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8시 30분, 정장을 쫙 빼 입은 주용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무슨 일이지? 내가 오늘 너무 멋부렸나?’

주용은 말끔히 면도한 턱을 살짝 내리고 자신의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주용은 대학 졸업 후 필리핀에서 7년 동안 거주하면서 키운 어학 실력과 무역업무 경력을 인정받아 지난 주 이 무역회사의 동남아지역 고객 지원팀 팀장으로 채용됐다.  사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팀장이라는 직급이 낮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 회사의 규모나 대외 이미지 등이 주는 만족감이 그런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주용은 이 회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앞으로 자리를 잘 잡아 다시 부모님들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따르릉, 따르릉-'

주용이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책상 위 전화기가 울렸다. 주용은 느긋하게 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를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동남아 고객 지원팀 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리는 굵고 나지막한 소리

'주용 씨? 인사부 회의실로 지금 바로 오십시오. 띠릭.'

인사부 김부장님의 목소리다. 주용은 김부장의 딱딱한 말투와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은 것이 조금 언짢았지만 잠시 수화기를 쳐다 보고는 제자리에 내려놨다. 그러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용 쪽을 곁눈질 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주용은 회의실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지난 주 인수인계 받는 과정을 되새기며 혹시 실수한 것은 없었는지 빠르게 머릿속으로 훑었지만 딱히 문제 될 만한 것은 없었다.

회의실 앞에 도착한 주용, 열려있는 회의실 문을 살짝 노크하고 들어갔다. 큰 회의 책상 오른 켠에 차례로 관리 상무와 인사부장이 앉아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용이 허리 굽혀 공손하게 인사하자 관리 상무가 맞은 켠의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주용이 분위기를 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인사부장이 몸을 일으켜 그에게 파일 하나를 건넸다.

파일을 받아 열어보는 주용, 안에 들어 있는 서류 두 장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사색이 되고 말았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그가 5년 전 마닐라를 떠나면서 현지에서 동거하던 M.제이에게 남긴 서약서 사본과 둘 사이에 낳은 아들, 당시 3살이었던 로이와 함께 셋이 찍은 사진 사본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용은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잃고, 머릿 속이 하얘졌다. 그런 그의 표정이 모든 걸 설명해주고도 남았다. 인사부장과 서로 눈빛을 교환한 관리 상무가 입을 열었다.

'주용 씨, 우리 회사가 관공서나 교육기관처럼 임직원의 윤리 도덕에 대한 요구가 높진 않지만 책임감, 신뢰도에 있어서 이런 일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소. 이런 제보를 받아서 상당히 유감이요. 특히 주용 씨가 서약서에 쓴 한국 집 주소가 참…… 우린 당신에게 회사의 중요 고객을 맡길 수 없을 것 같네.'

마지막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주용, 애써 변명을 해본다.

'저…… 상무님, 저건, 그땐…… 제가 어려서…… 실수로 아이가 생겼는데, 필리핀은 낙태가 안되고…… 저도 책임지고 결혼하려 했습니다…… 부모님들도 자꾸 정리하라고 재촉하셨지만…… 근데 여자 일가족이 다 저만 바라보고…… 한국 사람이면 다 돈 많은 줄 알고…… 같이 살아 보니 저기 문화가 그렇더라구요, 돈 많은 친척이 가난한 친척 돌봐주는 거 당연하다! 너무 부담스럽고…… 호구가 된 느낌도 들고…… 감정이 많이 상한 상황에서…… '

주용이 구구절절 변명을 늘여 놓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다. 인사부장이 주용에게 사직서를 건네주며 말했다.

'입사할 때 제출한 등본에 보니 기혼으로 되어있고, 슬하에 2살 된 딸이 있던데…… 복잡하게 끌지 맙시다.'

주용은 입술을 꽉 깨물고 머뭇거리다 결국 사직서에 서명했다. 이미 회사에 소문이 다 쫙 퍼진 모양이다. 아까 그를 향했던 시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어깨가 축 처져 회의실을 나가는 주용에게 관리 상무가 한 마디 던졌다.

'인간의 기본은 지켜야지, 지금이라도 용서 빌고, 책임져야할 건 책임 지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

주용이 회사 떠나고 나서 직원들 사이에선 여전히 의논이 분분했다. 좀 늦게 출근한 한 여직원이 옆 자리 동료에게 사내 메신저로 물었다.

-도대체 서약서에 뭘 썼길래?

-자기가 한국에 가서 결혼 서약 받고 꼭 돌아온다고 서약서 썼는데, 끝에 적은 한국 주소를 영어로 읽으니까 한국 발음으로 '그걸 믿니 18' 이었대. 

-헉, 소름!

-인성 쓰레기에 나라 망신이지!  

-와이프는 모른대요? 그쪽 여자랑 아이는 어떻하고?

-무책임한 한 인간때문에 여러명이 피해보는구나……

-……

————————————-

* 최근 유튜브에서 본 코피노 RJ, 한국 남자와 필리핀 여자의 짧은 만남으로 태어난 아이, 13살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길거리에서 땅콩을 팔아 끼니를 때우고, 병든 엄마와 외할머니도 돌봐야 했다. 다행히 한국 여자분이 그 아이를 길에서 발견하고 도와주면서 후원을 받게 되고 앞으로 학교도 다시 가게 됐다. 찾아보니 한국에선 이미 여러번 방송에서 코피노 문제를 다뤘고 시민단체들의 후원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자꾸 눈에 밟히는 RJ와 같은 아이들 생각에 006과 012를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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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글쓰기 연습하는 두 아이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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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실 필리핀의 모계사회 특성으로 노처녀가 되면 아이라도 낳고 보자, 대체적으로 가난하기에 외국인 하나 땡잡아 신세 바꿔보자라는 생각, 그리고 종교적인 원인으로 원치 않은 임신도 낙태 금지하는 법률…이런 이유도 있긴 합니다. 한국 남자만 저러는 것도 아니고… 혹시 한국남자들에게 편견을 가질까 사족 들았어요. 어찌됐던 자기 핏줄 책임지지 않는건 인간이 할 짓이라는 생각은 변함 없구요 ^^

        1. 대댓글 감사합니다 제니님 🙂 네 물론 국적/문화/종교에 대한 편견은 저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나쁜 사람은 어떤 배경이든 상관 없이 다 골고루 있는거니깐요. 아, 그리고 댓글을 읽으며 뭐가 틀렸는지 미처 발견을 못했는데 해석을 보고 빵 터졌습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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