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설 날이다.

중국에서는 봄의 명절이라는 뜻에서《춘절(春節)》이라 부른다. 올해에는 입춘 이튿날이 음력설 날이었다. 정말 봄을 맞으면서 설을 쇠는것이다.  

설날이라고 종업원들은 없는 살림에도 술 한병씩 들고왔다. 여자들이 몇명 왔으므로 주방 일을 시켜서 점심에 다들 모여앉아 설이라고 쇴다. 부모형제와 아들애를 떠나서 쇠는 설이여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난히 그리웠다. 술을 먹지 못하는 체질이라서 코카콜라를 한박스 사다 놓고 혼자서 다 마셔버렸다.  

로얼이 어디로 갔다 오더니《춘향전》과 《홍길동》그리고《조선 가요》등 VCD로 볼 수 있는 디스크를 한아름 가져왔다. 지난 여름에 칼라 TV를 한차 실어 내오면서 VCD 기계도 한대 같이 실었었는데 컨테이너가 없는 차여서 저술령 고개를 넘을 때 TV 한대와 함께 VCD 기계를 습격조에게 도둑맞혔다. 또 며칠 후에 다른 차에다 VCD 한대를 갖고 왔고 그 기계로 저녁 시간에 중국영화와 번역 영화들을 볼수 있었지만 나는 이제까지 하나도 제대로 본 것이 없다.

로따네 집에 있던 것을 다 끌어왔는데 다른 식구들은 벌써 영화 하나를 수십번씩 보았다고 한다. 이제부터 그 영화들을 하나하나 세절적인 것들까지도 빼놓지 말고 봐야지. 그러느라면 긴 휴가가 다 지나고 식구들이 안화동으로 달려올 거였다.  

《춘향전》을 다시 볼수있는 것만큼 기분좋은 일없다. 이 영화는 해방후 세 번째로 《춘향전》이라는 이름으로 찍은 거였는데 조선의 예술 경지를 절정에로 끌어올린 영화라고 할 수 있었고 주제가도 좋았으며 특히 춘향과 몽룡의 배우가 마음에 들었다. 대학다닐 때 아내의 얼굴이 춘향과 비슷하다고 느껴져 연애를 시작한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르게 하는 영화였고 내가 춘향이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 이 영화에서 춘향의 배역을 맡은 배우였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에서 조선에 온 신상옥씨가 《사랑 사랑 내 사랑》이란 이름으로 춘향과 몽룡의 사랑을 내용으로 네번째로 만든 연극식의 영화를 좋아했지만 나는 세번째의 《춘향전》만 좋아하였다. 신상옥씨가 유럽으로 영화찍으러 갔다가 다시 다른 나라에 망명했다는 소문을 중국에서 들은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가 만들어낸 《사랑 사랑 내 사랑》을 조선 국내에서 보지 못하게들 한다고 했다. 그 영화는 그저 한번 더 보고 싶은 것뿐이고 《춘향전》처럼 매일 봐도 싫증나지 않는 조선 영화는 그 외에도 많았었다.  

내가 조선 영화들의 줄거리와 배우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고 또 영화의 주제가도 회사 종업원들중의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는데 대해 비서가 조선에서 교육받은 사람같다고까지 말해준 적도 있었다.

일할 때 중국노래와 한국 노래는 눈치를 보면서 불러야 했지만 조선 영화의 주제가는 눈치볼 것도 없었거니와 내가 즐겨 불렀으므로 회사를 찾아온 나진 사람들은 허술한 작업복을 입은 나를 나진 사람 취급을 하기까지 했으며 그 때문에 여러번 싸움이 일어날번 했었다.

돈 붙히기 작업을 할 때면 내가 부기실에 가서 노래 코를 떼서 차장 처녀들과 함께 부르는 합창으로 번져질 때도 있었다. 내가 쳐녀들한테 모르는 가사를 알려 주기도 했고 새로 배운 조선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다.

나의 86호 차에는 항상 조선노래 테이프가 한 개 있어서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을 태워줄 때면 그 시간을 제일 즐거운 시간으로 보냈었다. 우리 식구들중에서 나 혼자만 유난히 조선 노래를 좋아했고 침실에 녹음기가 없었기에 운전하는 시간이 노래를 들을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조선의 예술영화와 노래에 미칠 지경으로 반해있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평온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했고 스트레스를 풀기에도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춘향전》을 세절마다 다 기억할 정도로 보고 또 보았으니 도대체 몇번을 보았는 지는 나도 모른다. 전기가 있을 때면 언제나 《춘향전》을 보았다. 영상을 보지 않더라도 눈을 감은 채 말을 듣고 노래를 들어도 좋았다. 후에는 다른 예술 영화들도 더 많이 보았으면 했다.

예술 영화는 예술적으로 가공이 잘 되어있어 영화가 끝난 다음에는 다시 한번 보고싶은 충동을 갖게 하고 그 줄거리들을 오래오래 음미하게 한다. 20년동안 보아오면서 왜서 《예술》이란 두 글자를 붙여 줄까하는 문제를 오래동안 생각해 왔고 그 영화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점이 바로 영화가 예술적으로 성공한 일면이라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

우리 세대들중에 나처럼 조선의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들 영화 보기를 좋아하던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내가 지루한 연속 드라마보다도 영화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조선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냥 좋아한 것이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TV가 보급되기 시작한 80년대초에 수신이 가능했던것이 조선 중앙 TV 프로뿐이라는 점이다.  

요즘은 낮시간에 차장들이 경비서고 저녁시간은 운전수들이 경비를 선다. 휴식 시간이 거의 없는 경비생(수위)들에게 휴식시간을 좀씩 주기도 했는데 그때가 요즘처럼 명절이 끼웠을 때었다.

낮시간에 처녀동무들과 함께 《춘향전》을 보고 《홍길동》도 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 영화를 보지못해 안달아했던 것처럼 차장들 모두가 기회없어 보지못한다. 특히 까막동의 김영화와 김영옥이 제일 적극적이다. 1년내내 전기를 며칠 못보는 청계동이어서 저녁시간에 TV 보는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까막동은 모든 가전들이 필요없는 원시적인 마을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낮시간에 네명이 경비실에서 카드놀면서 시간을 보내기 무료 할텐데 영화를 볼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신기해 했을까?  

애들은 VCD가 뭔지 모른다. 접시같은 것을 넣고 스위치를 누르니 비디오보다 더 맑은 영상으로 영화를 볼 수있다는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는듯한 표정이었고 경비실을 비워놓고 네명이 다 몰려왔고 그중 한명이 선 자세로 회사 입구쪽을 창문 너머로 곁눈질하면서 TV를 본다.  

보다가 전기가 갈 때도 있었다. 아쉬운듯이 일어날 념을 하지 않았고 배터리로 보자면서 보채기도 했다. 변압기가 있었는데 만충전 상태에서 영화 한개 정도는 볼수 있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차장들이 윤번으로 경비서면서 매일 영화 보았기에 우리 침실이 영화관으로 된 셈이다.  

중국에서 끌어온 영화들을 저녁 시간에 보았다. 출판물인 신문, 잡지는 원정에서 통과시켜주지 않았고 영화따위와 노래 테이프도 단속했다. 자동차 녹음기속의 한국노래 테이프는 검사 중에 다 빼내갔고 영화 테이프와 디스크는 더욱 금지하는 거였다.

그러나 자동차에는 얼마든지 감출만한 데가 있다. 한국노래 테이프나 영화 디스크는 우리가 감춰내갔기에 들을 수도 볼 수도 있었고 그러나 조선 사람들한테 들리거나 보이면 안되었다. 우리가 욕보는 건 제쳐놓고라도 조선 사람이 듣거나 보면 적어도 단련대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러므로 저녁시간에 중국 영화와 번역 영화를 본다. 첩보 영화가 아니면 무술 영화여서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러다가 하루 저녁은 정전이 되었다.  금방 식사한 뒤였고 로얼은 225호를 몰고 어디론가 가고 나만 남았다.

이런 날이 제일 싫었다. 일찍 잔다는 것도 말이 아니고 경비실과 침실사이를 오가다가 마침내 비파도에 가보기로 했다. 너무도 조용해서 기괴한 정적이 깃든 안화동보다 이제껏 들어만 왔던 카지노장에 한번 구경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비파도에 들어가는 입구 쪽에 호텔 공사가 채 끝나지 않았고 그 옆의 건물에 들어가면 된다고 들었었다. 왕복 30키로 되는 거리다. 89호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나는 카지노장을 하는 건물을 바로 앞에 두고 들어가 보지 못했다. 중국에서 오는 도박꾼만 받아들이는 카지노장에 조선사람은 한명도 들어가지 못하게 단속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중국 종업원들은 설 휴가로 귀국했고 노는 사람도 없어 며칠동안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불빛이 휘황한 석유 정제공장주변을 보면서 전기가 부족하지 않으면 밤생활도 괜찮은 나진이 될 수 있겠다고 상상해 보았다.  

로얼은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나보다 1년 먼저 나진에 나왔으며 합작회사 때부터 로따를 따라 회사건설에 막대한 힘을 낸 사람이다. 온화한 성격에 종래로 성을 내지 않았지만 일할 때는 좀 느린 성질이어서 급한 성질인 나하고 잘 맞지 않았다. 그러나 성질 하나만 잘 맞지 않는 것뿐이고 일을 하는 데서는 둘의 호흡이 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로따가 나진에 있을 때 로얼은 훈춘에 있었고 로따가 훈춘에 들어가면 로얼은 나진에 나왔다.  내가 훈춘에서 일할 때는 세가지 경우가 있었다. 첫째는 로따와 같이, 두 번째는 로얼과 같이, 세번째는 독립적으로 하는 것-이 세가지다.

나는 어느 한가지라도 다 좋았다. 세번째가 좀 힘들뿐이었다. 첫번째는 심부름만 하면 되었고 늘 욕을 처먹고 다녔다. 두번째도 역시 심부름만 하면 되였고 욕먹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왜서 그런지는 모르나 로얼과 만나면 속심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고 내가 방황하고 고민하면서 일을 하는것 같다면서 위안의 말도 가끔 해주는 둘째 이모부였다.

어떤 때는 하늘이 무너져도 대수로와 하지않는 평화스런 일면도 보여주어 갱핏한 성질의 내가 배워둘 것이 너무 많다고 느껴지는 로얼이다. 말없이 식구들의 아침 식사 챙기고 회사에서 제일 부지런했으며 종업원들의 어려움을 많이 걱정해줬기에 단연 제일 인기있는 인물로 되었다.

우리 식구들 중에서 조선 종업원들한테 인기있는 사람은 첫째로 로얼이고 둘째는 나였다고 할 수 있었다. 사장동지와 나-영도 선새임은 나진의 안화동에서 다른 식구들이 부러워하지도 않는 인기를 누리면서 그 풋풋한 인정에 끌려 들어갔고 나의 경우 나진 사람들의 인정에 보답할 일을 뭐든지 해야겠다고 늘 생각했던 것이다.  

도대체 뭘 할 것인가?

그것 때문에 고민한지는 한 달이 넘었다. 숙모가 철수해 들어간 그때부터였다.  

로얼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음력설에 집에 못간 친구들과 마작 놀이하는가 부다.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적막과 외로움이 엄습했고 이 세상에서 소외되는듯한 느낌이 강렬해보기는 처음이다.  

나는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어쩌다가 버림받은듯이 안화동 온돌방에 혼자 처박혀 있는가? 왜 나진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듯이 나도 가난해져야 하는가? 나진 어느 구석에 있을 것 같은 할아버지네들의 영혼이라도 불러서 물어보고 싶어졌다.

할아버지네들은 결코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꼴을 보려고 두만강을 건넌 것이 아니겠지. 생계만을 위해 두만강을 건넌 할아버지네들의 역사가 우리한테서 되살아나라고 한것은 더욱 아닐텐데.  

우리가 잘 살게 많이 축복해 주십시오. 짐승같이 살던 옛일을 중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떳떳하고 씩씩하게 잘 사는 민족이라고 나설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밤 깊도록 할아버지네들이 걸어온 옛일을 더듬노라니 그네들의 영혼이라도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결코 외로운 몸으로 버려질 것 같지 않았다. 할아버지네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나진 사람들의 인정에 보답해 주기 위해 나는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것보다도 더 큰 신념이 새롭게 생겨난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꼬끼요!-  

어느덧 불면의 밤은 가고 새벽닭이 홰를 친다. 이리 궁싯, 저리 궁싯 해도 좀처럼 잠 못이루는 나, 어쩌다가 얼마전에 만난 여자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다른 한 친구분이 제자를 소개해 주었다. 첫번째 만남은 좋은 인상을 받았다. 예쁜 얼굴에 날씬한 몸매의 소학 교사로 이혼녀였다. 결혼한지 3년만에 헤어졌으며 애는 없었다고 한다. 이혼녀 중에서도 이만한 조건의 여자를 만나는 것도 엄청난 행운이라 할만한 세월이다.  

두번째의 만남은 며칠 전에 이루어 졌다. BB를 호출했더니 시교의 자기 집까지 마중와 달라는 전화가 왔다. 다시 시내의 먼저번 만남의 장소였던 다방에 갔고 가는 길에서 내가 쓰는 핸드폰으로 어느 친구한테 한바탕 전화를 해댔는데 좋이 15분간은 걸린 것 같았다.

다방에 도착하자부터 하품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에야 얼굴에 피곤기가 가득 실려 있는걸 보아냈다. 그 날의 대화는 30분이 안 걸렸다. 첫만남 때는 내가 많이 말했고 이번 만남은 주로 그녀가 말했다.  

-일본에 갈가 함다. 몇년 고생하면 돈이 좀 벌어질겜다…지금 손에 30만쯤 있으면 가지않아도 되겠는데…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감추지 않는 그녀를 보고 꽤 피곤해 보이네 했더니  

-엊저녁에 3차까지 하고 나니 새벽 한시가 됩디다.

하는 거였다.  

요즘 여자들은 얼굴 치장에 유난히 신경을 쓰면서도 밤 11시가 넘으면 내분비 실조로 얼굴 피부가 엉망이 된다는 것도 망각한 채 남자들을 본받아 밤생활을 즐긴다. 남자들처럼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보통 굉장히 많은 주량을 보여주면서 남자들이 진행하는 코스대로 흉내낸다. 유부녀들도 끼워서 노는 장소에 고독한 이혼녀들이 들낙거리는건 흉 볼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두번째로 만나는 남자한테 피곤한 얼굴 그대로 하품을 감추지도 않으면서 미안한 표정은 아니다. 기분이 더 잡치는 건 아직도 마음에 전남편을 그리고있다는 것을 나한테 암시해주고 있는 그점이었다. 그만하면 그녀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소개받은 선생님한테서 우리집 상황을 알아보았겠고 이제까지의 언행으로 볼진 대 나를 거절한다는 쪽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단정이 되었다.  

나는 원래 얼굴이 예쁜 여자들처럼 생겼었다. 드문히 겪는 불면의 밤과 힘든 일로 얼굴이 꺼칠꺼칠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만나는 사람마다 20대 후반으로 나이를 보아주었고 173센치의 크지않은 신장이지만 단단한 몸매를 가졌다. 갱핏한 성격이지만 모든 성격의 사람들과 다 어울릴 수 있는 자신이 생길 수 있게 성숙되어가고 있었으며 머지않은 앞날에 잘 살 수 있다는 희망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이 문제다. 가난한 남자는 여자들한테 아무런 인기도 없다. 요즘 여자들중에는 가난한 남자라도 기꺼이 사랑해줄 수 있는 여자가 한 명도 있는 것 같지 않다.

돈이 없으면 남자가 아니고 인격도 없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지독한 가난때문에 생긴 자비감과 열등감으로 나는 여자가 아무리 순수한 사랑을 바치고싶어해도 받아줄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으로 된지 오래였다.

이미 나의 결혼생활 중에서도 경험했고 그때문에 금혼까지 결심한 내가 아니었던가? 어차피 어머니 친구분의 성의를 무시하기 어려운 입장에서 어느 정도 억지감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고 좋은 인연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던 일이었다.

내 인생살이에 단 한마디라도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친구라면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다 사귀고 싶어했던 생각과는 너무먼 그것때문에 그냥 친구로만 사귀고 싶은 마음마저 없어지는 여자라고 느껴진다.

내가 아내에게서 받은 감수 그대로였다.  택시로 집까지 데려다 주고나서 인제는 그 여자와 더 만날 필요가 없음을 느꼈고 금혼하더라도 여자 친구를 많이 사귀어 두고싶었던 내 생각과는 반대로 여자가 점점 줄어들어 만나기조차 힘들고 그런 조선족 사회가 겪는 곤혹이 내 생활에도 영향이 된다고 인식했었다.  

밤이 깊어가면 날이 밝기 마련이다. 날이 밝아지면 새 희망이 움튼다. 이제 나의 신념과 희망은 머지않은 곳에 있다. 그 곳을 향해 일신이 물러나더라도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 봄날의 이른 아침, 밤새도록 인생공부를 잘한 덕분에 마침내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전반생을 살아오면서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확실한 꿈을 가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비록 아직까지 구체화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내 인생 처음으로 이국에서 지낸 그 음력설에 감사하고 나진에 감사하고 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동방영도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
5
응원합니다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