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농담을 잘 하는 사람이 멋졌다.
지금도 그렇다. 이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다.
그들은 그토록 여유롭고 지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더 많이는 나란 사람이 진지하고 틀에 박혀있기 때문일 확률이 크다.
그 틀 너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영혼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농담을 잘 하려면 많은 양의 지식축적은 물론 센스와 매너, 눈치백단쯤은 기본으로 장착했을거라는 확신이 그 사람을 더 우상으로 만들어준다.
사실 별로 웃기지 않는 말이라도 코드만 맞으면 신나는 법인데
농담 자체보다, 내 속에서 만들어 낸 <농담을 잘 하는 사람>이란 개념이 있었던거 같다.
그것은 나를 반박하는 것
나의 견해들을 반박하여 나를 완전히 설득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끔 그 설득에 매료되고 싶어서 상대방이 나를 반박하게끔 미끼를 던진다.
설득당하는 과정이 즐거웠고
가볍게 나를 제압하고 설득해버리는 그 모습들이, 그 구절들이, 그 사유력이 나를 흥분시킨다.
나는 뭐든 순진하게 잘 믿어버리는 성향이라
내가 규정한 <농담을 잘 하는 사람> 의 특정범위안에 들어오기는 무척이나 쉬웠다.
나는 어떤 것의 그 너머를 보는 것이 민첩하지 못했고 그 자체에 머물러 있을때가 대부분이라.
그럼에도 이런 나와 놀아주는 사람들이 고마웠다.
그들은 내 수요를 아는 사람들이었고 나를 상처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만약 마르케타였다면 루드비크가 던진 농담에 반했을 가능성도 있었을텐데
루드비크는 그 농담 하나때문에 마르케타도 놓치고 인생도 나락으로 간다.
며칠전 재밌는 소설 하나를 읽었다.
밀란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소설. 마르케타는 그 소설속 주인공이다.
장편소설이었는데 나는 단숨에 읽어버렸다.
인물들의 시점이 일인칭이 됐다 3인칭이 됐다 하면서 좀 혼선이 있었지만
썩 좋지 못한 내 머리로 완독을 한 걸 보니, 작가는 내가 생각하는 멋진 사람이 분명했다.
유명하다해서 다 <내가 생각하는 멋진 사람> 의 범주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읽으면서 내 가슴이 뭔가 울림(여러 경우 포함)이 없다면 나한테는 인정이 안된다.
분명 몇년전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을때까지 인정이 안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농담>에서 이토록 빠져 나올수 없게 반할수 있었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멋진 사람>도 자꾸 변한다는 걸 말한다.
내 생각이 변한다는 건 나는 과거의 나와 달라져 있다는 뜻이고
미래의 나도 지금과는 달라져 있을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뻔한 개소리나 싶겠지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작은 변화에 혼자 조용히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맘이 이런 구절에서 표현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해주면 더없이 고맙겠다.
얼마전 세상을 뜬 쿤데라가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었던 작가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의 유명함은 족히 그를 헤밍웨이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수 있다.
같은 시대 맞지, 쿤데라는 나와도 헤밍웨이와도 다 같은 시대다.
그 둘 사이는 고작 30년이란 세월의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우상은 늘 오래전 사람일수록 더 깊이 빠져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나만의 함정이 있기에
헤밍웨이도 밀란쿤데라도 내 마음속에선 현대인에 가까운 인물들이 아닌거로 되어있다.
<농담>을 다 읽고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왜 그런지는 딱히 모르겠다.
결말은 농담 같았고, 모호하지도 명료하지도 않았다.
또 읽는내내는 행복했다.
단어단어가 이어져 만들어낸 쿤데라의 문장속에 강하게 빨려들어가 허우적대면서
종이 한장한장을 다급히 넘겼던 순간들이 황홀했다.
감정이 아닌 오로지 의식형태로 한 사람의 이야기에만 도취되어 다른것들이 당장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보이기까지 ..
즐거운 시간이었다.
술에 취한 것 처럼.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내일이 없을 것처럼.
그 기분은, 그 속에서 깨어나왔을 때 후유증이 심했고
텅 빈 마지막 페이지를, 더 이상 택스트가 보이지 않는 마지막 구절을
오래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는 어지러움과 짜릿함의 전율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가끔은 루치에가 된 것 같았고
가끔은 헬레나, 또 가끔은 루드비크가 된 것 같았다.
묵직한 삶에 던지는 가벼운 농담
가벼운 삶에 날아온 묵직한 농담
그것들은 글은 읽는동안 나의 가슴을 짓누르는 공허를 어루만져주는
숨결처럼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너무 차갑지도 않았다.
꽁꽁 언 발을 미지근한 물에 담그듯 편했고
활활 타오르는 얼굴을 서늘히 불어오는 바람에 들이민것처럼 부드러웠다.
내 인생에는 온 힘을 다해서 전력질주해도 얻지 못한 것들이 있었고
우연한 선택으로 가볍게 얻은 운을 띈 생각밖의 성취들도 있었다.
그것들의 흐름은 내 의지로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그건 마치 운명처럼 자연스럽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진지한 사람이라 무슨 일을 할 때 힘을 많이 쓴다.
인상도 경직되고 표정도 굳어있다.
여유로운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연기력도 그저 그렇다.
힘을 빼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다.
힘을 뺀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 있는 그대로를 인정한다는 것인데
나는 늘 온몸에 힘이 가득 들어가 있는 상태라 리랙스가 안된다.
나는 욕심도 많았고 이루고 싶은것도 많았으며 가지고 싶은거도 가져야만 했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더미에 풍덩 빠져드는 불나방처럼 온몸을 사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내 껍데기만 남아서
진하게 타오르는 불속에서 소리없이 세상에 노출돼 있었으니..
나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많이 필요하다.
<농담> 같은 이야기들.
내 근육을 느슨하게 만들고 내 발상을 펴주고 내 가치관을 뭉개주는.
오늘도 나는 옆사람이 하는 농담에 무장해제된다.
너무 웃기고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프다.
운동도 안하는데 배에 근육이 있는 이유는 아마도 웃음이 헤퍼서.
고단한 삶의 많은 우겨곡절들이 농담에 의해 싰겨 갔으면 좋겠다.
농담같은 고단한 삶의 일부들이 힘을 뺀 강뚝을 따라 바다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농담에 삶의 무게를 싣고
삶의 무게에 농담을 얹어서
의미없는 우리의 인생이 무탈했으면 좋겠다.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 여전히 좋다.
농담같은 인생을 농담처럼 쳐낼줄 아는 사람이 현명해 보인다.
무게감 한스푼과
가벼움 두스푼으로
잘 믹스된 사람이 내 주변에 많았으면 좋겠다.
고리타분한 내가 그들을 보면서 웃을수 있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부끄러운 내 고백을 기꺼이 받아주고
지루한 나하고
지치지 않고
함께 갈 그대들에게.
반응하고 싶은 구절이 한 두개가 아니라서, 쭉 글을 다시 올리다가 그제서야 제목이 눈에 들어왔어요. 농담에 약한 사람. 스스로 농담을 잘 못한다고 했으나 또 농담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여니님은 농담에 약한 사람이 맞네요. 💛
글을 다시 올리다가 제목을 보다니, 바로 본론부터 읽어주다니!!!
“운동도 안하는데 배에 근육이 있는 이유는 아마도 웃음이 헤퍼서” 마음에 쏙 든 농담임다 ㅎㅎㅎ
여니 글은 한편의 가을 영화 같슴다.
들켰군요 ㅎㅎㅎ 헛소리하다가 ^^
여니는 농담으로 근육 이완이 필요하군
농담 자주 해주실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