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찾은 대안

현대예술과 고전예술은 다르다. 고전예술은 어렵지 않다. 명화 속에는 식별 가능한 대상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때문에 신화나 성경 혹은 역사에 대한 약간의 상식만 있으면 그림 속의 인물이 누군지 그림 속의 주제가 무엇인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5]

 

그러나 현대예술은 그렇지 않다. 화폭은 물감으로 떡칠돼있거나 아무 것도 그려있지 않다. 이때 밀려드는 난감함은 아마 누구나 경험해봤을 것이다. 작품제목 또한 그림이 의미하는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어쩌다가 예술은 이렇게 됐을까? 왜 현대미술은 식별 가능한 형상이 되기를 거부했을까? 아마 그 주범은  19세기에 등장한 사진술이라 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회화가 평생동안 짊어져온 과제가 “재현(再現)”이였다면, 그러한 과제를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한순간에 성취해버렸을 때, 회화는 모멸감을 느꼈다. 이제 회화는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야 했다.

회화만이 가능한, 사진으로는 도달 불가능한 영역을 모색하는것이야말로 이제 회화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회화는 어떤식으로 이같은 과제를 풀어나갔는가? 우선 사진이 가장 잘하는 것을 피해야 했다. 대상을 똑같이 옮겨오는 것, 똑같이 복사하는 것, 그걸 피해야 했다.  ‘닮음’을 회피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회화가 찾은 대안이었다. 

이러한 경우가 미술의 영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술에서 재현이 사라지고 추상이 등장을 했다면, 음악에서는 화성과 조식이 사라지는 무조음악이, 시의 경우는 의미가 사라지고 음성만 남는 무의미시가, 연극에서는 플롯과 서사의 연결이 사라지는 부조리극이 등장하게 된다.

[잭슨 폴록, No.5, 1948]

접두사 ‘re’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고전예술의 강령이 ‘재현’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이 강령은 깨진다. ‘재현’이 파괴된다. 재현은 원어로 ‘Representation’이다. 여기서 접두사‘Re’는 ‘재차, 다시’라는 의미다. 어근 ‘present’은 ‘제시하다, 보여주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깐 재현은 ‘다시 보여주기’라는 뜻이 되겠다. 

재현은 무엇을 ‘다시 보여주는가?’  바로 원본이다! 이미 존재하는 어떤 원형을 화폭 속으로 끌어들여서 ‘재차 다시 보여주는 것’, 이것이 ‘재현’의 의미다. 그러므로 ‘Re’라는 접두사를 가지고 있는 한, 재현은 영원히 원본의 그림자며 원본의 2인자로서 기능한다. 결국 재현이란 원형과 닮아지려는 몸부림이다. 

 Re-presentation이 고전예술의 과제였다면, 현대예술은 접두사 ‘Re’를 빼버린 ‘presentation’이다. 이제 재현(再现) 아니라 현현(显现)이다. 그렇다! 이미 있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 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을 보여 주는 것’, 이게 현대예술의 프로젝트다. 

재현의 한계

재현의 논리 속에는 항상 고정불변한 어떤 원본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천자문을 배우고 있던 학생이 훈장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하늘은 푸르고 가끔은 어둡고, 하늘에는 새도 있고 별도 있고 바람도 있는데 왜 天은 푸르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 아닌가. ‘天’이라는 글자는 하늘의 변화무쌍함을 담을 수가 없다. 이게 재현의 한계이다. 

 재현은 꿈틀거리면서 살아있는 세계를 부정한다. 순간순간 현현하는 사건을 보면서도 항상 뒤에 도사린 어떤 원형을 찾으려 한다. 그렇게 재현은 ‘이미 주어진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주어진 것을 답습하고 주어진 것을 재생시키고 주어진 것을 재확인시킨다. 주어진 삶, 주어진 행복, 주어진 꿈, 주어진 사랑… 우리의 삶 속에도 이미 주어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일례로 사랑이란 뭘까? 사랑의 형태는 무한하겠지만 우리가 떠올리는 사랑이라면 한없이 베푸는 것? 혹은 결혼으로 완성되는 것? 아니면 배신할 수 없는 것? 우리는 이러한 공식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현실 속의 사랑은 종잡을 수 없지만 이데올로기는 사랑의 원형을 끊임없이 고착시키려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재생산해낸다.

 현현은 주어져있는 어떤 원형과의 닮음을 거부한다. 추상회화 속에도 이미지는 존재한다. 다만 상식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닐 뿐이다. 이미지는 존재하지만 모사대상이 없다? 그렇다. 그 불분명한 형상은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탄생되는 형과 색이며 처음으로 이 세상에 출현되는 이미지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우리 세계에 새로 등장한 물건이고 새로 나타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파울 클레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예술은 더 이상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지 않는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 파울 클레 

신적인 능력

 곧 전쟁터로 애인을 떠나보내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는 이제 애인을 한동안 볼 수 없거나 어쩌면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이 그를 비통에 잠기게 한다. 그녀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애인을 벽에 세우고 얼굴에 촛불을 가져다댄다. 그랬더니 벽에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그림자를 따라서 얼굴 윤곽을 따고 흙으로 이목구비의 세부를 살렸더니 그게 최초의 그림(부조)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작가미상, 회화의 기원, 년도미상]

이것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실려 있는 <회화의 기원>이라는 대목의 내용이다. 보라, 애인은 소녀 앞에 나타나(present) 있다. 전쟁터로 떠나면 애인은 부재(absent)한다. 그러나 소녀가 애인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두는 한, 애인은 언제라도 소녀 앞에 다시(re) 나타나게(present) 된다. 즉 재현(Re-presentation)한다. 재현-다시 나타나게 하는 것, 바로 고대로부터 20세기 초까지 수천 년의 미술사를 관통해왔던 미술의 본질이었다. 

 부재하는 것을 다시 나타나게 하는 재현의 이 힘은 마법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무당이 죽은 사람의 유령을 불러내듯이 그림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이나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들을 눈앞에 데려다준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알베르티는 이러한 재현의 힘을 ‘신적인 능력’에 비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화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 눈앞에 데려다주고 이미 몇 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일지라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신적인 능력forza divina을 가지고 있어서 그 능력은 흡사 우정의 힘에 비견되곤 합니다.” 

                                                                                                 – 알베르티(르네상스), 『회화론』 중 

새로움의 충격

만일 현대예술에 신적인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했던 것을 ‘다시 보여주는 능력’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을 ‘비로소 보게 해주는 능력’이 아닐까? 현대예술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보게 해준다. 우리의 시선은 문화와 관습, 교양과 집단무의식의 회로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선의 방향전환을 위해선 새로움의 충격이 필요하다.  아름다움beauty이 깨지고 그 자리에 새로움New이 들어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것은 낯설다. 새로움은 충격(shock)을 수반한다. 그래서 새로움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 충격을 완화시키려 한다. 달리말해서 ‘이해理解’하려고 한다. 이것은 근대적 주체로써의 자기보호본능이다.

 현대예술은 새롭고 낯설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를 시도하지만 그것은 쉽게 굴복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는 ‘현대예술은 수수께끼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수께끼가 어떤가? 답을 모른다고 쉽게 내칠 수가 있는가? 수수께끼 앞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뭐라고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묘한 강박적 상황에 빠져들지 않는가? 아도르노가 보기엔 현대예술의 경우도 우리가 수수께끼를 대하는 경우와 같다는 것이다. 모르긴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쉽게 내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레이, 선물, 1921]

                                                                                                              마르셀 뒤샹, 자전거바퀴, 1913

[장 팅겔리, 자동소묘기계, 1959]

                                                      [마르셀 뒤샹, 왜 로즈 셀라비는 재채기를 하지 않는가, 1921]

불꽃들

아도르노는 현대예술의 아름다움은 형상의 파열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불꽃과 같다고 덧붙였다. 산산이 파열되어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은 그 형상이 황홀하나 생명은 아쉬울 정도로 짧다. 가끔은 불꽃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나, 그럴 경우 밤하늘이 지저분해진다. 불꽃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순간적이고 덧없다는 데 있다. 이처럼 아도르노는 완성의 순간에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불꽃을 예술의 완성태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예술은 궁극적으로 ‘순간 미학’적이다. 고전예술이 재현을 통해서 ‘영원성의 미학’을 축조했다면, 현대예술은 파열을 통해서 ‘순간의 미학’을 드러낸다. 이 같은 현상은 보들레르가 일찍이 거론했던 모던modern의 특징으로서의 ‘일시적인 것과 순간적인 것’ 및 ‘새로움’이라는 개념과도 일치된다. 보라,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수백 년, 수십 년씩 지속되던 예술사조가 19세기부터 수명이 점차 짧아지더니, 20세기에 들어오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사조와 양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나고 명멸하고 교체되는 이 같은 현상들, 아도르노나 보들레르가 말했던 순간성과 일시성 그리고 새로움의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좀 길어진 얘기를 개괄해보면 이렇다. 현대예술작품 앞에서의 관객은 1. 파열된 형상과 마주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단순히 2. ‘새로움의 충격’을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3. 어떤 ‘수수께끼’와 만나게 되고 그 수수께끼 앞에서 4. 관객은 이해할 수 없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이해해야만 할 것 같은 특별한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심미적 수용자로서의 관객은 작품을 받아들임에 있어 기존의 코드나 상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새로운 방법론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통적으로 주어져있는 작품해석의 도구나 미학들이 더 이상 큰 효용성을 갖지 못한다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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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먹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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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선 현대예술에 궁금증이 많은 일인으로서 글 너무너무 잘 읽었어요. 잭슨 폴록이나 마크 로스코 같은 추상표현주의의 작품들을 보면서 그당시 역사배경과 이런 표현들이 현대예술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많이 생각을 해봤는데, 글 중 이란 말에 어느정도 공감을 하게 되네요. 특히 마르셀 뒤샹의 작품같은 경우는 이해하기 진짜 어려운데 글중라는 문구로 연상을 해봐야 하는지 싶네요… 뭔가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대예술은 본연의 이미지나 연상가능한 전달이 아닌, 가장 본질적인 것 혹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것 같기도 해요, 오히려 앤디워홀이나 키스해링 작품같은 게 그나마 보통사람으로서도 참관가치가 있는 거 같네요 ㅠㅠ 현대예술에 관심은 많으나 새로움의 충격에서 벗어못나는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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