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너무 순수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여전히 인기가 많다.

(양날의 검은 기어코 나의 손에 쥐어지고 말았다)

나는 졸업전부터 지금까지 주변으로부터 수 많은 응원의 메시지와 선물을 받게 되었다. 

실상 그 모든 편지와 선물을 일일이 사진 찍어 올리면서 공개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지만… 정작 그렇게 했다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나의 의도와 달리 순간 얄미운 자랑질과 우쭐거림으로 변질되는 참사를 초래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귀국 여정에서 만난 모든 지인과 친구들의 호의를 생략하면서 이 流水账을 이어 나아가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면접 소식에 부랴부랴 상해로 가는 항공편을 구매했고 새벽에 도착하여 당일 오후에 면접을 보고나서 이왕 멀리 떠난 김에 상해와 남방 도시를 한바퀴 돌고 연길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상해라는 도시에 대해 잘 모른다. 보통 상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뭔가 정이 안가는 느낌이랄까? 여태껏 나는 상해 사람들이 나를 배척할 것 만 같다는 근거 없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상해에서 묵은 5일 동안 이러한 편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제야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상해는 정말 멋진 도시다. 사람들은 예의바르고 우호적이다. 길을 묻고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아저씨마저 상해에 정착하라고 부추긴다. 희한한 일이다.

상해와 가까운 소주에 놀러갔다. 한국에 있었을 때 나는 꼭 한번 소주에 가고 싶었다. 왠지 소주에 내가 원하던 도화원과 같은 삶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소주 친척집에서 2날 묵었다. 소주는 생각한 것과 같이 아기자기 하고 여유로웠다. 그런데 정작 이곳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니 역마살이 꿈틀거린다. 상해로 돌아와서 나는 곧바로 하문으로 떠났다.

하문은 내가 꿈꿔 온 도시다. 한번도 못가본 곳이니 살짝 설렜다. 항공편과 세트로 묶인 숙소는 중산로 보행가 일대 시글벅쩍한 번화지대에 위치한다. 항공편 세트 상품인지라 저렴한것 만큼 숙박 환경이 형편 없었다. 숙소를 바꿀까 생각하다가 이미 자정이 되어가고 이 동네를 다시 오는 것도 귀찮아서 이튼날 아침에 괜찮은 숙소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새로 옮긴 숙소는 식물원 옆이다. 식물원을 투어하면서 정신도 한 층 맑아진것 같았다. 

그러다 사찰이 보였다. 나는 귀국하면서 이미 북경, 연태에 있는 사찰과 불상을 방문하여 공을드렸다. 불교에 대해 잘 모르지만 취업을 앞둔 나로서 뭐라도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공을 드릴 때 기다란 향을 피워야 하는데 향의 재가 몇번이나 내 손등에 떨어져 "이건 무슨 증조일까?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님 무언의 경고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문 식물원에 있는 사찰을 우연히 들리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향을 피우려고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놓인 라이터를 켰는데 향이 너무 두꺼워서 불이 붙다가 꺼지자 라이터를 한번 더 켜야 했다. 결국 불에 달달 데워진 구식 라이터 스위치에 손이 데이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이 찝찝하다. 왜 자구 데이는가? 내가 기도하는 방향이 어긋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윗층으로 올라가니 삼존불상이 보였다. 

그 중에서 맨 오른쪽 흰색 불상 앞에서 절을 하다가 서러움이 폭발했다. 향의 재에 데인 서러움일까? 라이터에 데인 서러움일까? 새하얀 불상 앞에 서 있는 이 인간은 그제야 모든 욕심을 내려 놓으면서 "무엇을 이루게 해주십시오"와 같은 오만한 요구가 아닌 "옳바른 길로 안내해주십시오"와 같이 진심어린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한 동안 회개하고나서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것이 나와 하문의 인연이다.

시간의 관계로 이번 투어에 심천을 들리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쉬웠던 찰나에 지인께서 하문에서 심천까지 고철타면 3시간 쯤 걸린다는 한마디에 이튼날 바로 심천으로 향했다. 하문은 고향 할머니 집과 같이 친근하며, 눈과 입이 즐거운 도시다. 반면 심천은 곳곳에 높고 세련된 빌딩들이 군림하였고 도시의 포용성과 효율성을 자랑한다. 잠깐 들렀지만 나의 성격과 가장 닮아있는 도시인것 같았다. 심천에 하루만 묵은 것이 매우 아쉬웠다.

중국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그리고 많은 것이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중국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모르겠다. 

너무 오랫동안 밖에 있어서 그런가? 아직 돌아온지 너무 짧아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처음으로 이곳을 나의 집으로 받아들일려고 마음을 열게 되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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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ean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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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70,80세대 심지어 90세대는 중국이나 세계의 가장 큰 격변기를 경험한 세대입니다. 어떤 한개시점의 결과를 보기보다는 과정을 들여다 보면 양적변화뿐만 아니라 질적 변화가 보이고 현재에 대해 보다 정확한 평가를 내릴수 있고 미래예측이 어느정도 가능해 지는 것 같습니다. 진이처럼 귀국해서 어떤 선택을 하기전에 여러곳을 먼저 돌아보면 이후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참조할수 있는 정확한 정보들이 될것 같슴다. 먼저 돌아보신게 참 명석한 결정입니다. ㅎㅎ

  2. 좋아서 어린 아이처럼 진짜로 퐁퐁 뛰던 지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되어요. 저의 딸도 여태껏 그렇게 뛰어본 적 없는 거 같아요.
    이제 자주 가고픈 오픈 바에 가면 지니와 즐기던 기억이 떠오를 거 같아요.

    머든 그때 그때 느낌을 표현하는 진솔한 성격, 아티스트의 모습은 분명 특이했어요.

    80세에도 지니는 여전히 지금 성격 그대로일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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