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시대 정보홍수라고는 하나 조선족매체의 글들에 마음이 식어만 가는 일인이었다. 기사든 칼럼이든 수필이든 십중팔구는 틀은 갖추되 틀만 갖춘 내용이라 냉기마저 느껴져서 무관심의 외투는 겹을 더해만 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위챗 공식계정 ‘몽실이’의 글을 접한건 살랑이는 봄바람을 한숨 깊이 들이킨 느낌이었다고 할까.

글은 별난 내용이 아니었다. 사회적인 이슈나 전문적인 분석이나 엘리트의 통찰과 결을 같이하지 않았다. 출근길에, 회사에, 저녁식탁에, 주말여가에 씻고 닦고 지지고 볶고 하는, 잡담을 풍성하게 해줄 ‘거리’들이 대부분이었다. 뭐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글로 쓰냐고 하찮게 턱을 치켜들면서 폰 화면을 터치한 이들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이들 역시도 글을 읽다보면 ‘나’몰래 머리가 끄덕여지고 입꼬리가 양켠으로 움찔거리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봄바람은 유별나지 않았다. 온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게 에너지고 힘이다.

내가 본 작가 몽실이는, 라고 운을 떼기에 사뭇 난감하게도 우리가 직접 만난거라곤 도무지 세번 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2017년에 처음 만났다. 우리 둘 다 덜 때묻은 캠퍼스 시절인 것도 아니고, 한 생명의 보호자로서 자신만의 질풍노도를 웨치기도 애매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때였다. 비록 여러 위챗방에 같이 속해있고 한때 방의 운영에 동참한 적도 있지만, 가끔 개톡으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위챗 모멘트에서 동향을 확인하긴 하지만, 그래서 그가 어릴적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조문학부의 훈풍에 문학의 꿈을 키웠고 집안 친척중에 작가도 있다는 것과, 전에 북경의 조선족대학생 조직에서 일한 적 있는, 나와 먼 교집합을 가진 공돌이 남편을 따라 한국에서 산 적도 있고, 현재는 출판사 편집 일을 하고있다는 정도는 어림잡아 알고 있어서, 뭉뚱그려진 블록같은 이러한 태그들을 이미지 삼아 내 머리속에서 나름의 인물상을 그리고 있긴 하지만, 사적인 정보를 깊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감히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피왈차왈 할 수 있는 것은, ‘문여기인 인여기문’ 이라고 그와 그의 글이 서로 닮아있음을, 그로 인해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에는 스케치 같았던 그의 이미지가 하나하나 예상했던 대로 디테일의 색을 입어가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의 글처럼 그는 친근하다. 이웃집 누나같다. 수다쟁이다. 소통에 고프다. 그의 앞에서는 방어선이 없다. 아니, 없어진다. 말이 빠른 수다쟁이들이 가끔 있다. 스마트한 인상은 주지만 뭔가 방방 떠있는 가벼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는 개울물처럼 조곤조곤 조잘조잘 썰을 풀어내는 타입이다. “그니까 있잼다에~”, “그래까나 이렇단 말임다~” 이렇게 시작하면 그만의 이야기 리듬에 내 뇌파가 맞춰지고 고개가 끄덕여지기 십상이다. 거기에 방울같은 음색까지 더해지면 뭘 팔러 와도 바로 지갑을 열 것 같은 착각까지 든다.

그의 글도 그렇다. 평범하게 스쳤던 우리 일상의 느낌들을 생포해다가 언어의 칼집을 입혀 플레이팅을 하고 말한다. 봐라, 이렇지 않냐고. 그러면 바로 무릎을 치게 된다. 맞다, 바로 이거라고. 내 손 사각지대의 가려운 데를 긁어준 것처럼 시원하다. 그래서 그의 글이 내 얘기를 해주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내 삶 속에도 문학이 있었다고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은 가끔 매력을 넘어 마력이 있을 때가 있다. 제대로 묘사된 한마디, 면바로 선택된 단어 하나는 듣는이의 달팽이관을 울린 그 순간부터 뇌리에 박혔다가 내 몸에서 여문 열매였던 듯 자연스럽게 나와 하나가 되어 살아 숨쉰다. 그의 계정에 남겨지는 댓글들은 그러한 간증이다. 항상 막힘없이 단숨에 읽힌다고, 내 마음을 그대로 적어준 것 같다고, 다음 글이 기다려진다고.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그의 이런 글들이 우리 글의 세계에서는 이처럼 늦게 등장했다는게 신기한 지점이기도 하다. ‘몽실이’라는 그의 필명처럼 몽글몽글하고 토실토실한 이웃사촌 누나같고 언니같은 그의 감성을, 나는 그리고 일상을 살고있는 우리는 장국처럼 필요로 한다.

몽실이가 다가 아니다. 그는 그외에도 ‘몽작’, ‘몽드리헵번’과 같은 타칭과 자칭을 갖고있다. 몽작이 “몽실이 작가”의 약칭임을 안 것은 꽤 뒤의 일이었다. 그에 앞서 처음 이 호칭만 들었을 때 나는 저도 모르게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떠올랐었다. 비극적인 남성이지만 이와는 별도로 백작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귀족적이고 고귀한 이미지에 끌려서 몽작의 작이 ‘爵’일 것 같았던 듯하다. 알고보니 옆집 누나가 밖에서는 대학가 운동권 리더였더라와 같은 반전의 이미지를 그 역시 갖고있다.

글쟁이와 문학도로 불려지기를 원하는, 정면으로 맞서 사는 그로서 일상을 글로 적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한편으로 정통적인 글쓰기에 대한 반작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뻥튀기된 스케일만 있고 속살이 빈 글들이 위챗에 돌아다닐 때마다 그는 문자를 보내와서 내 생각을 물었고 대화를 했다. 대화창 너머의 폰화면에 비친 그의 까만 눈동자가 더 동그래지는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같은 일반인에 보기에도 ‘허무맹랑한 주먹구구’ 같은 관영매체 글들에 혈압을 올리던 우리는, 그러고 나서는 큰소리가 쩡쩡 울려퍼지는 글보다 사람냄새가 깃든 글을 써야겠다고 각자 속으로 다졌을 즘에야 암묵적으로 대화를 마치곤 했다. 이처럼 그는 권위적이고 거시적이고 구호적인 담론을 매우 꺼렸다. 환골탈태는 해도 반골탈퇴는 못할 것 같은 이런 그를 나는 정신적 귀족이라고 생각한다. 

공감이라고는 눈을 씻어봐도 찾을 수 없는 글에 대해서는 운동권 여대생처럼 전투적이던 그는, 평온한 일상에서는 바로 ‘몽드리헵번’으로 변신한다.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맥주를 들이키고 공원에 놀러나가는 일상적인 일정들을, 그는 그냥 ‘어쩌다 하게 된 일’이기보다는 ‘내가 하려고 한 일’로서의 의식감을 덧칠하기를 원한다. 문자로 옷을 입히다보니 그러한 느낌이 더해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이들처럼 여기저기서 퍼온 내용들로 있어보이게 모멘트를 도배하는 과시용 ‘척’이 아니라, 자기 삶속의 자기만의 생각과 콘텐츠로 ‘착’실하게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90프로의 진실과 함께 남은 10프로의 세팅마저도 거짓없이 그대로 공개하는 그만의 솔직함이 가식적이지 않은 우아함으로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호락호락하지 않고 지어는 퍽퍽할 때도 많은 도시생활의 현실에서도 현실 위의 그 무언가를 바라보는 자세를 잃지 않는 그는 귀족이다. 그 기품이 그의 글들의 기저에 깔려있기에 독자들의 눈에 더 사랑스럽고 귀엽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어쩌면 ‘梦实”이라는 이름은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꿈꾸기를 그치지 않는 그의 이면을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그의 친근하고 우하한 글들이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좀 더 깊이있는 사고의 침전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어쩌면 앞으로는 이런 글들을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그의 소감을 읽었다. 그럴리는 없다. 이 글들도 몽실이의 알알이 차들어간 꿈들이니까. 그 꿈을 계속 꿔가고 그 꿈이야기를 계속 들려주기를 바래본다. 그러다 보면 ‘몽테스큐’와 같은 깊이도, ‘몽나리자’와 같은 작품도 언젠가는 기대할 수 있으리라.

2019년12월 19일
평안경에서 평강이

+ 작가 몽실이의 신간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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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떠돌면서 듣고 모으고 배우는, 이야기 "꾼"이 되고싶은. 연변, 북경을 거쳐 교토에서 고전과 씨름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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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학은 가끔 매력을 넘어 마력이 있을 때가 있다. 제대로 묘사된 한마디, 면바로 선택된 단어 하나는 듣는이의 달팽이관을 울린 그 순간부터 뇌리에 박혔다가 내 몸에서 여문 열매였던 듯 자연스럽게 나와 하나가 되어 살아 숨쉰다. ” 정말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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