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말은 누구나 말할 수 있고 어렵잖게 얘기가 오고갈 수 있는 화제로 되기 쉽다. 연변말이 연변사람에게 역시 그럴 것이다. 연변말을 파서 헤쳐보고픈 뜻을 "고고학"이라는 짧은 단어로 쓰긴 했다만, 어딘가 거창하고 딱딱하고 고리타분해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GoGo學"이라는 표기로 가벼움을 더해보려고 했다. 가며가며 배워보자 라는 뜻도 살짝 곁들여졌을지도. 

연변사람이라면 매일 하는 연변말, 어딘가 거칠고 거침없을 때도 많지만, 사실 여태껏 많이 얘기되었다시피, 연변말은 옛 우리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함경도 사투리 자체가 워낙 조선의 지리상 변방이라 옛날 말이 살아있기도 하고, 건국 후의 연변도 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아 말이 많이 변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언어학적으로는 육진방언(六鎭方言)이 분포된 중요한 지역이며 중세 조선말의 요소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알려진다. 

4郡6鎭(오른편 파랑 점선 부분이 육진)

그런 연변말을 제1언어로 삼아온 네이티브로서 알게 모르게 느끼고 생각하곤 했던것 들을 조금씩 적어볼까 한다. 그 첫 코를 "도투새끼"로 운을 떼게 됐으니 욕심많은 놈이란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1. 

연변말에서 도투는 곧 돼지다. 도티라는 어형도 있다. 이른바 표준어에서 "돼지" 의 이미지가 그렇다시피 연변말에서도 "도투"는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있진 않다. 더럽고 욕심많고 심술궂고 양보없는 등등. 여기에서 갈라지고 살이 붙어생긴 말들로는, 

도투새끼, 도티새끼: 채 자라지 않은 어린 돼지. "새끼"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쓰임새를 따라 돼지같은 속성을 가진 사람을 빗대어 이르는 말.
(연변말 예문: 저 도투새끼 같은게 이 담에 머이 되겠는지 모르겠다.)

도투바이: "도투+아바이"의 줄임말로 보인다. 아바이는 할아버지, 연세많은 분을 일컫는다. 도투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아바이라는 높임말이 붙어서 생긴 대조로 인한 긴장감은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느낌을 풍기는데, 상대방의 심술궂음과 욕심을 나이과 상관없이 빗대어 돌려서 하는 말이다.
(연변말 예문: 영수랑 좀 농가 먹어라, 어째 이리 도투바이새 하니?)

오늘날 우리는 자연스레  "돼지"를 표준어로 쓰고 "도투"는 사투리라 상스럽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도투"는 예로부터 있었던 바른말이고 국가적인 공식문장에도 등장하던 말이다. 

<용비어천가> 서울대 소장본 1장 부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고 들어본 분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들어봤을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가 바로 용비어천가 1장(첫 구절)에 나오는 구절을 따온 작명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뒤 제일 처음 지어진 한글 작품이 <용비어천가>로서 그 의미가 깊다. 내용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태종 및 그 선조의 덕을 기리고 훗날의 임금들이 경계해야 할 점들을 시가로 지은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의 <시경>(詩經)의 문체를 본따고 왕궁의 행사에서도 실제로 음악에 맞춰 불려졌던 가사이다. 

바로 이 용비어천가에 "도투"가 등장한다. 

교토대학 소장본 65장 부분. "도투"(제2행), "놀"(제4행)

용비어천가 제65장 원문:

현대어 번역:
동산의 (멧)돼지를 베사 장사 (장수) 들은 말이 누리를 뽑을 (듯한) 기상이 어떠하시니 / 가파른 비탈의 노루를 쏘사 휘하 (장수) 들은 말이 누리를 덮을 (듯한) 기상이 어떠하시니[글쓴이]

나랏님도 자주 "도투"랑 "놀가지"랑 잡으러 놀러 다녔던 모양이다. 

(한자 "豖"에 대응)이라고 표기된 이 단어가 바로 연변말 "도투"의 원형으로서, 단독형은 "돝"(아래아"・")으로 추출될 수 있다. 여기에 발음의 편의상 토가 붙어, 

  • 돝 + 을 > 도틀 > 도트 或 도투
  • 돝 + 이  > 도티 

와 같은 변화과정을 거쳐 연변말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보인다. 

요약해 보면, "도투, 도티"는 최소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 우리말이며, 왕을 기리는 국가적 문장에서도 쓰여졌을 만큼 "표준어"적이었다는 것이다. 

2. 

그렇다면 "돼지"라는 낱말은 어디서 굴러온 돌인가?사실 답은 간단하다. "돝"이라는 단어에 "-아지"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만들어진 말이다. 

"-아지"라는 말은 그리 낯설지 않다. 

[牛] 소 + 아지 > 송아지; 새지(연변말)

[犬] 개 + 아지 > 강아지; 개지(연변말)

[馬] 말 +아지 > 망아지; 매지(연변말)

[麂]놀(노루) + 아지 > 놀가지(연변말)

이와 같이 "-아지"라는 접미사는 어떠한 사물의 작은 꼴을 이르는 말로 귀납될 수가 있다. ("싹 > 싹아지 > 싸가지"나 "손목 > 손목아지 > 손모가지" 등도 같은 유형으로 보여진다)

어릴적 버들"개지" 혹은 꼬독"개지"

위와 같은 구조로, 

  • [豚] + 아지 > 돝아지 > 도아지 > 도야지 > 돼지

라는 과정을 거쳐 "돼지"라는 낱말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가운데 과도어형인 "도야지"는 제주도 사투리에 오늘까지 남아있다. 

 돼지는 돝아지가 변형되어 생긴 어린 돼지, 새끼 돼지를 이르는 말로서, 송아지나 망아지처럼 귀엽고 이쁜 어감의 말이어야 맞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새끼 돼지", "돼지 새끼"란 말을 사실 의미적으로 중복된 틀린 말인 셈이다. 물론 "돼지 너 이놈" 이라고 얕잡아서 "돼지새끼"라고 쓸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3.

그러면 "도투"와 "돼지"는 어쩌다 오늘의 이모양 이꼴이 되었을까. 실증적으로 이렇다 할 정답은 없을 듯하나 아마도 "돝"이라는 말 자체가 발음하기 어려워서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는 정도다. 이는 연변말에서도 "돝"이라는 단음절로 쓰이지 않고 "도투", "도티"로 뒤에 모음이 붙어 쓰여지는 걸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소나 말과는 달리 "pig, 豚(猪)"를 뜻하는 "돝"이란 낱말은 단독으로 쓰이기 보다는 접미사 "-아지"가 붙은 작은 꼴 낱말 "돝아지 > 도야지"가 더 많이 쓰이다가 "돼지"라는 어형으로 현대어에 굳어지기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연변말은 토(격조사)를 붙인 어형을 써서 발음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고유의 어형과 의미 모두를 보존하는 다른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4. 

이로써 연변말 "도투"에 관련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도투[돝](○)     【완전(!!!)표준어】
  • 돼지(◎)           【아기돼지, 틀린(?) 표준어】
  • 새끼돼지(Ⅹ)   【아기 아기돼지, 틀린 말】
  • 돼지새끼1() 【아기돼지 아기, 틀린 말】
  • 돼지새끼2() 【아기돼지 같은 놈, 맞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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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떠돌면서 듣고 모으고 배우는, 이야기 "꾼"이 되고싶은. 연변, 북경을 거쳐 교토에서 고전과 씨름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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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사적으로 한자어가 들어오면서, 고유어의 지위가 떨어지면서 워낙 중성적이었던 고유어의 뜻이 속된 말 뜻으로 전락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양 > 꼴, 비계 > 흰살이 등과 같이 말입니다.

  1. 여기서는 연변말에 초점을 맞추어 그렇지만, 물론 지금은 “돼지”라는 낱말의 의미가 외연이 확장되어 ‘아기돼지”가 아닌 그냥 ‘돼지(豚)’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사실 돼지는 아기돼지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거기까지만 쓴 글임을 이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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