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하나에 이름!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어머니

– 윤동주별 헤는 밤」 

1. 시 하나에 종소리

다른 친구들이 사랑이나 유행에 미쳐 있을 그 즈음 나는 '종소리'에 미쳐 있었다그러나 처음부터 문학의 어떤 장르에 미쳐 있지는 않았다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는 또는 우리는 마치 문학 지망생이라는 혁명과업이라도 완수하듯이 뭉쳤고, ‘주태백이 되어야 시를 잘 쓸 수 있다는 가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매일 술병을 넘어뜨렸다의기양양해 했다.

술만 마시면 긴 머리카락을 넘기며, “삼천만이여 오늘은 나도 말하련다!” 라며 조기천의 백두산을 열송하던 선배는 어느 날 갑자기 거꾸로 흐르라두만강이란 명작을 내놓아 우리들을 열광케 했다그 선배를 향한 부러움을 동력으로 삼아 너도 나도 시 쓰기를 유행병처럼 앓았다

그 즈음에 나도 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말로만 시를 논하고술 마시는 것으로 문학을 하는 척할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일 작정을 했던 것 같다그리하여 그 뜻에 동의하는 친구들과 시상을 위해모아산을 횡단하고돈화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부르하통하에서 밤을 지새우고삼합에서 합숙을 했다그리고 연변의 각종 문단 행사에 얼굴을 내밀며 우리는 시상을 키워나갔다.

종소리 회원의 글이 잡지에 발표되기라도 하면조문학부에서 창작 장려의 차원에서 회원들에게 원고료를 지급했다그 돈을 받은 날은 자취방 벽에 빈 맥주병으로 줄을 세워 담을 쌓으며 감동과 격정에 취하곤 했다.

그렇게 시는 우리들 그리고 나에게 젊음이었고취기였고, 20대의 열병이었다.

그리나 졸업 이후 종소리 회원들을 만나도 더 이상 문학을 말하지는 않는다우리들끼리 만나면 취직을 말하고육아를 걱정하고업무 스트레스와 시집살이의 고뇌를 말한다북경민족출판사에 있는 선배는 가끔 취기로 남편한테 종소리 자랑을 하면이공계 출신인 남편은, “너네 종다리문학사너네 종아리?..”라고 되묻는다고 푸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종소리라는 이름으로 저마다 가슴에 별처럼 반짝이는 추억 몇 개씩은 지니고 있다나는 시를 생각하면 그때의 뜨겁고 열정이 넘쳐났던 종소리가그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리워진다. 20대 초반의 그 풋풋한 감성이 다시 샘솟아나 다시 태어나는 듯해진다.

2. 시 하나에 석화 선생님

종소리와 더불어 생각나는 또 하나의 이름은 석화 선생님이다.

조성일 회장님이 이끄시던 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주관한 시 창작 세미나에서 처음 뵌 선생님은 내게는 환상 그 자체였다량수 시골뜨기였던 내가 교과서에 등장한 시인을 뵙는 것이나어릴 적 즐겨 부르던 노래의 가사를 지으신 분을 만나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선생님께서 입으셨던 바바리코트와 굵고 맑은 음성이 지금도 새록새록 기억에 남는다

그때로부터 선생님의 시집을 외고 다녔고선생님이 출연하는 라디오 생방송을 들으려고 알람을 맞춰놓고 새벽에 일어났고선생님께서 참석하시는 모든 행사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부단히 선생님 바라기가 되고자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는 시 원고를 싸들고 가서 봐달라고 청하기도 했고답장이 안 오면 한없는 좌절감에 빠져들기도 했다그러다가 어느 날 선생님께서 사전 통고도 없이 연변문학에 내 시를 실어주면 그 기쁨에 못 이겨 밤새 종소리 회원들과 술잔을 들었다.

시 열병에 괴로워하던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선생님을 만났고시를 쓰기 위해 발끝에 걸리는 돌멩이 하나하나에도 관심을 가지고 대화하는 법도 배웠고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것이라는 말도 터득하려고 애썼다선생님은 내가 가지고 있는 시의 이름 보따리’ 중에 늘 고맙고 따뜻하고 그리운 정감을 대변하는 이름이다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연락을 못 하고 살았던 시간들을 제쳐두고 참으로 오랜 만에 편지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그 제목을 미리 생각해 본다.

시를 가르쳐준 나의 첫 스승이신 석화 선생님께!” 

3.시 하나에 대림동 지하방

서울 숭실대 대학원 시절 나는 화장실도 없는 5평짜리 반지하방에 사는 가난한 유학생이었다지금 성균관대 박사생으로 있는 한 친구는 그 시절 이야기를 할라치면, “넌 그때 매주 젖몸살하는 아낙네마냥 힘들어하며 시를 썼지!” 하며 깔깔 웃어댄다.

교환생으로 온 8명의 친구들과 함께 국문과에 소속되었지만홀로 시 공부를 하겠다고 문창과로 적을 옮겼다어쩌면 내가 자초해서 힘들게 시 몸살을 앓았던 것 같다

내게 시는 김소월이나 윤동주 나아가 신경림이나 안도현에 이르기까지 향토적이고 아늑한 정감을 유발시키는 서정적 아름다움의 이름을 단 것이었다그런데 문창과 교수로 계셨던 최승호 시인을 만나면서 시의 세계가 다른 측면도 지니고 있는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배웠다교수님께서 이끌어 주신 것은 시가 보들레르나 말라르메가 사는 다소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현란하고 거친 세상이라는 것이었다

내 시도 진달래꽃이나개여울이나 별을 쫓던 것에서부터 똥이나 구더기나 절망이나 죽음을 쫓게 되었다지금 말하면 웃음부터 나오지만 그때는 심각했다매주 수업시간까지 시를 써가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우울함과 괴로움을 찾아내서 시로 완성해 가야 하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악령의 세계를 순례하는 젊은 나그네와 같았다

그 초라한 지하방에 사는 나의 삶은 시의 소재를 완성시키기에 충분했고 어쩌면 그 모든 것이 행운일 수도 있었다.

 500미터를 걷고 다시 깊은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지하철 대림역 12번 출구 화장실 두 번째 칸을 우리집 화장실이라고 정하고가끔 다른 칸에 들어가는 날이면 남의 집 화장실을 빌린 듯 찜찜해 하던 감정그런 날은 화장실에서 시를 썼다

연변냉면집에서 알바를 하는 친구가 밤늦게 들어와서 조선족 아저씨가 냉면 사리를 가위로 두 번 자르지 않고 한 번만 잘라줬다고 화를 냈다면서 억울해하던 그런 밤에도 나는 시를 썼다섣달 그믐날 밤만육천 원하는 후라이드 치킨이 비싸다고 두 마리에 만원인 구이닭을 사서 뜯으며 낄낄 대던 그런 날도 시를 썼다.

술을 전혀 못 마시던 친구가 연애의 쓴 맛에 울며 소주 한 잔에 취해 우리 집에서 난동을 부리던 그런 날도자취방에 함께 모여 위대한 탄생의 백청강을 응원하며 땅콩에 캔 맥주를 마시던 그런 날도술에 취해 길바닥에서 잠을 자는 조선족 아저씨를 가족한테 인계하던 그런 날도조선족 아주머니가 일하는 음식점에서 밑반찬을 조금 더 받아온 그런 날도 나는 시를 썼다그런 내게 시는 곧 일상이었고 유학생의 삶 그 자체였다

이제는 에피소드가 되어버린 그 일상과 그 시들을 마주하면삶을 괴로워하는우울해 하는 시인이 되려고 노력한 것에 반비례하여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다채롭고 즐거운 추억으로 탈바꿈한 것 같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기는 하지만 선생님은 세상이삶이 서정적이고 순수하고 깨끗한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역겹고 추하고 구역질나는 것으로도 차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렇게 시 하나에 붙은 대림동 지하방 이름은 어두운 이미지와는 달리 참으로 밝고 즐거우며 오래 되새기고 싶어진다

4. 시 하나에 

시에 달린 추억의 이름을 불러보는 일은 신나고 즐겁지만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시가 무엇인지 스스로한테 물어보면 왠지 긴장감이 감돈다

최근에는 시를 좀 안다고 자부하다가도 또 시가 무엇인지 전혀 몰라지는 자괴감에 빠져들곤 했다시가 안 써지는 것은 이론공부 때문에 내 사고가 논리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라는 핑계도 댔다시적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그런 현실 상황 때문이지 절대 나 스스로의 문제가 아니라는 변명을 늘여놓으면서도 자꾸 시로부터 멀어져갔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시 관련 논문과 밤새 씨름하고매주 스터디에서 최근 시집을 읽고 발표하고수업시간에 시론을 발표하고시인을 논하고 또 시로 학위논문도 써야 되는 것이 나의 현재 상황이었다

마치, “아무리 이상형이 장동건이니 원빈이라고 해도 현재 당신 옆에 있는 당신 남편이 당신의 이상형입니다라고 했던 법륜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생각이 천국을 그리워하면서도 지금 하는 행동이 지옥에 있으면 지옥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라는 것이 그 말씀의 본 뜻이다아무리 싫증이 나서 밀어내고 싶어도 실제로 꼭 붙들고 자나 깨나 놓지 않고 함께 있는 것이 시가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삶인데도 그렇게 말한다.

시가 나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를 쫓아다니고 있는 것이다그러면서 시가 안 써져서 시가 밉고시로 논문 쓰기 어려워서 시가 귀찮고현대시가 난해해서 시가 싫다고 시한테 투정부리고 있다시는 처음부터 시로 존재했을 뿐인데 내 마음 따라 고운 시미운 시로 이름표를 바꿔달며 역할놀이를 했을 뿐이다

시가 뭘까이번에는 어떤 이름을 달아볼까?

지금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준 채찍이라는 이름을 달아볼까학위와 명예를 얻게 해주는 디딤돌이라고 달아볼까미래를 설계할 자산이라고 달아볼까평생을 함께 살아갈 반려자라고 달아볼까

 꽃은 언제나 씨 안에 있고씨는 언제나 꽃 안에 있다.

 내 안에 시가 있고시 안에 내가 있다

 시는 내 삶이고 내 사랑이다삶은 사랑 속에 이어지고 사랑은 삶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바로 시가 나이고 내가 시로구나!

글쓴이: 전은주

원문출처: 2014년 <중국민족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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