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지 않을만큼, 춥지 않을만큼…

어쩌다가 여러가지 조건들이 맞물려서 한국에서 몇달간 생활할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집이라고 터를 잡고 살아보니 전에 몇번 관광으로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젖어왔다. 말로 다 할수 없는 살가움과 무작정 내 맘을 끄는 감성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퍼그나 정답게 느끼게 해주었다. 

아이를 데리고 근처 공원에라도 나가면 공원 벤치에 앉아 한담을 나누시던 아주머니들이 아이가 예쁘다고 말을 걸어주시고 간혹 과자 같은것도 건네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인간의 탈을 쓴 몇몇 못된 놈들의 아동납치사건으로 전체적인 사회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어 아이를 밖에 데리고 나가도 필요이상으로 경각심을 높여야 하는 북경과는 딴판이였다. 

한국은 '정'의 문화라더니 아니나다를가, 그 따뜻한 '정'에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매일 근처 공원에 나간지 며칠만에 자주 마주치는 한 아주머니랑은 안부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였다. 

“새댁은 중국서 왔어?” 

나의 어눌한 한국말 억양에서 바로 티가 났나보다. 

“네. 북경서 왔어요.” 하고 곱게 대답하니 “신랑도 같이 왔어?” 하고 물으시길래 “네. 세 식구 다같이 왔어요.”하고 대답했다. 

“신랑은 어느 직장 다녀?” 

한참 후, 신랑 직장에 나이까지 줄줄이 고백하는 나를 발견했다. 

첩보요원도 아니고 딱히 비밀에 붙일 것까지야 없다지만 이런 개인사까지도 말해도 되나싶은 생각이 번쩍 들어 머쓱하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럼, 이만 가볼게요.” 하고 말하고는 어수선하게 그 자리를 떴다. 

이튿날부터는 왠지 그 아주머니를 피하고 싶어졌다. 콕 집어 말할수 없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근처 정육점에서 고기를 어쩌다 한번 사게 되였는데 정육점 주인 아저씨 또한 열정적인분이셨다. 그 열성스러움에 처음 간 날 생각에도 없는 삼겹살 두근을 덜컥 사버리고 말았다. 

그후로 아저씨는 나만 보면 특유의 그 충청도 억양으로 “어디 가슈?”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걸어오고 가끔은 아들애에게 장난감도 쥐여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괜히 고기를 사지 않는것에 자책감까지 가지게 되였다. 근처에는 이틀에 한번 집으로 반찬을 배달해주는 열정적인 반찬가게 아주머니도 계셨다. 

배달을 오실 때면 아들애 이름을 친절하게 불러주기도 하고 손을 꼬옥 잡아주기도 했다. 세살짜리 아들애가 크레용을 들고 마구 설치면 아이에게 흰종이를 주어 락서를 하게 하라고 조언을 주시기도 하고 아이를 따라다니며 밥을 먹이는건 옳지 못한 육아법이라고 따끔히 지적도 해주셨다. 분명 좋은 말씀들인데 어딘가 불편한 느낌은 아주머니가 다녀가신후에야 스멀스멀 찾아왔다. 

그후로는 그 아주머니가 배달을 오신다 하면 괜히 긴장해졌다. 집이 어질러져있지는 않나? 아들애가 오늘은 장난을 많이 치지 말아야 할텐데 하면서 괜한 걱정까지 하게 되였다. 

그분들의 따뜻한 진심에 대해선 의심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런 따뜻함에 조금씩 피로감이 느껴지는건 나도 어쩔수가 없었다. 

차 번호 하나 따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북경에서 자가용 차가 없는 우리는 외출할 일이 있으면 등씨 성을 가진 한 기사아저씨의 택시를 자주 리용하군 하였다. 수없이 많은 차가운데서 그 기사의 택시만 4년 넘게 리용한 데는 나름의 리유가 있었다. 크고 작은 일에 4년 넘게 그 차를 리용했지만 등씨 성을 가진 그 아저씨는 한번도 개인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무엇보다 그것이 좋았다. 

북경에서 택시를 타보면 우리끼리 하는 얘기를 듣고 기사님들이 곧잘 하는 질문이 있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냐?” 하는것이다. 방언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외국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당신들이 하는 말을 자기는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하면서 호기심에 물어올 때가 많다. 조선족이라고 하면 일부 기사들은 알은체를 해오며 “쓰쌘주마?是鲜族吗?”라고 하신다. 또 틀린 걸 보면 지적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에 '선족'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반드시 '조선족'이라 불러야 한다며 꼬치꼬치 지적을 해주고나면 급피곤이 몰려오군 하였다. 

그런 번거로움을 여러번 겪다보니 그런 질문 따위를 일체 하지 않는 등씨 성을 가진 그 기사아저씨를 유난히 선호하게 되였다. 오래동안 자주 만나다보면 가끔은 옛다, 기분이다 하고 에누리를 해줄법도 한데 등아저씨는 언제나 칼 같았다. 거스름돈 받기가 번거로와 더 드려도 엄격하게 계산해서 돌려주었고 가끔은 좀 깎으려고 해도 언제나 그렇듯이 단호했다. 

그 기사아저씨의 신상정보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전무했지만(등씨 성을 가졌다는것만 알뿐) 우리는 누구보다 그 아저씨를 신뢰하고 있었다.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차거운 등아저씨를… 

새삼 한국의 '정'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서로 돕고 상부상조하는 삶속에서 형성된 “정”문화, 그것은 이 힘든 세상을 헤쳐가는데 빛이고 소금이였을것이다. 서로를 걱정해주고 다독여주는 따뜻함. 그런데 나는 왜 그 따뜻함에 데기라도 한듯 몸을 움츠리는것일가? 

어린 시절 내가 살던 향진의 작은 마을은 그 시절 다들 그랬듯이 따뜻하고 화기로웠다. 이웃들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함께 나누었고 걱정이 있어도 함께 나눴다. 비 오는 날, 엄마가 만든 오그랑죽을 들고 뒤집 해화언니네 집에 가져가다 엎어져 온몸이 죽범벅이 된채 울음보를 터뜨리던 내 모습도 기억에 선하다.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해 울면서 집에서 뛰쳐나온 새댁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그 남편을 찾아가서 화통하게 욕사발을 안겨주던 옆집 아주머니도 계셨다. 그 새댁이 이튿날 바로 남편곁으로 달려가서 그 아주머니를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멀리 왕청 춘화라는 곳에서 시집 와서 친정 식구도 하나 없는 타향에서 새댁이 혹시나 서러워하지나 않을가싶어서 아주머니가 나선것이였다… 

요즘 같았으면 주책이라고 손가락질 받고도 남을 일이다. 

간섭은 어쩌면 관심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에는 누구도 그것을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고 모든게 조화로웠던것 같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저마다 칸을 치고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놓고 빗장을 닫고 산다. 관심은 자칫하면 간섭으로, 부담으로 여겨지기가 일쑤이다. 

이웃간에 따뜻한 떡그릇 오가던 그 옛날의 추억은 추억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간주되는 현대사회에 불쑥불쑥 예고없이 떡을 들고 이웃집 문을 노크하고 찾아가는 것도 비현실적인 일이기때문이다.  

유리벽을 친 각자의 방에서 우리는 먼발치서 서로를 바라보며 외롭지 않으려고, 고립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있는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 외로운 현대인을 구원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가? 역시나 서로에 대한 따뜻한 관심만이 그 해답이 아닐가? 그렇다면 그 따뜻함의 적정 온도는 몇도쯤 될가? 50도? 60도? 따뜻함을 유지할수 있는 적당한 거리는 얼마나 될가? 데지 않을 만큼, 춥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온도와 거리는 도대체 어느 만큼일가? 

어쭙잖게 이 외로운 현대인들을 구원하고 싶은 돈끼호떼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서로의 온기를 따뜻하게 나누기에 가장 적당한 랭정과 열정사이의 그 어느 지점을 찾아 돈끼호떼의 마음으로 갑옷 입고 투구 쓰고 나서볼가싶다. 나랑 동행할 사람 게 누구 없소? 나지막이 지기들을 입속으로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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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s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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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적인 공간에서 모바일 폰 하나면 모든걸 다 해결하는 현시대의 생활방식과 관계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직접 건네줄 필요없이 배송 앱 하나이면 주위사람들한테 음식을 전해줄수 있고, 더불어 메시지 몇개만 보내면 안부를 전할수 있으니 말임다. 이런 생활방식에 습관되니 이젠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조금만 노출되거나 침범당하면 불안하고 웬지 이상한 느낌이 불쑥불쑥 드는게 아닐가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임다. 어릴때는 거의 모든 동네 사람들을 다 알다싶이 했는데, 아파트에 이사가면서 한층에 우리집 포함해서 딱 2집이 마주하고 있었는데도 거의 모르고 지내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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