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두 가지 고민에 시달렸다.

하나는 미술에 대한 열정이 중단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축적으로 인해 창작 충동이 무한하게 지연 되었다는 점에서이다.

내가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을 때 까지 이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기나긴 시간동안 애도하며 회억하며 사랑의 대상이 오래전부터 나를 떠났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 없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사랑의 대상이 떠난 이유를 직면하기 싫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것을 되찾으려면 일정한 싫음(업)을 마주하고 감내하기 시작해야 한다.

어찌보면 내가 사랑했던 대상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잇따른 책임과 대가를 마다해서 더이상 그것을 향유할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예술에 있어 내가 자유로워 질 수 없었던 것은,  그것에 잇따른 책임을 감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유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원하는 자유의 형태에 따라 짊어질 책임의 강도와 난이도가 달라진다.

아티스트들이 자유에 대해 운운할 때 그들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그러한 자유가 공산주의 만큼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간과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티스트들이 자유의 순수성을 확보하려고 내적 충동에 몸을 맡길 때, 그들을 산산조각 낼만한 현실의 벽 또한 그러한 '자유의 이상' 만큼 높고 두텁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상의 희생자는 숭고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이상에 묶여 더이상 자유롭지 못할 뿐더러 자신의 전 생애을 담보로 이상을 기리는 제물이 되어야 그러한 숭고를 완성한다.

그만큼 고차적인 자유에 대한 갈망은 현세 속에서 충족될 수 없기에 이들은 종종 현세의 자신을 버리고자 하는 방식(저편에 대한 갈망, 더 나아가면 죽음 충동)으로 지고지순한 자유를 보증 받으려고 한다.

그것이 이러한 종류의 자유에 잇따른 책임의 무게이자 치뤄야 될 대가의 높이다.

이에 비해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이다. 

나는 한동안 '순수한 자유'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자기보호 기제가 작동했는지 급 브레이크를 밟았더니 관성으로 인해 여태껏 수동적으로 질질 끌려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갈망했던 "자유의 순도"를 조금은 낮춰서 그래도 사회와 어느정도 어울리며 살고자 애를 쓴다. 

이렇게 애를 쓰면서, 자신이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과 직결된다는 현실도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슬프다. (여태껏 이러한 슬픔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현세의 자신을 버리기엔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다.

알고보니 이 더럽고 처참한 세상 곳곳에 여전히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책임질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순수 자유'와 같은 억지스러운 자기 동일시를 내려 놓게 되었다.

어쩌면 창작에 대한 나의 사랑 또한 일찌감치 세속으로 환원되었기에 이상이라는 세계에서는 사랑의 대상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슬픔의 세계에 뛰어드니 되려 슬픔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랑이 보인다.

이제, 맨 위의 두 고민이 해결 되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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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ean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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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슬픔의 세계에 뛰어드니 슬픔이 사라지고 사랑이 보인다”는 건 제대로 알아들은건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한마디는 답할 수 있어요. 내안에서 생긴 고민과 갈등 그런건 한번 사라지거나 해결되었다고 다시 안오는게 아니더라구요. 계속 오죠. 그러나 노력하면 옅어지죠. 또 나이를 먹으면서 견뎌지기도 하구요. 그게 슬프고 또 다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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