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식모가 나왔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외숙모였다. 외삼촌도 함께 나왔다. 

동생 부부가 돌아간지 한 주일도 안 되었었다. 외삼촌은 외할머니의 둘째 남동생의 아들이기에 벌을 따지면 나에게 외삼촌이었고 중국에서는 삼촌, 외삼촌, 고모부, 이모부 등을 모두 사투리인 아즈바이로 통칭했다. 

부모님들의 사촌 형제가 많았기 때문에 집에서 장손인 나에게 아즈바이와 아재는 수십 명이나 되었다. 대외 사람들이 있을 때는 그냥 삼추이라고 불렀고 집에서는 아즈바이라고 불러왔었는데 이웃으로 지낸 적도 몇 해 되고 어머니한테도 극진했으므로 나는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모른다. 

훈춘의 D 공장 공장장을 여러 해 해온 외삼촌은 공장이 파산된 후 집에서 논지가 3년 철을 잡는다. 외숙모가 매일 마작판으로 달려가는 외삼촌이 걱정되어 지난해 나진에 나와있는 동안 안절부절못하더니 이제야 시름을 놓은 모양으로 얼굴에 웃음이 넘실대고 있었다. 

아마도 외삼촌 문제 때문에 구정 후 나오는 걸 거절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로따는 우락부락한 성질인 외삼촌이 나진에 나온 후 공장장을 할 때의 습관대로 여러 가지 일에 개입하여 쓸데없는 혼란을 일으킬 가봐 걱정하면서 지난해부터 오랫동안 끌어왔고 이번에 외삼촌의 다짐을 받고 난 뒤에야 나진에 나오는 걸 동의했다고 한다. 내가 걱정 위원회 위원장 노릇을 했었던 경험도 있었으므로 로따는 여기에 신경을 많이 곤두세워둔 것 같다. 

주방은 다시 알뜰하게 거두어졌는데 사람의 손이 가고 나니 전에 없이 깨끗하고 정갈해 보였다. 며칠 사이에 자동 양수기를 장치해 놓고 야채와 쌀을 저장하는 시렁도 잘 정리해 놓았으며 냉장고도 갖추어 놓았다. 구석 쪽에는 늄 재료로 텔레비전과 자질구레한 물건을 넣어 두는 궤 하나와 이불장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내가 이모와 함께 새 장판을 사 와서 낡은 장판을 걷고 펴놓으니 그제야 제법 사람 사는 집같이 꾸며졌다. 

또한 음식 솜씨가 뛰어난 외숙모의 알뜰한 음식을 먹을 수 있어 로따는 점차 몸이 좋아져 갔고 다들 기분 좋은 식사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며칠 동안 침울하게 지내던 나도 명랑한 기분을 찾고 식사를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정신없이 해댔다. 이제부터 나는 사무적인 일을 내놓고도 속심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있게 되었다. 

그때 외삼촌 내외가 가지 않았던들 내가 연말까지 더 있으려던 일이 있을 수가 없었고 이 글이 볕을 보지 못할는 지도 모른다. 그때로부터 10개 월간 외삼촌 부부와 마음 맞추어 일했기 때문에 나는 나 혼자로서는 엄청 견디기 힘든 정신적인 압력을 다소나마 부리고 끈덕지게 배겨낼 수 있었으며 더욱더 글을 써낼 결심을 굳힐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해맑은 날이었다. 

수리소의 경비실에서 잡담하고 있는데 이모한테서 급한 일이 있는 모양 당장 회사로 내려오라고 전화가 왔다. 이때는 수리소에 올라온 지 불과 반 시간도 안되었을 때었다. 번호를 롱구방(봉고차)에 뺏긴 닛산은 큰 고장이 없이 잘도 뛰었다. 로얼이 지난해 통근차로 사용하면서 최고로 10명까지 태운 적이 있어 쇼크(쇽업소버)가 나간 지 오래된 것을 요즘 내가 새것으로 바꾸어 넣어 타고 다니기가 더없이 좋았다. 겉모양은 볼품없었고 실내도 다른 차들보다 못했지만 시트가 편안했고 먼 거리 운전을 해도 다른 차처럼 피곤한 느낌이 전혀 없다. 운전자와 탑승자 모두가 좋아했지만 지금은 번호판이 없이 그저 회사와 수리소 두 곳 사이에서만 쓰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서 차 감독사의 김 영감이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버스 검차 때 늘 애먹이던 영감이었는데 이제는 많이 친숙해져 있었고 번호판을 다는 위치를 죽어라 하고 손가락 질하는 것을 웃는 낯으로 지나쳐 버렸다. 

대기실 옆의 경비실은 이미 다 지어지고 주유소 쪽도 어느새 다 되었는데 요즘 중국에서 기술자가 나와서 주유기를 점검하고 돌아간 후 이미 사용하고 있다. 겉 미장이 채 되지 않은 경비실 한쪽 끝에 위홍이네 부부가 들었고 비비도 데리고 왔는데 목수 재간이 있는 외삼촌이 판자로 개 굴도 만들어 놓았다. 늄창 작업장 쪽의 지하실은 다 되어서 지금은 지상 벽이 올라가는 중이다. 2층짜리 사무실도 1층이 마무리되었다. 다행히도 비가 내리지 않아 마당은 뒤죽박죽이었지만 질척거리지는 않았다. 

한쪽 구석에 닛산을 세워두고 이모를 찾았다.

“지금 노선 검사를 해야겠다. 너는 여기 있다가 내가 부를 때같이 나가 보자.” 

말이 새 나가면 안 되었기에 중국어로 했다. 나도 중국어로 답복했다. 

“그러기오.” 

노선 검사는 지난해 로따와 숙모가 가을철에 한 번 하고 난 뒤 올해 들어 처음이다. 지난해 검사 때 김은숙과 김금실이 엄청난 차액으로 당장에서 해고되었다. 오늘은 누가 이 운명적인 시각을 맞게 되는 지는 이제 두고 봐야할 일이다. 

오랜만에 낮 시간에 남연숙과 차춘화 그리고 세포 비서와 정화 등과 만나게 되었다. 출근해서 첫 마디부터 농담으로 시작되는 남연숙의 말은 지금쯤은 꽤나 걸직해져 있을 거였다. 간간이 웃어 온 듯한 얼굴들이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장걸이 방은 임시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중이어서 다들 모여 있고 낮에 차장들이 들낙날낙해서 꽤 시끄럽다. 

내 장난기도 은근히 발동하기 시작해서 한 토막을 하기 시작했다. 거꾸로 읽어도 원래 말과 똑같은 말마디를 찾으라고 했다. 이를테면 《기러기》 혹은 《도마도(토마토)》 등과 같은 것이라고 힌트도 주었다. 글자가 몇이라도 상관없이 맞추는 자에게 상으로 얼음(아이스케키)을 사주겠다고 했다. 한식경이나 지났으나 누구도 맞추지 못했다. 

“내가 여섯 글자로 된 걸 알려 주면 여덟 글자로 된 걸 맞추기 쉬울 텐데 그래도 못 맞추면 얼음 없다.” 

그러고 나서 

“자지만 만지자.” 

를 높은 소리로 알려 주었다. 처녀들은 흘겨보는 사람에다가 낯이 빨갛게 상기되면서 뒤돌아 앉아 웃는 사람까지 있었으나 남연숙은 태연한 체하면서 허리가 휘도록 웃고 있는 비서에게 

“아들이 못된 짓을 하는데 웃어 주는 건 머이야!” 

하고 나서 돋보기를 올려 추더니 입을 오무리고 그 특이한 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그 모양이 더 재미있었던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야! 너는 저녁에 자재(자지-나진 사투리)만 만지니?” 

다시 엄숙한 듯한 표정을 하고 남연숙이 나에게 말하고 있었고 

“어야, 저기 자재가 온다!”

하면서 내가 밖에서 서성거리는 쟈쟈를 가리켰다. 그 바람에 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쟈쟈라는 발음이 조금은 까다로워서 차 영감이 어느 날 《자재》라고 부른 뒤에 다들 그렇게 불렀고 부른 다음 한바탕 웃어 주어 우리말을 모르는 쟈쟈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었다. 종이돈을 들고 와서 이모와 무엇인지 결산하고 있던 방문객들도 덩달아 웃어 방은 그야말로 웃음바다였다. 이모는 너무 웃어 눈물까지 흘렸다. 

“이 총각이 그냥 만지기만 할까?” 

남연숙은 역시 그 본새 그대로 크라이막스를 유지할 줄 알았다. 이모는 너무 웃어 기침을 한바탕 토해냈고 비서는 앉아서 웃다 못해 온돌에 누워버리기까지 했다. 다들 뱃가죽이 약한 모양이다. 

“그렇지, 옳다! 자재니깐 문제가 틀렸다! 오늘 얼음 먹게 댔다!” 

남연숙은 그냥 그치지 않았다. 남들은 웃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그 와중에도 사투리를 가지고 들먹였다. 

“그래, 맞다! 자지가 아니고 자재다!” 

남연숙의 익살에 다시금 폭소가 터졌으나 이제는 다들 기운이 빠져 있었다. 

“에-, 그럼 여덟 글자로 된 걸 알려 드리겠습니다. 얼음은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내가 그러고 난 뒤 일어서면서 

“자지만 슬슬 만지자!” 

를 역시 높은 소리로 말해 주었다. 집이 떠나갈 듯한 폭소를 뒤에 남기고 방을 나왔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자지러진 웃음소리가 나는 방 쪽을 기웃거렸고 나는 주방에 들어갔다. 

위홍이가 TV를 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 집에서 쓰던 중고 비디오 기계를 갖고 나왔는데 두고 쓰다가 임자가 나 지면 팔 예정이었다. 

위홍이가 보고 있는 건 내가 중학교 때 동네 집에 폐를 끼치면서 즐겨 보던 조선의 첩보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이었다. 지난해 나진 TV 중계소에서 조선 중앙 TV와 다른 채널로 방송해 주었는데 겨우 20회 중의 몇 회만 보았었다. 동족상잔의 그 시기에 조선의 첩보원들이 서울에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면서 정보를 전하여 전쟁의 승리를 보장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영화 자체로는 예술성이 뛰어난 훌륭한 영화였고 거의 20년 전에 볼 때보다 다른 이미지를 부여하는 느낌을 주는 영화다. 

사적관 건설을 책임진 주환 아바이가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많이 걱정해 주었는데 철에 따라 수산물을 보내 주고 테이프도 보내 주어 밤 시간을 영화 보는 걸로 잘 보낼 수 있었다. 이 영화도 그 아바이가 보내 주었는데 다들 미친 듯이 돌아가는 이때 위홍이는 팔자 좋게도 영화를 보고 있다. 

아무리 재밌는 영화라 해도 이 시간에 감히 영화 볼 사람이 누구냐?! VCD는 디스크가 얼마 안 되고 이미 싫증 나서 드문이 보고 있었지만 저녁 시간에만 봤었다. 쟈쟈가 디스크를 감추어 가지고 와서 낮 시간에 보았지만 그것은 아침 식사 전후와 하차 작업하는 동안밖에 안되었고 그가 보는 것은 어쩐지 우리가 재미있어하는 부류가 아니었으므로 거의 혼자 보았고 그가 하는 일에도 큰 지장이 없어 로따는 그런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비디오 테이프는 전부 다 조선에서 빌려 보았는데 종업원들이 창문에 매달려 들여다보고 방문객들 중의 일부는 구린내 나는 발을 온돌에 깔고 앉은 채로 보았었다. 우리 회사는 서비스 업체로서 휴식 일도 거의 없는 판에 비디오방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니 회사 구내에서는 일하기가 다 틀려먹었다. 

다행히도 그 기계가 얼마 안 되어 팔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위홍이가 입장이 곤란할 뻔했다. 그렇잖아도 로따가 곱지 않은 눈길을 주었고 낮 시간에 어디에 가 있는지 찾기 힘든 위홍이를 주방에서라도 찾을 수가 있으니 욕은 절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이름없는 영웅들》을 그 후 며칠 동안 저녁에 보느라고 했지만 제대로 보지 못했다. 위홍의 비디오 기계가 팔린 후 나는 나의 기계를 내올 것을 로따에게 제의했고 후일 신고해서 내왔다. 테이프를 다시 빌려 와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잘 보았고 다시는 낮 시간에 비디오방을 만들던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위홍이는 내 기계니까 낮 시간에 감히 만지지를 못 했던 것이다. 

회사 구내에서 오락가락하던 나를 마침내 이모가 불렀다. 열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조선 시간으로 열한 시인데 이 시간에 정류소 쪽에 우리 버스들이 많이 대기하고 있는 중이고 선봉에서 돌아오는 버스도 그 자리에서 검사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실동 나간 차가 일곱 대인데 정류소에 이미 넉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비디오를 보던 위홍이까지 데리고 나갔는데 나는 이모와 함께 89호에 앉아 있고 위홍이가 차장들을 하나하나 불러왔다. 

3월에 결혼한 오선희가 차액이 제일 많았는데 170원이 되었다. 강경순은 차장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60원의 차액을 두고 숨이 한 줌 만해 있었다. 한보경은 20원의 차액을 두고 어느 승객한테 거스름을 주지 않아 남은 거라면서 얼마 후에 자기 친구 비슷이 생각되는 처녀 한 명을 불러왔었다. 

다른 차장들은 이상이 없었다. 규정대로 오선희는 1,700원을 벌금 했는데(차액의 10배) 그 달 생활비에서 잘라 내기로 했고 강경순은 새로 당선된 반장이긴 하지만 정비 때문에 버스를 탄지 불과 며칠밖에 안되었으므로 차액만 벌금 주려 하다가 반장을 가만 놔두면 벌금 제도의 역할이 못해질 가봐 600원 벌금을 주기로 다시 결정했다. 

4,800원의 기본적인 생활비는 나진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직업만이 받을 수 있는 거였고 도급제나 마찬가지인 기사와 차장들의 생활비는 요즘 승객이 엄청 줄어들어 3천을 웃돌고 있었기에 일단 벌금이란 말만 나오면 벌벌 떨게 될 만도 했다. 

구두 한 켤레를 괜찮은 것으로 사려면 2천을 주어야 하는데 걸어 다니는데 닳고 나면 일년도 신지 못한다. 1회용 가스 라이터가 10원이다. 백미 1킬로에 장마당 가격으로 55원 정도다. 나진시 평균인 2천 정도보다 배 이상의 생활비를 받는 우리 종업원들은 1년 사이에 생활이 많이 펴이었고 남겨 두는 돈도 조금 있는 듯했지만 요즘같이 승객들이 적을 때 설상가상으로 벌금까지 하면 한 달을 헛 고생한 거나 마찬가지다. 

차장들이 정신을 차릴만한 일이었다. 지난해처럼 차액이 엄청 많이 나올 수도 없고 차장이 언제나 부족한 실정에서 해고라는 건 신중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기에 이번에는 누구도 해고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양심적으로 일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모를 박은 후 이모는 귀로를 재촉했다. 불과 300미터 정도 되는 거리다. 먼저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던 넉 대의 차장들은 이미 돈을 맞추어 놓고 바치러 가려 하던 중이었으므로 후의 석 대만 문제가 생겼을 뿐이었다. 

그것으로 차장들이 아직도 좀 도둑 노릇을 한다는 걸 입증할 수 있었다. 차 영감은 내가 금방 차대를 맡았을 때 차장들의 팬티까지 벗기면서 돈 수색했다는 천하 기문의 얘기를 해 준 적 있는데 대기실이 노선의 시점과 종점에 있고 직접 차표를 팔고 짐 값을 받기 전에는 차장들의 좀 도둑 행위를 근절하기 어렵다는 걸 실감하는 말이었다. 

대기실을 언제부터 쓰게 될는지? 로따는 선봉 쪽에도 대기실을 하나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차장들 다가 양심적으로 일하는 게 아니고 어떤 합일점 같은 것이 있어 남길 만큼은 제각기 다 남기고 있었고 그 금액은 한 달 동안 계산해 보면 무려 1만 원 정도는 될 것 같았다. 1명이 매달 만 원이고 10명이 열 달이면 백만이다. 그 돈이면 선봉 쪽에 자그마한 대기실 하나를 지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앞뒤 쪽에서 대기실을 사용하는 그런 날이 언제면 올까? 나진의 대기실은 외국인인 우리가 건설해 놓은 거지만 아직 사용에 들어가지 않았고 선봉 쪽은 언제겠는지 세월이 아득해 보이기만 했다.

오후에 갑자기 로따 내외가 훈춘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나보고 출입국 사업처까지 실어다 달라고 했다. 

출입국 사업처에 도착했을 때 나는 갑자기 뒤가 무거운 것을 느꼈다. 출입국 사업처 안에 실내 화장실이 있었으나 전기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사용 금지》라고 큼직이 써 붙인 걸 오래전부터 보아 왔으므로 광장 남쪽 지경동 주민구 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줄 집 가운데의 통로를 이리저리 빠져나갔더니 마침내 공동변소 하나가 나졌다. 

쭈크리고 앉았으나 못내 불안했다. 딛고 있는 판자가 휘청거려서 70여 키로의 내 몸을 이길 것 같지 않았고 빠진 다음의 창피한 정경까지 상상하면서 걱정이 태산 같은데 튀어 오르는 오줌 물도 기분 나쁘게 해주었다. 

나는 큰 병은 없었으나 두통증, 불면증 다음으로 어릴 때부터 심한 변비증을 앓고 있었다. 기분 나쁜 변소에 오래 앉아있고 싶지 않았으나 배변이 신통치 않은 데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코를 싸쥐고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변소 문에 갈겨쓴 조선의 화장실 문화와 처음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때 본 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여자 옷을 다 벗긴 후 살살 몸을 만진다. 여자가 신음 소리를 낼 때까지 젖꼭지도 만지고 온몸을 잘 만져 줘야 한다. 여자 몸이 뜨거워지고 다리 사이가 축축해졌을 때 올라타고 힘차게 구르면 된다. 

대체로 그런 내용이었고 문자로 된 것은 그것뿐이었는데 그 외에 남녀의 성기도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중국의 절반 이상 되는 땅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화장실 문화를 많이 접촉해 왔지만 제일 유명한 걸로 백두산 가이드 할 때 관광 버스를 무인지경에 세우고 

“오른쪽은 남자 화장실이고 왼쪽은 여자 화장실입니다!” 

하고 안내하면서 세상 제일 좋은 화장실이 노천 화장실이라고 믿어 왔던 나였다. 그날 나진의 특이한 화장실 문화를 접촉하고 나서 나는 20여 년 전의 동년을 회억했고 외갓집도 상기했었다. 화장실이 비슷한 데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불안감이 해소되었고 잇달아 배변도 시원히 해결되는 바람에 코를 들기 어려운 공동변소를 이내 떠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중국 번호를 단 차와 《외》자 달린 차 주변에는 항상 열 살 좌우의 꽃제비들이 오락가락하면서 돈 구걸을 한다. 내가 다닌 곳 중에 세관과 통행 검사소가 함께 자리 잡은 나진항 검문소 쪽에 꽃제비가 제일 많았고 출입국 사업처 주변과 여러 호텔 주변 그리고 장마당에도 더러 얼굴을 보이기도 했다. 

“마다바이(큰아버지), 돈 좀 주쇼.” 

“삼추이, 중국 민비 1원만 주쇼.” 

“병사리(병)를 좀 주쇼.” 

그러루한 말을 걸어왔고 나는 그때마다 괴성을 질렀었다. 

“가라, 가! 나도 꽃제비다! 너네 돈을 내가 좀 쓰자!” 

오늘은 내가 늘 보아오던 꽃제비 하나가 광장 끝에 들어설 때부터 치근거렸다. 

“너 이름이 머니?” 

늘 보는 얼굴이고 번마다 쫓았으나 딱 한 번 내화 10원을 준 기억이 났다. 

“남철임다.” 

말에 힘이 없다. 

“돈을 주면 그걸로 멀 하니?” 

“빵을 사 먹습니다. 병사리로 바꾸기도 함다!” 

“집이 어디냐?” 

“청진에 있음다.” 

“아새끼, 공부는 안 하고 아버지 엄마 떠나서 이게 뭐야?” 

“아버지도 없고 돈도 없는데 공부란 게 다 멈까? 지금 내가 돈 벌어 엄마한테 보냄다.” 

어쭈, 정말 기특한 말을 하고 있다. 

“그래? 하루에 얼마 버니?” 

“많이 벌 땐 민비(인민폐) 백원도 더 범다. 어떤 날엔 빵 한 개 값도 안 나오고.” 

“남철아, 너 몇 살이니?” 

“열일곱 살임다.” 

“뭐라고? 이 새끼 거짓말하개?” 

“아임다. 정말임다.” 

키도 작고 어려 보이는 놈이 열일곱이란다. 다시 뜯어보았다. 열일곱은 아니고 열한두 살쯤 되어 보인다. 

“너 거짓말하면 내게서 돈 가지려니 생각 말아!” 

“야-,마다바이! 정말 열일곱임다.” 

“야, 야! 이 새끼야! 내가 니 아비보다 나이 더 많아 보이냐? 자꾸 마다바이,마다바이 하면 나를 영감 치부하는 걸로 알겠다.” 

“알겠음다. 이따부터 쑤쑤(중국어로 삼촌 혹은 아저씨)라고 부르면 되지, 예? 쑤쑤, 그때 10원 준걸 잘 썼음다.” 

과연 열일곱 살짜리 애가 할만한 말을 하고 있다. 영양실조로 크지 못하고 야위어 있는 애가 나이 어려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10원을 준 걸 기억하고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나를 알아보고 89호 옆에까지 졸졸 따라오는 것이 불쌍해 보였다. 

“이따가 내가 여기 오면 내 차를 잘 봐줘야 한다, 알겠나? 내 차가 조금이라도 상하면 그땐 너를 가만 놔두지 않겠다. 들었나?” 

“예, 쑤쑤! 근심 마쇼!” 

남철이는 50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 들고 벙글써 해서 떠나갔다. 

꽃제비들은 돈 구걸을 했을뿐더러 기회만 있으면 자동차 뒤쪽의 제동등 커버를 마스고 안에서 전구를 빼내어 장마당에 넘겨 팔았다. 백미러를 뜯어다 되넘기는 애들도 있었다. 어떤 땐 장마당에서 잃어버렸던 자기 자동차의 부품을 돈 주고 다시 사 오는 때도 있었는데 그게 다 꽃제비들이 작간한 거였다. 

초창기 때 밤 생활이 무미건조했던 우리 식구들은 가끔 저녁 시간에 시내로 내려와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술집을 다닌 적이 있었다. 꽃제비들이 차를 다쳤기에 한 사람이 차 경비를 섰고 그건 당연히 술 못 마시는 내 몫이었다. 인수원을 할 때어서 딱 두 번을 같이 다녔고 두 번 다 차 안에서 콜라를 마시면서 경비를 섰었다. 내가 없을 땐 꽃제비 하나 불러놓고 돈을 주기로 하고 차 경비를 세웠다고 한다. 

출입국  사업처 옆의 술집은 지금은 미연 상업회사의 《미연 상점》이란 간판이 걸려 있고 우리 식구들이 늘 다니던 그 시기에 나이가 좀 든 사람도 차 경비를 맡아 주겠다고 나서는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꽃제비들한테 50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는 것이 더 편한 것 같아서 꽃제비들을 불렀던 것인데 걔들은 거기에 맛을 들였다. 

술집에서 나온 술이 잘 된 사람들이 취김에 중국 돈 10원도 던져 주었으므로 이 동네의 꽃제비들 수입이 제일 괜찮다고 할 수 있었다. 나도 주머니에 조선 원 몇백 원 정도를 넣고 다니다가 꽃제비들한테 경비 값으로 50원 정도를 주군 했고 어쩌다 만나는 불쌍한 여자 꽃제비들한테는 백 원씩 나눠주는 때도 있었다. 걔네들은 그 돈으로 이틀 간을 잘 살 수 있는 돈이었으나 나한테는 담배 한 갑이나 콜라 한 캔을 덜 사면 되는 돈이었다. 

시내 안의 꽃제비들은 돈으로 구슬리면 되었지만 원정 쪽의 꽃제비들은 중국 기사들이 누구나 다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살벌한 애들이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정말 하루하루가 수확으로 가득 찼다. 이 정도로 연말까지 있는다면 좋은 글감이 얼마나 생길지 모른다. 기대가 되었고 흐뭇한 기분으로 회사에 돌아왔다. 로따 부부는 이미 중국으로 가는 차를 타고 떠난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었다. 

장마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간밤 내린 비에 대기실 마당이 질척질척해졌다. 

용철이와 나는 식사시간 때마다 주방에 왔다가 낮에는 수리소 쪽에서 잠을 잤다. 용철이는 원래 숙모와 외숙모가 쓰던 침실에 나가 자고 넓은 온돌방은 내가 혼자 쓰는 방으로 되었는데 자동차의 발전기와 스타터 모터를 고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제까지 추운 나의 전기 작업실에서 하지 않고 침실 안에서 해왔던 것이다. 비가 오면 수리소에서 일하기가 말째다. 비 오나 눈이 오나 다 노천에서 작업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에 수리공들은 잠깐 경비실에 들어가 있지만 낮 시간에는 밖에서 일을 했고 비 오는 날은 일이 아무리 많아도 중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요즘에 대외 차 한 대를 수리했다. 나진 세관에서 중국차 한 대를 몰수했는데 우리 회사에서 팔아주었다. 두만강 옆의 조산리에서 사 갔는데 떠나기 전에 전기 장치에 문제가 있어서 내가 수리한 거였다. 시가 라이터가 고장 나면서 전기선이 다 타버렸고 그 때문에 여러 가지 전기 고장이 잇달아 생긴 차다. 

할 수 없이 미터(계기) 쪽을 몽땅 들어내고 타서 동선이 노출된 라이터 선을 제거해 버리고 다른 선들도 잘 점검한 후 시험해 보았더니 정상이 되었다. 라이터 선은 기사와 물어보고 다시 넣지 않기로 했으며 그대로 계기들을 다시 맞춰 넣었다. 다른 이상이 없어 조산리 기사는 흐뭇한 얼굴을 한 채 몰고 갔었다. 

그 차를 혼자 수리하는데 하루 품을 들였었다. 동생이 아직 가지 않았을 때 은행 마당에 있던 벤츠를 한대 끌어왔고 조선의 수리공을 청해서 동생이 함께 수리해 낸 적이 있다. 중국 번호판을 달고 로따가 몰고 다녔는데 쟈쟈가 한 번 운전하다가 시다 카바(오일 팬)에 구멍을 냈었다. 엔진 오일이 새는 것을 내가 강력 접착제로 구멍을 막아 계속 쓸 수 있게 해 놓았는데 요즘 또 휘발유 공급이 안되는 새 고장이 생겨 처박아두고 있었다. 구식 벤츠였고 내 기능이 그 고장을 해결할 수 있는 데까지 미치지 못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제 나진을 떠나면 북경에 가서 고급 승용차 수리를 더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그때 굳히게 되었고 나보다도 기능이 약한 조선 수리공들이 함부로 뜯고 맞추고 하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하는 것으로 배워낼 수 없다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했었다. 

연속 사흘 비가 내렸는데 오늘 아침에 그쳤다. 밥 먹고 수리소에 가려고 닛산 조수석에 오르려는 순간 로따가 나를 불렀다. 

“청계에 갔다 오라. 정화 아버지 의사를 불러오란다.” 

닛산 운전석에 탄 용철이한테 혼자 올라가라고 손짓해 주고 88호의 키를 받아 운전석에 탔다. 휘발유가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요즘은 휘발유가 떨어져 버스를 세운 지도 며칠 되었다. 드럼 통에 비상으로 넣어 둔 것이 있었는데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밑 굽에 남아 있는 10킬로 정도를 전부 다 쏟아내고 연유 탱크에 넣으면서 물이 섞여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시동이 걸렸다가 얼마 안 되어 자기 절로 꺼졌다. 한참 궁리해 보다가 아무래도 휘발유 문제인 것 같아 드럼 통을 살펴보았다. 주방 앞에 세워두고 있었는데 뚜껑을 잘 닫아두지 않아 지붕에서 내려온 빗물이 위에 떨어지고 다시 구멍으로 흘러들어 휘발유와 섞인 것 같았다. 

판자 하나와 끊어진 슬레이트 한 장을 구해서 차 밑에 넣고 누워 탱크 아래의 철판을 뜯어냈다. 탱크 밑의 드레인 플러그를 틀어 빼니 밑부분에 고였던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물은 휘발유보다 비중이 더 크기 때문에 휘발유 밑에 있게 되고 물이 다 빠질 때까지 휘발유는 크게 낭비되지 않았다. 

보닛 뚜껑을 열고 휘발유 파이프를 찾아 약간 풀어놓았다. 스타트 모터를 돌려 파이프 속의 휘발유와 물의 혼합물을 다 빼버리고 풀어 놓은 파이프를 다시 조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야 시동이 다시 걸렸다. 맞출 것을 다 맞추고 나니 시간은 30분이 넘어 흘러갔다. 차 안에서 초조히 기다리던 정화가 약간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청계 쪽으로 가면서 발동이 세 번 꺼졌으나 이내 다시 걸렸고 엔진은 크게 손상받은 것 같지 않았다. 

휘발유 넣을 때 물이 섞인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그때 저지른 제일 큰 실수였고 휘발유 관리를 엉터리없이 하는 위홍이를 속으로 욕하면서 허풍쟁이 의사를 정화 집까지 태워 주고 회사로 돌아왔다. 정화는 할 일이 있어 차에 따라왔고 도착하자마자 로따가 차 운전석에 바꿔 타고 어디 나가려고 했는데 방정맞게도 그때 또 시동이 꺼졌다. 

로따는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고 정화는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내가 보닛 뚜껑을 열고 휘발유 파이프를 다시 한번 힘껏 조여 놓은 후에 시동이 순조롭게 걸렸다. 로따는 툴툴대면서 몰고 마당을 빠져나갔는데 정화는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로따와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갔다가 돌아온 정화가 나를 찾더니 차가 낮 시간에 다시 발동이 꺼지지는 않았지만 후에 문제없겠는가 하고 물어 왔다. 걱정 말라고 말해 주어서야 안심하고 집에 돌아갔다. 

그때는 일자로 5월 중순이 다 지나가는 때였고 점심에 쟈쟈가 비비를 잡아 저녁식사 때 보신탕을 먹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비비가 경비실 쪽의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로따는 좋지 않은 징조라며 개잡이 할 의향을 말한 적이 있다. 로따는 개고기를 싫어했는데 냄새도 맡기를 꺼려 했으나 개를 잡을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그로서의 이유가 있는 듯싶었다. 

뭐 옛날부터 개가 집 마당을 파헤치기 시작하면 집안이 망한다 했다나? 늄창 작업장 벽이 다 올라가고 옥상 작업을 하느라고 임시로 나무 계단을 만들었었는데 쟈쟈가 그 계단에 비비를 달아매고 네 발목을 끊어 놓아 피를 다 흘린 후 천천히 죽게 했다. 설화는 점심부터 울기 시작하여 저녁 식사 때에는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으나 구수한 개고기를 잘 먹어 주었고 식사가 끝난 다음에 또 한바탕 눈물을 흘려서 쟈쟈에게 놀림을 당했었다. 

쟈쟈를 엎어놓고 때리는 시늉을 해서 식구들을 한바탕 웃게 만들더니 눈물 흘리며 자기 방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러는 설화를 보면서 설화에게 개 값을 물어주어야겠다며 로따가 문밖에서 설화를 놀려주고 있었다. 개잡이를 할 때 로따는 주방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비비의 죽음으로 회사는 또 하나의 초창기를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숙소와 같은 시간에 시작한 경비실과 주유소는 이미 사용에 들어갔고 2층 사무실과 늄창 작업장의 옥상 작업 그리고 마당 정리만 남았을 뿐이었다. 자금이 문제 될 뿐 기타의 것은 지난해의 초창기보다 무난히 풀려졌기에 대기실 주변의 건설은 상상했던 것보다 빠르고 훌륭하게 진척되었다. 

장송의 아내가 어제 쟈쟈 차에 나왔다. 통행증이 23일까지 유효인데 그전에 비파도에 한 번 가보려고 관광차 나온 거였다. 로얼도 함께 나왔기에 오래간만에 모여 앉아 카드를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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