 나는 후줄근한 운동복 차림으로는 또 사진을 찍기가 싫었다. 결국 아빠가 꽃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을때 맞장구는 쳐줄수 있었지만, 나도 꽃옆에 가서 서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아빠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놈의 <鱿鱼串이 위생적이지 않다>는 잔소리처럼 <여니야, 저기 저 꽃 옆에 서바라> 를 반복했다. 번마다 거절을 당하면서도 포기란 모르는 남자였다. 지겹다. ㅎㅎ
아빠는 전생에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전생에 팥빙수가게 사장이었을 것이다.
먹는 건 엄마가 좋아하는데 우리집 요리는 아빠가 다 하고 있었고, 집에 꽃화분이 많았지만 엄마는 꽃에 무관심했다.
무튼, 초중을 진학한뒤로 나는 응시교육이 낳은 순종적인 학생으로 전락하며 여름밤이고 겨울밤이고 밤낮 공부만 했다.
어린 나이었지만 여름밤의 나날들은 오랫동안 내 몸속에 기억됐으며, 후에 대학을 가서도 또 대학을 졸업하고 왕징에서 살았을때도, 나는 여름밤만 되면 친구와 산책을 반복했다. 여전히 루틴은 똑같았다. 삶에 아무런 도움 안되는 헛소리로 시작해서, 중간에 나이차(奶茶🥤)나 마라탕을 먹어주고, 돌아오는 길은 늘 <야, 우리 너무 먹지 않았니? 미치겠다 ㅠㅠ> 로 마무리되었다.
빡센 운동이나, 치열한 공부, 혹은 미래에 대한 심각한 불안이라든지 강렬한 열정따윈 없었다. 여름밤은 온전히 더위를 피해 휴가를 온 느낌으로 머릿속에 각인된 걸 보면.
우연히 7년전 미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공부만 했던 시절처럼 더이상 나한텐 이런 여름밤이 없었다. 얼마전 강아지 별이를 키우기 전까지. 요즘은 그래도 강아지 산책이라는 이유로 가끔 걷고 있지만 그 조차도 차를 운전해서 도그팍에 가는 횟수가 더 많은 비례를 차지한다.
얼마전 엄마아빠가 친척오빠랑 할빈에 여행을 간 영상을 봤다. 아빠의 발걸음은 더이상 옛날처럼 빠르지 못했고, 엄마의 발걸음을 느릿느릿을 초월해 겨우겨우가 되어있었다.
몇년전, 겨울 얼음바닥에 넘어져서 무릎을 다친 뒤로 엄마는 점점 걷기 힘들어했다. 미국에서 약도 많이 사보냈고 침치료법, 중약도 시도했지만 큰 호전은 없었다.
아빠는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성격으로 젊었을 땐 한끼에 밥 두세공기를 꼬박꼬박 드셨어도 날씬하고 근육있는 탄탄한 몸매였던거로 기억하는데, 이젠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한끼에 한공기를 드신다고 하는데도 배는 엄청 나와있었다. 가끔 영상통화를 하면 잔소리는 여전하고 변한 건 배 홀쪽에서 배 뿔룩이 된거 밖에 없었다.
어느날인가 셋이 다시 여름밤 산책을 할수 있다면, 아마 나는 힘겹게 내 뒤를 바싹 따라오고 있는, 숨이 차 하는 두 나이든 부모를 뒤돌아보고 있겠지..? 더이상은 발빠른 걸음걸이로 나를 한창 앞서가는 아빠의 날렵한 뒷모습이나, 유유히 대수롭지 않게 사탕을 먹으며 걸어오는 엄마의 귀여운 얼굴을 볼수가 없겠지.. 중간에서 이 대오의 일정한 거리유지를 책임지고 발란스를 맞추는 역할도 없겠지..
아름다운 바닷가에 가서, 둘의 중간에 서서, 각자의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어보고 싶다. 살과 살을 맞대며 여전히 나는 이 대오의 일정한 속도의 전진을 조절하는 역할로 중간에서.
여름은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밤은 좋아한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바람도 불어오고. 지평선 너머로 노을도 지고. 가끔 자연의 소리들도 들려오고. 맥주한잔도 땡기고. 팥빙수도 그립고. 鱿鱼串도 그렇게 파는데만 있다면 가서 사먹어보고 싶고. 어깨의 짐이 더이상 책임감이 아닌 책가방이고도 싶고.
그들과 함께 한 내 여름밤은 파스텔톤이었다.
특유의 밝고 산뜻한 색감의 사랑.
소리있는 풍경화를 본 것 같았습니다. /여름밤만 좋다에 🤝
우리 만나는 날엔 장소와 시간을 여름밤의 맥주집으로 잡을가요? ㅎㅎ
鱿鱼串과 팥빙수도 돼요. 👌
铁板鱿鱼🦑YYDS
엄마아빠랑 예전처럼 산책을 못한다는 대목에서 뭉클했습니다.
진짜 여름은 밤만 좋은거 같습니다. 추억거리도 많구.
여행영상 보는데 좀 짠합데다 ㅠㅠ 맞음다, 여름밤은 추억만들기 좋음당
아… 글도 좋고, 컬러도 좋고, 기억리콜도 좋고, 그냥 다 좋은 그런 컨텐츠네요 ㅋㅋ 야시장하면 저도 오징어쵈 ㅋㅋ 그리고 엄청 해보고 싶었는데 해보지 못한 “총으로 풍선 쏘기” 게임….
총으로 풍선 쏘기 은근 쉽지 않음다 ㅋㅋㅋㅋㅋㅋ 해보고 몇개 맞췄는지 알려주쇼 ㅎㅎㅎㅎ
오징어쵈….하… 쵈료 듬뿍 묻혀서 아…
항상 밤중이면 땡기는 오징어쵈 … 배고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