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이와 란이는 1선도시의 직장인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일 수도 있지만 밖에서 보기엔 대기업 회사원이었다. 어쩌다 그걸 다 내려놓고 국제이사를 하고 나니, 현이는 대학원생이 되었고 란이는 육아맘이 되어 있었다. 꿈이라고들 하고 새로운 가능성이라고들 하는 그런게 계기였다. 

항상 그렇듯 새 출발은 쉽지 만은 않았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쟤는 공부도 못하면 뭘 할 수 있겠냐는 소리를 듣던 현이는 아는게 너무 없다고 학문의 벽 앞에 산산이 깨졌다. 말 잘하고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란이는 의도치 않게 'Lost in translation'의 주연이라도 된 듯한 언어 장벽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 다음은 부부의 일상적인 연출. 다투고 부딪치고 육아에 지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현이는 그런건 혼자 할 수 있지 않냐, 그것도 모르냐 하고 란이를 나무란다. 란이는 그깟 대학원 공부 좀 하는게 뭐가 대단하냐고, 공부 공부 그 놈의 공부 때문에란 소리 좀 그만하라고 쏘아 붙인다. 그리고는 제각기 씩씩거린다. 

삶에 우열이 있던가. 지식에 귀천이 있던가. 다른 걸 틀리다고 하는 말부터 바꿔야 할텐데, 그 생각이 잘 바뀌지 않는게 인간이던가. 그래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조금씩 깨쳐 가는게 또한 인간이 아니던가. 

그런 중에 어떤 날의 깨달음 하나를 아래에 적어 본다. 

현이는 고전을 공부한다. 고전 중에서도 원본자료와 밀접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몇 백년 전의 자료 즉 책을 자주 만진다. 천년 전의 책도 적지 않게 만진다. 자료에는 그 자체에 연대가 씌어있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책에 입이 달려 말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정보를 종합하여 연대를 판단하는 것에서부터 조사와 연구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연대 판정에서 중요한 단서 중의 하나가 종이다. 종이는 보통 만들어 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써버리는 소모품이다. 하여 종이의 나이가 얼마면 그 위에 쓰인 글자들 나이도 대략 거기서 얼마 지나지 않는다. 또한 닥나무로 만들었냐 대나무로 만들었냐와 같이 종이 종류에 따라서도 특정 역사 시기에 쓰인 종이와 쓰이지 않게 된 종이가 있어 대략적인 시기 판단에도 도움이 된다. 

종이의 나이와 종류를 판단하는 이런 방법을 익히는 데는 빠른 길은 없고 시간을 들여 경험치를 높이는 것이 우둔하면서도 확실한 길이다. 바꾸어 말하여 종이를 만졌을 때의 촉감 즉 손맛을 익히는 것이다. 물론 현이는 아직 햇내기다. 자주 동행한 선생님께 물어 보고 그 시대의 종이 질감을 뇌리에 기억하려고 애쓰는 정도이다. 전문가들은 손끝에 종이가 닿으면 대략 어느 시대의 어느 지역에서 만든 어느 종류의 종이인지를 안다. 옆에서 보기엔 신기명기에 가깝다. 천년의 그 촉감을 알아가는게 현이가 하는 일 중의 한 가지다. 

위와 같은 얘기를 하면 란이는 어느새 정신이 딴데 팔린다. 대신 오늘 낮에 있은 얘기, 저녁 메뉴 얘기, 아이 얘기, 자기가 좋아하는 교육심리학 얘기로 넘긴다. 주파수가 안 맞기 일쑤다. 

그런 하루, 현이와 란이는 주방에 나란히 서서 요즘 새로 개발한 아침 메뉴인 무화과 아보카도 토스트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은은하게 배배라면서도 고소한 그 맛에 현이는 요즘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바로 다음날 아침 토스트에 얹어 먹기 좋은 아보카도를 고르는지 란이에게 비법을 물었다. 란이는 항상 맞춤하게 익은 아보카도를 골라 왔지만 현이는 아직도 자기가 골랐던 단단하면서도 상한 계란 맛이 나던 아보카도에 덴 기억이 뚜렷했다. 

'그니까 말이야, 밖의 껍질 색상은 너무 진하지도 않고 파랗지도 않은 거, 엄지와 중지로 잡아 살짝 눌러 봤을 때 맞춤하게 말랑한 그런 느낌이 있어, 손맛이란게.'

맞춤하게 말랑하다는게 어떤거지. 다시 물어도 '그냥 그런 느낌이 있어. 말로 설명하긴 어려워. 만져보면 딱 알아.'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대답하지 않은거나 다름 없다. 

근데 그 순간, 반짝이는 깨달음. 아보카도를 만져서 간단하게 고를 줄 아는 란이와 손끝에 촉감만으로도 옛 종이의 연대를 판정하는 전문가 대선생들이 겹쳐 보이는 것. 분야가 다를 뿐이지 그 기술과 재주는 사실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인간이 3백만년 전부터 나타났다고 쳐도 그에 따른 먹이와 요리에 대한 학문은 동시발생적인 것이니, 란이가 훨씬 더 근원적이고 유구한 지식을 장악한 선생이라 할 수 있을지도. 

음, 현이는 자신이 아직 도를 덜 닦았음을 인정했다. 천년의 촉감도 익히지 못한 번데기가 백만년의 손맛 앞에서 너무 자주 주름을 잡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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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떠돌면서 듣고 모으고 배우는, 이야기 "꾼"이 되고싶은.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돌다가 고전과 씨름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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