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사로청에서 새로운 임무가 내려왔다. 

해양공원 개조 공사중에 롤러 스케이트장 건설 건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청계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만들게 되고 밑바닥에 펴야할 막돌을 실어가야 하는데 나진의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외국인 기업에도 임무가 조달되었고 우리 회사와 장마당 가기 전의 삼흥회사 동맹원들이 함께 하되 우리가 차를 내기로 했다. 

박동혁이 운전수 대표로 로따와 담판을 한후 14일부터 끊어진 용평다리까지 버스가 운행하기로 했었는데 손님을 용평까지 실어간 후 선봉 운수대 차들이 받아 싣고 가면 되었는 데 결국 그 장소에서 승객을 교환하는 셈이었다. 용평다리가 다시 통하기 전인 10월 초까지 계속 그런 식으로 운행했고 차장들은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막돌 실이를 할수 밖에 없었다. 

이날이 9월 19일이었다. 대기실 주변의 부대 건물을 지을 때 종업원들과 함께 수십 차의 막돌실이를 한 적 있는 내가 운전수로 당선되었다. 삼흥회사는 여관, 식당, 상점을 하는 서비스 업체였기에 말짱 여자들이고 비서 한사람만 남자였다. 그 동맹비서는 성이 김씨였는데 나보다 어렸고 면허는 없으나 트럭은 능히 운전할 수 있다고 했다. 회사에서 내놓은 차는 크레인차였는데 중고차 중에서도 타이어가 제일 좋았고 험한 길에도 아깝지 않게 몰고 들어갈 수 있는 차여서 내놓은 거였지만 김비서가 운전에 익숙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는 도저히 시름을 놓을 수 없어 내가 자각적으로 자진해 나선 거였다. 

정화의 말 그대로 

“우리 동맹조직의 일엔 영도 선새임이 제일 적극적임다.” 

였다. 정화는 막돌실이하는 이틀사이에 김비서한테 

“영도 선새임이 없으면 누가 우리 일에 나설까? 정말 찾을 만한 사람이 없네.” 

하고 칭찬 비슷한 말을 여러 번 했었다. 

처녀들은 밤참을 언녕 준비해 가지고 왔고 막돌이 많은 관곡동으로 갔다. 비파도에 들어가는 길목에서 좌회전하여 원래의 관곡고개 구도로로 접어들면 골짜기 깊숙한 곳에서 흘러내리는 내를 만나게 되는데 강바닥에 막돌이 무척 많다. 

첫날에는 처녀들과 함께 물에 뛰어들어 막돌을 주어냈다. 일에서는 우리 회사 처녀들을 당할 사람이 없다. 한차 꽉 박아 실었는데 80%는 우리 처녀들이 실은 거다. 김비서는 여객수송회사 처녀들이 일은 잘한다면서 혀를 내둘렀고 남자 둘이 앉아서 걸싸게 일하는 처녀들을 보면서 담배를 태우기도 했다. 

알고 보니 사적관 건설을 책임진 주환아바이네 아들이었다. 후에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보고 동맹원들과 함께 하는 작업을 수차 하면서 동행했고 친하게 지냈다. 한 번을 나르고 두번째 차를 다 실은 후 밤참을 먹었다. 

나는 저녁밥을 먹고 나왔지만 처녀들은 지금이 저녁식사라고 했다. 낮은 더운데 깊은 밤이고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그런지 몸이 오싹 떨렸다. 추워서 몸을 놀리다 보니 일을 하기 마련이다. 나는 하지 말래도 하는 성질이었으니 종업원들은 부지런하다고 평판이 좋았고 특히 동맹원 처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누리고 있었다. 

두번째 차를 부리고 회사에 돌아오니 새벽 한시가 되었다. 버스 운행이 끝나자 바람으로 막돌실이를 한 처녀들은 남자들도 하기 싫어하는 힘들고 지저분한 일들을 걸싸게 해져꼈는데 여자들에게 습관시켜놓은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집이 멀리 있는 처녀들을 89호로 실어다 주고 돌아 왔었다. 

두번째 날에는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회사 마당이나 수리소 마당에 세워둔 차들은 버스나 중고차나 할것 없이 연유 탱크 뚜껑을 잘 도둑맞혔다. 빗물이 들어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깡통이나 비닐 봉투로 가리워 두었는데 어떤 차들은 탱크안에 이물이 들어가 휘발유 파이프를 막아버려 시동이 자주 꺼졌다. 

크레인차도 그 고장이 생겼던 것인데 탱크 안에 손을 들이밀어 비닐 봉투 한 쪼각을 꺼냈지만 고장이 여전했다. 연유 펌프를 수동으로 작동하여 휘발유를 겨우 약간 뽑아올리고난 뒤 시동을 걸수 있었지만 수십 미터를 가고는 서버리군 했다. 그 작업을 8키로 되나마나한 거리에서 수십 번을 하고서야 겨우 한 차를 실어가게 되었다. 

이미 열한 시가 지났다. 조선 시간으로는 12시가 지난 시간이다. 아직 임무로는 한 차가 남았다. 다음날 하기도 귀찮았으므로 밤을 패서라도 끝내자면서 정화가 우겨서 부득이 두번째로 관곡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막돌을 실은 채로 진흙 밭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새벽 네시까지 젖먹던 힘까지 다 내서야 겨우 빠져 나왔지만 클러치 마찰판이 다 떨어져 나가 차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벌써 동녘이 희붐히 밝아 오기 시작하고 가까운 동네의 닭이 세홰 채나 치고 있었다. 

집에서는 기다리다 못해 창주와 영철이가 《라선-외-224》호를 단 판매용 중고차를 몰고 왔다. 길에 나간 차가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면 사고난 줄 알고 회사에서 구원차를 보내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날따라 창주가 밤경비로 나와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이제 《라선-외-224》호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중고차 시장이 좋은 얘기는 앞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어떤 차는 먼저 돈을 받았는데 나진에 도착하자마자 구매자가 와서 몰고 갔지만 어떤 차는 수개월 간을 세워 두어도 팔리지 않는다. 그냥 세워두기도 안될 일이어서 번호를 받아 창주가 몰고 다니면서 시멘트를 비롯한 건축 자재를 실어 날랐었다. 

대기실주변 건설 때 한몫 톡톡히 막았다. 나도 여러번 운전했는데 임자가 나지면 팔고 다음 중고차에 번호판을 옮겨 달게 된다. 그러니 《라선-외-224》호는 여러 가지 차종에 10여 대나 되는 차에 옮겨 달게 되었고 제일 멀리로는 최영복이 창주와 함께 은덕에도 갔다 왔었다. 5월 말이었는데 은덕에 가서 시멘트를 사왔었다. 집을 짓는데 값이 싼 조선 시멘트도 더러 사서 썼던 것이다. 그러다 보면 길에서 차를 욕심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흥정을 한 후 얼마 안되어 팔리 군 했었다. 

일도 하고 판매도 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좋은 방법이라고 해야겠다. 《라선-외-224》호는 우리한테 그렇게 사용되었다. 다른 중국 번호판도 적지 않게 사용했고 사용한 후면 내가 다 보관해 두었는데 두 나라 번호판이 저그만치 열 개 정도나 모여지게 되었다. 어떤 번호판으로는 여러대 내갔기에 내가 몰아 내간 것만 해도 40대 정도가 되었던것이다. 

진흙 밭에 빠진 차를 빼느라고 부리었던 막돌을 더러 224호에 실었다. 두 차를 와이어로 걸쳐매고 출발하려니까 224호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배터리가 형편없었던 것이다. 크레인 차의 배터리를 뜯어다가 굵은 쇠줄로 키스시켜 겨우 시동이 걸린 뒤 다시 배터리를 옮겨 놓고 224호가 끄는 대로 해양공원까지 갔다. 

밤시간과 새벽에 막돌을 인계 받는 사람이 있어서 아무 때건 만날 수 있었다. 다 부리고보니 임무는 초과 완수되었다.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겨우 회사에 도착하니 19일 아침 출근시간이 다 되어있었다. 차장 처녀들은 내려오는 눈까풀을 쥐어 뜯으면서 버스에 올랐고 정화와 경순이는 집에 가고 춘화는 부기실에서 소퍼에 누워 쪽 잠을 잤다. 혜영이와 늄창조에 있던 영옥이와 영화는 어쩔수 없이 하루 휴식하게 했다. 

이제 해양공원이 개조되면 나진 인민들에게 더없이 좋은 휴식터로 될 것이고 청년공원으로 개명한 후 장군님께서 현지 지도하러 오신다고 했다. 회사의 정상적인 업무외에도 우리 종업원들은 의무노동에 많이 참가했고 우리 식구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많이 참가했다. 그 중에서 나진-청진 도로 보수작업과 해양공원 막돌실이가 제일 인상적으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나진시의 건설에 나의 힘도 한몫 있다고 생각해 보는 심정이 어떨지? 독자들께서 나의 소감을 가늠해 보시길 바란다. 

막돌실이 첫 날인즉 비파도 입구 쪽의 엠페러 호텔이 신장 개업하는 날이었다. 홍콩에서 투자한 것인데 지난해부터 카지노장으로 쓰던 호텔의 부대 건물은 종업원들의 숙소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카지노장은 호텔의 1층으로 옮겨 갔었다. 

그 카지노장에 월말에 놀러간 적이 있다. 그 얘기는 뒤로 미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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