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사진속의 나를 보고 있는 일이 견들기 힘들던 날들이 여러 해 지속된 적이 있다. 어떤 날을 기준으로 그 전의 사진은 전부 보기가 싫어졌던 그런 날들. 사진 속에서 웃고 있으면 다가올 앞날을 모른채 웃는 모습이 싫었고, 웃지 않는 표정은 다가올 미래를 예측한 얼굴 같아 섬뜩했다.
사실 사진들의 공격을 받기 썩 전에, 나는 그날에 느낀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곱씹고 정리하여 미리 내 안의 부드러운 부분을 거칠게 사포질하는 자학을 닮은 정리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자기 내면을 마주하는 일에 강해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외면당한 기억과 체험은 복병처럼 나타나 겨우 추스른 일상을 흔들었고 그러면 또다시 순순히 자기혐오를 무덤처럼 베고 누워 기억이 내모는 구체적인 아픔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야금야금 아프는 일에 신물이 났고, 연 며칠을 적극적으로 그날에 대해 생각했다. 범인이 자기가 벌인 흉악죄를 재연하듯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가 주체였던 그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속속들이 생각하고 이제는 끝장을 보았다고 생각했나보다. 옛날 사진을 보기전 까지는.
흐르는 시간이 고마운 것은 그런 날들도 이제는 지나가고 다시 과거지향적인 기질을 발휘해 옛날 사진들을 들춰낼 때가 많다. 사진이나 기억은 잘못이 없고 그 어떤 커다란 사건보다도 무서운 것은 극복되지 않는 자기 마음이었다. 그리고 극복이 끝난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어제 김애란 작가의 소설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고 그 섬세하고 적확한 표현은 몇년 전에 느낀 그 어수선하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과 많이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 속에 붙박힌 무지, 영원한 무지는 내 가슴 어디께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 때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늘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그러나 오래전, 어머니가 손에 묵직한 사진기를 든 채 나를 부른 소리, 삶에 대한 기대와 긍지를 담아 외친 “정우야”라는 말은, 그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 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 소리였는지 몰랐다.” [풍경의 쓸모]-<바깥은 여름>, 김애란.
무지, 그러니까 앞날을 모른채 웃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던 마음에서, 괴로움의 원천도 사진 속의 나의 무지였다. 사진 안에는 장래에 무엇을 상실할지 모르는 과거의 내가 있었고, 그리고 이미 그 장래를 관통해온 현재의 나는 사진 속의 아무것도 모르는 자기를 보는 일이 싫은 것이었다. 둘이 서로를 연민의 눈빛으로 본다는 것 외에 다른 결론이 나지 않아서였다. 연민이라는 것은 남을 향한 것일 적에도 그렇지만 자신을 향했을 때는 더구나 그닥 좋지 않은 감정이지 않은가.
그때의 심경과는 출처와 맥락이 조금 다른 이 단락을, 외면했던 지난 사진들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어제 저녁 오래동안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고 어지러운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이었던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꿈속에서 많은 말과 생각들이 오갔고 아침에 갑자기 잠을 깼을 때 끝나지 않은 긴 음악을 누군가 꺼버린 뒤의 정적속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오후 집을 나서면서 저 책을 가방에 넣었다. 두시 넘어 볕이 좋아져 동생네와 함께 간 한강변에서 텐트에 누워 아무렇지 않은 척 책을 꺼내어 저 단락을 동생한테 읽어줬다.
예전에니까내몇번옛날사진에대한말을한적이있재야. 그거기막히게표현한단락이여기나온다내읽어줄께니들어봐라.
듣고난 동생은 작가들은 어떻게 상실의 이름이라는 저런 표현을 하냐고 감탄하다가 이제는 옛날 사진을 편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을 우리는 또다시 꺼냈다. 그리고 동생은 사진 속의 걱정 없는 자기를 향해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 말이 설득이 될 것 같지 않고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말에 동의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도 이해가 된다. 빨간 머리 앤 덕후가 앤셜리전공을 살려 시리즈의 맨 마지막 책에 나오는 릴라의 말을 빌리자면 릴라도 그런 말을 한적이 있다. 공부나 진지한 일에 대한 토론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마냥 해맑고 자기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의식에만 빠져있던 앤의 막내딸 릴라는 1차세계대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음에도 그 여파를 톡톡히 겪었다. 어쩌다보니 전쟁고아를 떠맡아서 어린 나이에 남의 아이를 양육하게 됐고 전쟁에서 오빠를 잃으면서 빠르게 성숙하여 책임감을 아는 단단한 여성이 되어간다. 그런 릴라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원문을 외우지 못하고 책은 연길집에 두고 왔으나 구글에는 뭐든 다 있다.
오늘은 번역하지 않겠다. 그저 백년을 사이에 두고 쓴 몽고메리와 김애란의 문장이 나에게 함께 와준 날이다. 소설가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며 소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몽고메리와 김애란과 진안의 문장이 나에게 함께 와 준 날이기도…
아 이렇게라도 대가들과 나란히 한검까 라고 드립으로 쑥스러움에 덧칠하겠습니다. 공감이 느껴져서 도라쓰 하겠습니다. 🤝
지나간 사진이 보기 싫다, 그속의 내가 싫다, 이 문제를 생각해 본적이 없슴다. 그래서 다시 옛날 사진 잠깐 봐봄다… 싫은가 해서… 전혀 싫지 않다는… 글구 대학때 사진에는 거의 진안이랑 같이 라는 ㅋㅋㅋ
그건 보라가 쭉 행복했다는 증거. 나도 이제는 일없슴다 ㅎㅎ 잠깐 몇년을 그랬죠. / 내 대학시절을 한절반 넘게 차지했죠 보라가. 유쾌한 어른이 된 것을 축하하고 아직 우리가 서로의 곁에 있어서 아쓸하게 좋아요.
축 23주년!
언젠가 상실을 할지라도 그 순간을 오로지 정직하게 남겨준 사진에 다시한번 고마움을 품고, 모든 흘러간 것을 그리워하고 아파하리.
모든 흘러간 것을 그리워하고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장래에 대한 무지는 선물이기도 저주이기도… 잘 읽고 갑니다.
사진은 사람이 만들어내고, 만들어내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덧입고, 다시 사람을 위로하고 찌르고.
한숨에 다 읽었네요. 뭉클한 감정이 듭니다.
악수했습니다 🤝
어째 이리 잘썼담까??
김애란 작가의 글이 좋아서 거저 정시나게 공감이 갔던겁니다.
“ 무지, 그러니까 앞날을 모른채 웃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던 마음에서, 괴로움의 원천도 사진 속의 나의 무지였다. 사진 안에는 장래에 무엇을 상실할지 모르는 과거의 내가 있었고, 그리고 이미 그 장래를 관통해온 현재의 나는 사진 속의 아무것도 모르는 자기를 보는 일이 싫은 것이었다. 둘이 서로를 연민의 눈빛으로 본다는 것 외에 다른 결론이 나지 않아서였다” – 요부분 영 매짜게 잘 썼슴다에, 어디 전업 작가해도 되겠슴다 ㅋㅋ 많은 생각들게 하는 구절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