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생의 기억 시리즈는 읽으면 아시겠지만, 어떤 장르도 아닌 그저 기록입니다. 

—————-

  1  

지난해 가을,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인생대사를 치렀다. 

늦게 가거나 안갈줄(못갈줄) 알았던 큰딸은 까마득한 예전에 벌써 결혼을 시키고 엄마친구들마다 며느리 삼고 싶다던 둘째의 결혼에 관해선 크게 걱정을 안하시던 부모님은 동생 나이 서른이 넘어 가자 슬슬 구박모드를 가동하셨다. 

늦게까지 싱글로 사는 청년들은 다 공감할 것이다. 부모님들은 대개 대외적으로는 “내 자식이라 그런게 아니라 정말 어디 내세워도 손색없다”는 모드이고 대내적으로 즉 집문을 닫는 순간부터는 가차없는 구박태세를 취하신다. 어느 날에는 한껏 치켜세우다가 또 어떤 날에는 일부러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그저 어느 한마디라도 자식을 혼인의 울타리안으로 떠밀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게 전략인것 같지는 않고 마음이 오르락 내리락 널뛰기를 하시는 것 또한 내자식이라서 그런것 같다.

아무튼 그런 둘째딸이 드디어 결혼을 했으나 연변식 전통혼례는 아니었다. 결혼만 하면 된다 그리고 너의 의견을 존중한다가 평소 부모님의 입장이었으므로 크게 문제 될것은 없었다. 또한 동생일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던 나는 모든걸 거의 셀프로 진행하는 동생의 결혼식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서 꼬박 이틀간의 막노동을 시전하였다. 좋은 날 아름다운 교회 예배당에서 모든게 감사한 혼인식을 치렀다.  결혼식 당일 한복에 올림머리가 이상하게 나와서 누군가로부터 신부어머니시냐는 멘트도 들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하, 전 신부 언니입니다. 

  2  

그 신부언니는 친동생이 하나밖에 없으니 한번만 바쁘면 되는줄 알았는데, 설무렵으로 계획한 고향피로연은 어느새 야금야금 일이 커지고 있었다. 원래 친척과 지인들을 모시고 식사만 하기로 하였던 것이, “상을 받게 하고싶다”는 부모님의 소원을 만족시켜드리고자 결국은 연변식 혼례를 한번 더 치르는 걸로 결정이 났다. 어쩌다보니 사회도 언니가 보는걸로. 언니와 형부가 축가도 부르는 걸로. 이번에도 나는 또 바빠야 하는걸로.

대충 모양만 내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또 점진법 걱정 3연타를 하신다. 1타: “니 사회 순서를 아니?” 2타: “말으 제대로 할만하야?” 3타: “어우 나도 모르겠다.” 마지막 한마디가 효과를 본 것인지 결국 나는 동영상을 빌려다가 보면서 순서를 받아 적고 그걸 조절하여 맞춤형 결혼식순서를 만들어내고 친정에 가서 리허설까지 했다. (검사를 마쳤다) 번거롭긴 했으나 배경음악도 직접 고르고 아는 예술단 분을 모셔서 가야금 독주도 순서에 넣을 수 있어서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사회자 멘트와 배경음악을 준비하면서 어릴적 듣던 고향 노래도 찾아보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어린시절에 본 결혼식들이 생각났다. 기억을 소환하여 그때 그 날들의 시각효과와 청각효과를 동원하여 조각을 맞춰보았다. 

  3  

그러고 보니 그때는 “결혼한다”라고 하지 않고 “잔치한다”라고 말했다. 그냥 생일잔치라고 오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로 그때 연변에서 “잔치”는 거의 “결혼”이라는 단어 대용으로 쓰였다. 또한 지금처럼 “연애”를 한다고 하지 않고 “약혼을 한다”라고 흔히들 말하였다. 

그렇게 약혼을 하고 나서 잔치날짜를 잡으면 집안식구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요즘에야 호텔이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지만 90년대에는 식당에서 식을 올렸고 그보다 썩 전인 80년대에는 집에서 “잔치”를 하였다. 내집이 작으면 동네에 집이 꽤 큰 집에서 잔치를 하거나 아니면 옆집을 빌려서 그집에까지 손님상을 차릴 정도로 그때는 이웃사촌들끼리 사이가 좋았다. 

일본식 집의 잔재인지 연변에도 미닫이 문으로 방과 방사이를 막은 집들이 많았는데 이 미닫이 문들은 잔치날이면 유독 은을 냈다. 일단 잔치 전날에 미닫이 문을 모두 문턱에서 해체한다. 이러면 일단 방과 방 사이가 시원하게 트여서 손님맞이 하기에 제격이다. 그리고나서 집집마다 쓰는 밥상인 동그란 밥상을 몇개 가지런히 붙이고 그 위에 미닫이 문을 길게 걸쳐놓는다. 그런뒤 두꺼운 흰색 종이로 상위를 덮는데 흔히 달력의 뒷면을 많이 활용하였다. 하얀 종이밑의 사정이야 어찌 됐든 일단은 정갈한 모양을 갖춘 상 위에 큰상차림을 시작한다. 

“남의 잔치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다”는 속담은 다 경험담이었던지, 목소리 높은 어른들끼리 진짜로 상차림에 대해 고견이 많으셨다. 상차림에 올라가는 삶은 닭 두마리와 각종 떡과 색과자와 과일들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모양만 내기 위한 오늘날의 상차림과 달리 옛날 상차림 음식들은 잔치뒤에 먹을 음식들이라 더 정성들여 만들었던 것 같다. 쫓겨날걸 알면서도 어린 아이들은 상차림 주변을 맴돌았는데 먹고 싶어 그랬던지 색색의 음식들이 예뻐서 그랬던지, 아무래도 둘다였던 것 같다.

상을 다 차려놓고 기다리노라면 새각시를 데리러 간 팀이 드디어 남자집에 도착한다. 지금은 거의 본식에는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고 테이블을 돌며 하객들에게 인사할 때에 한복으로 갈아입지만, 옛날에는 달랐다. 아래위 같은 색상의 한복에 너울을 썼는데 거의 발끝까지 드리운 길이였고 너울머리에는 꽃이 달려있었다. 한복도 요즘은 치마폭을 풍성하게 하는 속치마를 안에 입는데 그때는 풍성한 한복을 본일이 없다. 남자들은 주로 중산복이나 양복을 입었던것 같다. 한마디로 검소한 차림이었다. 온 국민의 의상이 초록과 곤색으로 물들어 결혼식조차 거의 생략했던 70년대를 떠나보낸지 얼마 되지 않아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새각시는 그날 모두를 압도하는 모습으로 “곱다”라는 단어를 아끼지 않기에 충분했다. 

새각시의 표정 또한 세월에 따라 많이 변했다. 지금도 시집가는 딸은 결혼식날 눈물이 날 일은 많지만 대체적으로 신부도 표정이 밝은 편이다. 자유연애를 통한 결혼이며 옛날처럼 혹독한 시집살이를 할 일도 거의 없을뿐더러 양가 부모님들의 넉넉한 지원으로 결혼 동시에 새 집과 새 살림을 장만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유중의 하나일 것 같다. 

그러나 옛날엔 달랐다. 자유연애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부모님을 통한 중매결혼이 더 많았고 결혼하면 시부모와 같이 살아야 했고 시집장가를 가지 않은 신랑의 동생들까지 챙겨야 하니 결혼과 동시에 “고생문이 열린다”고 말할 정도로 결혼은 여자에게는 큰 다짐이 필요한 일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잔치날 새각시들의 표정은 대개 우수에 찬 눈빛에 얌전한 아우라가 정석이었다. 하하호호 웃는건 철이 없는 표현이었고 자칫하다간 어디 모자라게 보일 판이었다. 

80년대 연변 조선족 신랑신부의 복식(인터넷 자료사진)

동네에 첫 발을 들일 때부터 동네사람들의 평가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물이 좋네 보통이네, 키가 크네 작네, 신랑각시 어울리네 또는 누가 아깝네 기타 등등 외모품평회의 첩첩한 관문을 뚫고 신랑집에 들어서서 가까운 친지부터 사돈의 팔촌까지 인사를 하고 절을 하고 나면 절하는 자리에 깔았던 호랑탄재만 눈앞에 아른거릴것 같다. 

드디어 큰상에 가서 앉고 신랑은 닭모가지를 비틀어 주머니에 넣고 신랑신부가 교배주를 마시고 아들이 나올때까지 세번이고 네번이고 바가지를 던지는 등등 절차를 밟는다. 이때 모든 가족, 친척 그리고 동네 식구들은 큰상 주변으로 겹겹이 서서 구경하며 모든 절차의 본질이야 무엇이든 간에 잔치날의 주인공인 신랑신부와 그날의 백미인 큰상을 중심으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들을 한껏 드러내는 순간들이다. 

 4  

여기까지가 나의 기억속의 어릴적 잔치날의 모습이다. 아주 어릴 때는 집안 잔치나 친척집 잔치들속에서 마냥 신났었고 중2병과 더불어 사춘기의 절정을 겪던 10대시절에는 이런 향토적인 결혼식은 나중에도 나와는 상관이 없을줄로 알았다. 가장 자유롭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긴 20대의 날들을 지나고 나니 삼십대는 정말로 빠르게 흘러갔고 이제 나는 성인의 모습으로 “잔치날”의 언저리에 서 있었다. 

걱정하던 동생의 잔치는 나름대로 무사히 지나갔다. 상차림도 원만했고 사회는 교과서 읽기 수준이었으나 그런대로 구색은 갖췄다. 언니와 형부의 축가는 대략난감한 고음불가였으나 그 역시 뒤에 동생 부부의 멋진 듀엣을 받쳐주는 역할을 했다고 정신승리로 마무리했다. 시종일관 흡족한 부모님의 표정과 밝은 동생부부의 얼굴을 보니 모든걸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하이라이트는 예술단 선생님의 가야금 독주로 들은 “노들강변”이었다. 분위기에 이끌려 생전 처음 한복차림으로 결혼식에서 큰 타원형의 한부분이 되어 가족군무에 동참하여 몇바퀴 돌고 나니 마치 자아를 상실하는 것 같은 살신성인의 경험도 하였다. 그때 나의 눈에 띈 데자뷔 같은 그 화면, 친척들 속에 있는 조카들의 모습, 어릴적 잔치날에 신나하던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었다. 

나의 어릴적 기억속에 그때의 “잔치날”이 따뜻한 추억으로 남았듯이 정유년 끝자락의 화려하지 않았던 이 결혼식도 조카들의 기억속에 한자락 선명한 풍경으로 남겨질까 궁금해진다. 

[2018.4]

이 글을 공유하기:

진안

무소속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
6
응원합니다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