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동안 계획해오던 관광소망이 드디어 이루어지게 되었다. 목적지는 함북 최남단 길주 옆의 칠보산이었고 일자는 21일부터 23일까지 2박 3일로 잡았다.  

대외사업국에서 올해 벌써 외국인기업소 외국인들의 관광을 한번 조직해 주었는데 우리는 두번째로 가게 되었다. 우리 식구 13명중 로따 부부를 제외한 11명에다가 출입국 사업처 옆의 미연상업회사 중국사원 3명 그리고 나진시장 중국측 합작상대인 연변 G 공사 사원 8명으로 팀이 무어졌고 수행인원으로 대외 사업국의 부국장, 지도원 일남이와 사무실 직원인 옥난이, 그리고 관광국의 가이드 두명까지 모두 27명이었다.

그만한 인원이면 대형버스 한대로 충분한데 이상하게 21인승 잇스즈 버스 한대와 8인승 마쯔다 봉고차 한대가 나와 주었다. 칠보산에 도착하여 관광이 시작되어서야 봉고차 한대밖에 통과하지 못하고 길이 가파롭고 험해서 대형버스가 전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도로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리가 하나씩 밖에 비워지지 않는 두 차에 불편한대로 비집고 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식구들과 G 공사의 8명 그리고 일남 지도원과 가이드 한 명이 잇스즈에 타고 나머지는 마쯔다에 타기로 했다. 일남이는 우리회사의 담당 지도원이어서 초창기 때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었다.  아침에 출입국 사업처에서 삭제 도장을 찍었다.

바로 옆의 미연상점에서 맥주, 콜라와 빵, 과자 등속을 사고 상비약도 더러 샀다. 미연회사의 중국사장이 마침 그 자리에 있었는데 처음 팀에 따라 칠보산에 다녀왔으므로 주의사항을 얻어듣고 나왔다. 차는 무료로 제공해 주는 거지만 나머지는 전부다 자부담이고 제일 큰 걱정은 먹거리라는 것이다. 무인지경인 칠보산에서 먹거리만 해결되면 다른 건 무난하다고 했다. 다만 태풍전과 태풍후의 두 팀이 여로에서 겪은 고생이 달랐는데 우리는 500키로 되는 왕복 길에서 상당히 큰 고생을 겪었었다.  

일남 지도원이 며칠 전에 부탁한 연유 필터는 바로 이번 관광에 동원된 차, 그러니까 내가 탄 잇스즈에 쓸 거였다고 말해 주었는데 아직 구해오지 못했고 그 말을 듣고난 후 어쩐지 찝찝했다. 후창세관에서 신고서류를 만들고 검사받던 중 두 차 다 타이어가 형편없는 중고인것을 보고는 더 큰 걱정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후창통검에서 원정통검의 출입국도장과 비슷한 도장을 찍고나니 또 다른 나라로 가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후창을 빠져나오니 시간은 많이 지나서 조국시간 열시 반도 넘어 있었고 그나마 명산을 찾아가는 여행 길이 흥겨웁고 신이 났다.  

진수고개를 넘고 다른 한 고개를 넘어 내리막 길을 내려가는 중 뒤바퀴 하나가 펑크났다. 내려서 기사가 작업하는 것을 보면서 담배 태우다가 도로 옆의 농가에 들어가 물을 얻어 마셨는데 그냥 나오기가 무엇하여 집 주변을 둘러보았고 마당에 심은 무우를 보고 나서 그걸 팔아 주기로 했다.

어느 한번 쑈찌와 함께 귀국할 때 선봉 길 옆에서 무우를 뽑아 먹은 적이 있고 굉장히 맛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밥을 너무 일찍 먹었고 배에서는 벌써 기별이 오고 있었는데 무공해의 무우를 먹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크기가 굵은 당근만한 것이 통통하게 잘 여물었는데 1인당 하나씩 돌아가게 뽑았고 내화 50원을 주니 집 주인은 두 눈을 화잔등 같이 뜨고 우리를 보았다.

G 공사 팀에서도 10여 개를 뽑고 나서 역시 50원을 주었다. 농부가 하는 말을 듣고서야 그가 경악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백원은 농가에서 부수입으로 1년에 한번 정도밖에 볼수 없는 큰 돈이란다. 그때에야 이미 지대밖이라는 걸 의식했고 지대밖의 가격으로 몇십전밖에 되지 않을 무우를 백원이라는 거액으로 샀으니 농부가 놀랄만도 한 일이다.

지대밖의 월급이 백원 정도라고 하던 말도 생각났다. 관광팀이 지나가면서 무우를 처음 사주었다고 했다. 같은 말을 하는 우리가 외국인같지 않게 보이더라는 말도 잊지 않고 했다.  

무우를 먹는 동안 바퀴가 바뀌어 지고 다시 출발하여 한참 가니 앞에서 달리던 마쯔다가 길옆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잇스즈가 나타나자 마쯔다는 또 앞질러 갔다. 다시 고개를 몇개 넘어 오후 한시(조국 시간)가 넘은 시간에 청진 관광식당에 도착했다.  

다들 100키로 되는 구간에서 먼지를 수태 먹었고 괜히 길을 떠났다는 표정들이었지만 차에서 내리자 바람으로 겉모양이 보기좋은 식당앞에서 셔터를 눌러댔고 주차장 밖의 청진거리를 호기심에 찬 눈으로 보았다.

식당입구를 지나 왼쪽의 식당에 가지 않고 오른쪽의 쇼핑센터에 여자들이 모여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을 남자들이 불러 내와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에 안 남았다.

식사가 끝난후 대외사업국 부국장이 다음 코스를 설명했다. 청진시 도심에 있는 김일성 주석의 동상에 가서 인사드리고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다시 출발하는데 칠보산까지는 아직도 150키로쯤 남았다고 했다.

부국장은 두 차의 가이드를 다 맡은 총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거였다. 길에서 가이드의 소개로 청진이 조선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라는 걸 알았다. 중요한 항구일 뿐더러 나라에서도 중견기업인 제철소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양이 200만 인구, 함흥에 80만, 그  다음으로 청진에 70만의 인구가 있었는데 공기 오염이 심하다는 걸 마지막 영을 넘으면서부터 느끼기 시작했고 식사를 하는 동안 매캐한 청진 공기가 영 안좋아 보였다.  

김일성 주석의 동상에 꽃바구니를 드리고 깊이 머리숙여 인사하고나서 기념 촬영을 했다. 아름답게 꾸며진 도시였는데 공해가 없으면 지상낙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상 싶었다.

한참 달려서야 겨우 시교에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선 코를 떼어 우리 잇스즈에는 가요무대가 펼쳐졌다. 아침식사 할 때 조선가요 외의 노래를 절대 부르지 말라던 로따의 부탁대로 부르기 좋은 노래를 한 사람 한 사람 어랑군에 도착 할 때까지 불렀고 합창도 했다.

G 공사 팀에서도 우리 식구들처럼 조선노래만 불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가요를 죄다 동원 시켰지만 노래 중에 중복되는 노래가 있는 것을 피면하지 못했다.  

어랑 바닷가에서 사진 몇 장 찍고 남자들이 담배 태우고 난 뒤 다시 출발했다. 태풍때문에 끊어진 다리로 건너지 못해 강바닥을 핥으면서 지나갔고 늦은 가을걷이를 하는 들판의 농부들도 보았다.

넓은 호수를 옆에 낀 도로를 달리면서 본 길옆에 만들어 놓은 동물 석상도 인상적이었는데 그 다음은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외칠보 호텔에 도착하기 전에는 너무 가파롭고 차 한대밖에 통과하지 못하는 폭의 영길을 지나간 것밖에는 기억에 남겨 둘만한 게 없었다.  

조국시간 아홉시가 지나서야 외칠보 호텔에 도착했다. 방배정을 하고 짐을 두고 나온 뒤 식당에서 그리 비싸지 않은 요리를 시켜서 술도 마시고 밥도 먹었다. 점심밥 값을 낼 때와 같이 총무를 맡은 내가 우리 팀의 밥값을 결산했었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조금 내 놓고 주변의 산들이 호텔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는데 오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과 같이 내일의 관광이 많이 기대 되었다.

위홍이가 갖고 온 카드로 밤새도록 도박을 놀았다. 두시간 쯤 자고 아침에 호텔밖을 나가 계곡을 흐르는 물에 세수했다. 그냥 마셔도 탈이 생길 것 같지않게 맑디맑은 물이었다. 호텔안엔 더운물을 마실 만큼 두고 있는 외 수도물은 공급되지 않고 자그마한 수력발전소에서 공급하는 전기를 쓰고 있어 불빛이 어두웠다.

주변의 기암괴석은 어쩐지 무서운 느낌을 주었고 괴석과 암반틈에서 갑자기 야수가 뛰쳐나올 것만 같아 몸이 오싹해났다. 산 속의 날씨는 사람사는 동네보다 먼저 추워지나 부다. 부국장이 세수하러 나온 사람들에게 가끔 노루 떼를 볼 수 있다고 말해 주었는데 이튿날까지 아무 동물도 보지 못했다.  

낮 시간 동안에는 점심밥을 도시락으로 싸 가지고 산 속을 다녀야 한다고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어제 승차했던 대로 타고나서 출발했다. 가이드가 흥을 돋구어 설명을 시작했다.

칠보산은 내, 외, 해 삼칠보로 나뉘는데 오전에 내, 외 두 칠보를 보고 오후에 해칠보를 보는 코스가 있다. 시간이 허락되면 계곡쪽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했다.  

범바위에 도착해서 가이드의 해설은 동강이 나고 말았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과 신통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조금 더 가니 휴양소가 있었고 가파롭고 오불꼬불한 영길을 잠깐 올라가니 사찰이 나졌다. 주차시켜 놓고 카메라만 갖고 내렸다. 여기서 영감 하나가 현지 가이드로 나올거라고 들었었다.  

사찰 이름이 개심사(開心寺)이고 중간 건물이 대웅전(大雄殿)이라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현지가이드 영감이 한 해설은 거의 빼놓지 않고 기억했다.

이제 그 해설을 적기로 한다.  

– 예로부터 삼천리 금수강산에 명산이 많기로 해내 외에 널리 알려지고 요즘은 명산중의 명산으로 칠보산을 꼽는다. 일곱 가지 보물이 있어 칠보산인데 그 일곱 가지 보물은 금, 은, 동, 진주, 마노, 산호, 부거이다.

보물도 보물이지만 산 자체가 특이하게 생긴 것으로 하여 유명한 관광지로 되기에 손색없다. 그야말로 명산 중의 명산이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인민의 칠보산을 명산 중의 명산으로 빛내 주신 거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칠보산은 벗은 몸을 드러내고 누워 있는 젊은 여자의 몸 그대로의 모양이다. 묘한 것은 두 다리 사이의 깊숙한 곳에 샘이 하나 있고 그 샘터가 바로 지금 여러분들의 옆에 있는 저것이다. 기포가 함께 나와 흐릿한 저 샘물은 기가 막히게 맛이 좋고 이름은 《보지 물》이다.  

먼 옛날 백두산화산이 분출하면서 그 분무 암이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칠보산으로 되었다. 여기서 약간 올라가면 승선대(昇仙臺)가 있고 거기서 보는 내칠보의 경치는 천하절승의 경개이다. 오늘 여러분들은 좋은 날씨를 만나서 다행으로 모든 내칠보의 경치를 한 눈에 다 볼수 있다.

그 많은 기암괴석과 초목, 그리고 이름을 알수 없는 꽃과 열매를 가까이에 가면서 샅샅이 구경하는데 적어도 한달이란 시간이 걸려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부부 바위, 늙은 부부 바위와 배 바위를 소개한다.  

승선대에서 왼쪽 앞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부부 바위는 이름 그대로 부부가 포옹하는 모습의 바위이다. 고구려의 장수가 외적을 물리치고 3년 만에 환고향 했는데 머리에 투구를 쓰고 몸에는 갑옷을 걸친 모습 그대로이고 아내와 만나서 깊은 포옹을 하고 있다.

봄철에는 여자의 머리 위에 진달래가 피어 있어 꽃 너울을 쓴것 같이 보인다. 전통의상을 입은 채로 남편에게 안겨있는데 왼손이 남편의 다리 사이에 들어가 있다. 겉은 멀쩡한데 그것이 안녕한지 만져보고 있는 중이란다.  

부부 바위 뒤로 늙은 부부 바위가 있다. 젊은 부부가 깊은 포옹을 하는 모습을 시샘이 나는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는데 영감은 앉아서, 노친은 선 채로 모양이 신통하다.

승선대 바로 앞으로 멀리 배 바위가 보인다. 사공 총각이 노를 젖고 있고 처녀가 사공 앞에 마주 앉아 사공 총각의 다리 사이에 불끈 솟은 그놈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모습이다.  

그 외에도 초가집 마을 바위를 비롯해 많은 바위가 있는데 바위마다 신통하게 생긴 모습은 죄다 가공품이 아니고 천연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어버이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후 위대한 장군님께서 우울한 마음을 달래시려고 처음 칠보산에 오셨다. 그때 내가 현지 안내를 맡아 드렸다. 그 후에도 또 한 번 오셨는데 관광지로 개발할 것을 현지 지도하셨고 그 은덕으로 오늘날 3칠보에 관광 도로가 건설되고 천하명승으로 되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들게 되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나의 안내를 받으신 후 돌아가실 때 이런 질문을 하셨다.      

“하느님이 있다는 걸 믿고 있습니까?”  

나는 장군님 앞에 꿇어앉아 깊은 절을 올리고 나서 말씀 드렸다.  

“진정 있습니다. 장군님이 바로 우리 인민의 하느님이십니다. 칠보산을 인민의 산, 명산중의 명산으로 내 세우시고 빛내여 주신 장군님이시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 우리 장군님이 아니셨더면 칠보산은 볕도 보지 못할 번했다. 우리 장군님이시야말로 하늘이 낸 대효시고 위대한 분이시다.  

그리고 나서 개심사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서야 우리 민족의 전통의상으로서의 색동저고리가 칠보산의 개심사에서 발명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먼 옛날 개심사에 주색잡기로 유명한 스님 하나가 있었다. 대웅전의 부처님한테 불공드리러 오는 여자들이 보이기만 하면 부처님 밑의 밀실에 들어가 작은 구멍으로 여자들을 내다보았고 소원이 무엇인지도 엿듣군 했었다.

그런 여자들 중 애낳이를 못하는 여자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시 오면 꼬여서 간음하군 했다.  

수년이 지나니 그 여자들 중 애를 데리고 와서 부처님한테 고맙다고 거듭 불공드리는 여자들이 나타났고, 그 스님은 그 애들이 자기 핏줄이라는 걸 알고는 수단을 써 그런 애들이 나타날 때마다 다른 애들과 구별하기 쉽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색깔의 천을 옷에 붙여 놓고 오도록 감언이설을 늘여 놓았다.

애들은 불공드리러 올 때마다 팔이나 몸에 여러 가지 색상의 천을 감고 처음엔 한 아이가 한 가지 칼라를 쓰던 것이 후에는 여러 가지 색상을 사용해 예쁜 옷을 만들어 입고 왔으며 그것이 발전하여 지금의 색동 저고리로 되었다.  

부처 옆에 사자 절구가 있었다. 사자 꼬리는 남근모양으로 되어 있고 불공드리러 온 여자들이 그 꼬리 위에 앉아서 불공드리고 주문을 외웠다고 한다. 사자 절구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는 여기서 밝히지 않기로 하겠다. 독자 여러분들이 직접 찾아가서 어떤 판국인지 알아보도록 하시는 게 좋겠다.  

개심사 주변에서 사진을 찍어 기념으로 남기고 용연정(龍淵井)으로 불리는 그 샘물도 맛보았다. 절에 개 몇 마리가 있었는데 가이드 영감의 친구인 듯한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고 공격받은 사람은 손가락이 찢어져 붉은 피가 사정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다가 가이드 영감을 따라 사찰 뒤의 승선대로 올라갔다. 벗은 여자의 모습 중의 다른 부분을 볼 수 있는가 하는 나의 질문에 가이드 영감은 이를 환하게 드러내고 웃더니 여기서는 용연정의 샘물 외에는 다른 부분을 볼 수 없다고 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아야 그 여자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승선대는 콘크리트로 볕과 비를 가릴 수 있게 만든 전망대었다. 가이드 영감이 해설을 다시 시작했지만 듣는 것보다 보는게 급하고 사진찍는 일은 더 급하다. 부부 바위와 모든 바위들이 있는 곳을 배경으로 하여 기념 촬영을 하고 나서 현지에 있는 망원경으로 내 칠보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부 바위를 자세히 보는 시간을 가졌다.  

백두산의 천문봉(중국측의 봉우리)과 똑같은 누른 색 화산재로 되었는데 남자가 허리띠를 두른 부근에 크고 깊은 금이 가 있었고 머리로부터 허리께까지 가는 금도 한개 나있었다. 여자는 조금도 금이 간 것이 없었지만 오래잖아 부부 바위의 모습을 잃고 말것이라는 예감이 들게 했다. 어쩌면 칠보산의 정기를 혼자 갖고 있는듯한 저 부부 바위가 오래도록 보존되어 우리민족 동포들이 모두 볼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까지 품어보게 되었다.

바로 그 위에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늙은 부부 바위가 신통한 모양을 하고 자리잡고 있었고 정면 멀리로 배 바위와 초가집 마을 바위도 보이었다.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기암 괴석들을 가까이에 가서 볼 수도 있다는 가이드 영감의 말이 들려 왔지만 2박 3일 스케줄로는 도무지 진행할 수 없는 코스라는 걸 유감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승선대에서 40분 가량 구경하다가 아쉬움을 잔뜩 남겨 놓고 주차장에 내려 왔더니 어느 학교에서 트럭 한 대로 수십 명의 학생을 싣고 온 것을 보게 되었고 그 학생들은 개심사 마당에 모여 선 채로 우리 일행이 승차하는 것을 호기심에 찬 눈길로 보고 있었다.

나진의 학생들은 단체 복에 다른 나들이 옷도 괜찮은 쪽으로 입고 다니었지만 이 학생들의 옷은 색갈이 짙고 (주로 청, 흑 두 가지 색상) 허름한 것이 나진 학생들이 입은 것보다 영 못해 보였다.  

오던 길을 따라 호텔 쪽으로 내려가는 중 범바위를 지나서 아까 지나쳐 버린 고양이 바위와 사자 바위도 보았다. 호텔 앞을 지나 조금 더 가니 거기가 외 칠보였다. 가파롭고 기복이 심한 좁디좁은 영길을 이리 저리 돌고 돌아 정상에 올라 보니 그곳 역시 경치가 수려했다.  

우리 식구들은 절벽을 옆에 두고 외칠보 호텔이 보이는 쪽을 배경으로 하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가을이 깊어진 양 울긋불긋 단풍이 보이고 있고 사철 푸르다는 소나무도 빽빽이 들어서 있다. 부지런히 사진을 찍으면서 경치를 흔상했다.

내칠보와 마찬가지로 외칠보에도 장군님에 대한 찬사의 말과 구호가 여러 바위에 많이 새겨져 있었다. 정상까지 올라오는데 도로가 너무 좁고 험해서 어떻게 공사했는지 몹시 궁금해 졌다. 중형버스정도 한 대밖에 통과하지 못할 폭인데 길에서 차를 만나면 피할 곳도 없고 도로 옆은 어디라 할 것 없이 깊은 낭떠러지다. 인민군 전사들이 밤에 낮을 이어 불과 1년 만에 칠보산의 모든 관광 도로를 건설했다고 동행 가이드가 설명을 해주어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백두산을 수십 번 다니면서도 한 번 가보면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는 산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칠보산은 그게 아니었다. 자기 차를 직접 운전하고 바위마다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하는 관광이 더없이 훌륭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고 나니 다시 한번 와보고 싶어졌다.

오늘 시간이 제발 더디게 흘러가 주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게까지 되었다. 인적이 크게 닿지 않은 아직도 미개발의 무공해 칠보산-무궁무진한 전망이 있는 명산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는 산이라고 개탄해마지 않았다.

아직도 점심식사 시간까지 조금 남아 있어서 계곡 쪽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내, 외 두 칠보와 해칠보 사이에 있었는데 통행 가이드가 말하기를 칠보산의 3칠보 코스외에 유명한 코스로 그 계곡에 가보지 않으면 칠보산에 왔다 갔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차로 한참 들어가다가 도로가 끝나는 곳에 주차시켜 놓고 갖고 갔던 먹거리들을 메고 지고 이고 하면서 계곡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펑퍼짐한 바위를 식사하는 곳으로 정해놓고 흐르는 내 옆의 오솔길을 따라 계속 들어갔다. 매 바위, 게 집게 바위, 그리고 그밖에 기억하지 못한 숱한 바위들도 음담패설로 해석되었고 그걸 들으면서 힘든 줄을 모르고 가파로운 오솔길을 따라 끝까지 걸어갔다.

이날 계곡 끝의 정자에 도착해서 폭포 구경을 한 사람은 나를 포함한 우리 식구 다섯 명뿐이었다. 장마철에는 물량이 많아 더 크고 사나운 기세로 곤두 박힐 것 같다. 폭포 옆의 정자에서 오던 길을 되돌아보고서야 다른 사람들이 더 올라오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계곡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해발이 높아 졌는데 차가 선 위치에서 정자까지의 낙차는 수백 미터(?)가 되어 보였다. 이름 모를 갖가지 열매들과 들쑹날쑹한 바위, 하늘이 가느다란 선으로 보이는 계곡 속에 장군님에 대한 찬사의 노래와 구호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새겨져 있고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과 거무칙칙한 바위들이 무시무시한 느낌을 준다.

맑디맑은 물이 깊은 소를 몇 개 만들고 있었는데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이고 옷을 입은 채로 뛰어 들어가고 싶게 사람을 유혹한다.

나는 백두산에서 찦차를 타고 천문봉에 올라간 후 낙차가 500미터 되는 천지 못가에 내려가 본적이 있고 거기서 송화강의 줄기인 통천하(通天河)를 따라 장백 폭포까지, 그리고 다시 백두산 온천까지 내려온 적이 있는 데다가 온천 주차장에서 장백 폭포를 지나 천지 못 가에까지도 수십 번을 등반한 경험이 있다.

지어는 해발 1,700미터의 갈림길(정상과 폭포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 입구로부터 해발 2,680미터의 천문봉까지도 눈길을 여러 번 등반해 본적이 있다. 그것은 온천으로부터 해발 2,000미터 이상 되는 백두산에서 누구나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관광 성수기 때에는 이틀에 한 번씩 천지 못 가에까지 등반했었고 그런 백두산의 등반도 나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였으니 칠보산의 등반과 비교해 볼 때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였다. 말하자면 칠보산은 등반이 쉬운 산이라고 할 수 있는 거다.

백두산은 험준한 지세로 유명하다면 칠보산은 수려한 경치로 유명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점심식사가 끝난 후 오락 한마당을 펼쳤지만 조선 노래만 부르는 마당이 재미가 슬 해서 오래 놀지 않고 해칠보로 갔다.  

해안선을 따라 험준한 산들로 이루어진 해칠보도 경치는 역시 아름다웠다. 이날 무지개 모양의 바위 밑에서 알방게 잡이도 하고 조개를 구워 먹기도 하면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무지개 바위 주변에는 볼만한 경치가 더 있었지만 이미 지쳐버린 우리는 찬 바다 바람에 견딜 수 없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이날 칠보산에 관광을 간 팀은 학생 팀을 내 놓고는 우리 일행뿐인 것 같았다.

가없이 푸른 가을 하늘아래 바다를 옆에 낀 칠보산이 안개가 없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주어서 구경을 너무 잘 했을 뿐더러 생각지도 않게 색동저고리의 유래를 알게 되고 조선 관광지의 현황을 알게 되었다.  

호텔 방 값이나 식사는 별로 비싼 편은 아니었지만 전부 외화를 받고 있었고 91년에 내가 백두산 가이드를 시작할 때의 백두산 관광 시설보다는 더없이 좋아 보였을 뿐더러 칠보산이라는 관광지 자체가 거대한 흡인력이 있었다.

다만 물과 전기 그리고 관광차와 도로가 문제될 뿐이었다. TV에서 많이 보아왔던 금강산이나 묘향산보다는 모든 시설이 못해 보이기도 했지만 관광지로서의 칠보산 자체가 이 두 명산보다 짝 지지 않는 일면도 더러 있다고 생각되었다.

어찌 보면 백두산, 구월산과 함께 조선의 5대 명산으로 길이 자랑할만한 명산으로 단연 첫 자리에 놓일 수도 있는 전망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내가 가이드 노릇하면서 중국의 명산을 수태 돌아 다녔고 백두산을 내놓고 조선의 명산을 처음 가보는 것이었지만 첫 인상에 벌써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그 무엇에 잡힐 수 있는 신비감에 매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광지라는 게 첫째로 중요한 게 신비감이다. 그 신비감이 흡인력을 산생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감이 단 한번의 관광으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칠보산의 매력은 나 한 사람만이 아닌 우리 팀 전체가 느끼고 있었고 다들 기회를 한 번 더 잡아 다시 와볼 계획을 벌써부터 세우고 있었다.  

칠보산에 가보자!  

지금은 외롭고 고독한 칠보산이지만 이 나라 3천리 금수강산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다 발자국을 찍어놓을 수 있는 그 날이 오며는, 정녕 그 날이 오며는 칠보산은 결코 외롭지 않으리라.

멀지 않은 앞날에 우리 동포들이 다 모여서 축제를 하는 장소로,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여러 가지 피부색의 사람들로 꽃 바다와 인산인해를 이루어 세계적인 명산으로 널리 알려 지리라.  

백두산에 거의 백 번을 다니면서도 흥분이라는 걸 느껴보지 못했고 북경에서도 만리장성과 같은 명물들을 수없이 보아 왔지만 오늘같이 흥분해 본 적은 결코 없었다. 대자연이 마련해준 은혜스런 칠보산이 진정 명산중의 명산으로 손꼽을 수 있게 되는 날이 무작정 기다려지게 되었다.  

김삿갓이 여기 칠보산에 다녀갔더라면? 과연 어떤 명필이 나왔을까? 남들이 다 자는 깊은 밤에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새벽녘이 될 때에야 잠깐 자고 나서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났다.  

잇스즈 기사는 이미 기상했고 차에 싣고 왔던 디젤을 탱크에 넣고 있었다. 싣고 왔던 먹거리들은 거의 다 먹어버린 뒤라 포장 박스들도 다 청소해낸 뒤여서 차안은 깨끗해져 있었다.

펑크난 타이어를 손질할 수 없는 것이 큰 걱정이다. 아침 식사를 끝낸 후에 식당 뒤 울안에 있던 덤프 트럭이 끌어 주어서야 시동이 걸렸다. 조선 차들은 거의 다가 배터리가 안 좋았는데 저질 오일을 계속 쓰고 있어 디젤차의 경우에 날씨가 조금만 차도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나진에서 휘발유 엔진 장착의 차에서도 많이 보아 왔던 현상이다. 디젤차는 시동만 걸리면 배터리 상태가 좋지 않아도 밤 운행이 걱정될 뿐 낮 시간 운행은 무난하다. 다행히 마쯔다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귀로에서 험준한 고갯길이라는 걸 놀랍게 발견했다. 바다 옆의 절벽 옆으로 승용차 두 대가 겨우 비집고 지나 갈만한 폭의 오불꼬불한 비포장 도로를 거의 두시간이나 달려서야 칠보산 범위를 벗어나는 것 같았다. 굽이마다 여러 가지 동물들의 우습깡스러운 석상들을 세워놓은 걸 보는 것이 별 재미였다.  

그런데 우리가 탄 잇스즈는 뒤 바퀴가 또 펑크났다. 어랑에 도착하기 전의 큰 호수 옆에서 펑크난 쪽의 다른 타이어가 또 펑크나서 할 수 없이 두 바퀴를 다 떼어내고 반대쪽의 바퀴 하나를 뜯어 달고 청진 관광 식당까지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청진에 도착하기 전의 스케줄로 잡았던 경성의 온천욕을 어쩔 수 없이 취소하고 오후 세시가 되어 당도한 것이다.

점심식사 시간이 퍽 지난 때라 밥이 없었고 컵 라면으로 대충 에 때우게 되었다. 일제 상품이었는데 내용물이 100그램쯤 되는 듯 했고 가격은 1달러로 비싼 편이었다. 쟈쟈는 혼자서 다섯 개나 먹었다. 우리 식구들은 전부 23개를 먹고 23달러를 지불했었다.  

청진 시내를 벗어난 후 고갯길을 오르기 바로 전에 다른 고장이 생겼다. 잇스즈는 청진에서 출발해서부터 신나게 달리다가도 발동이 자주 꺼졌는데 이제는 아예 시동이 걸리지도 않았다.  

나는 칠보산의 “보지 물”을 담아왔던 음료수 병의 마개를 네 개 깎아서 연유 필터 대신 장착한 파이프 양켠에 넣었고 그것으로 연유 파이프에 에어가 새는 고장을 철저히 제거해버렸다. 내가 작업하는 동안 용철이와 일남이가 연유 탱크에서 비닐 봉투를 끄집어냈는데 그것은 아침에 기사가 부주의로 떨어뜨린 것이 틀림없었다.

연유 탱크 뚜껑이 잃어져 깡통 하나를 한쪽 끝을 떼여버리고 뚜껑 맞잡이로 쓴다는 걸 그때 보아냈다. 마쯔다가 펑크난 세 타이어를 청진 시내에 갖고 가서 수리해 왔는데 벌써 다 맞추어져 있었다.  

원정에서 퇴근 시간에 맞추어 차를 통과시키지 않는 제도에 습관된 우리는 후창에서도 통과시켜 주지 않을 가봐 무척 걱정하게 되었다. 출발한 시간이 오후 다섯시도 넘었고 후창에 도착할 시간이 대략 저녁 8시경으로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후창에 도착할 때까지 다시 차 고장이 없었고 8시가 지났는데도 통과시켜 주어서 아홉시 조금 전에 나진의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식사하는 동안에 식구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가이드를 맡은 두 사람이 실질상 보위부의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관광 도중 일반적인 조선 사람들과 말을 나눈 식구들이 전부 이름을 적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2박 3일간 감시 속에서 여행을 했던 것임을 뒤늦게야 알아차린 것이다.  

여름철에 수출입 지도국의 심리 과장과 채영 지도원이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다 잘 아는 사이었고 채영은 또한 우리 회사의 담당 지도원이어서 거래가 깊은 관계였다. 훈춘에서 점심밥을 먹고 나진까지 내가 동행했는데 로얼이 나진에 전화를 걸어 우리 88호가 원정까지 마중하러 오게 말해 두었었다.

중국 쪽은 차들이 많아 교두에 임의의 시간에 갈 수 있었기에 걱정 없었는데 이상하게 젊은 친구 하나도 계속 붙어 다니고 있었다. 그 친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심리 과장이  

“저 친구가 따라 와서 돈까지 자기가 안고 쓰는 바람에 선물 하나도 사지 못했다!”  

하는 거였다. 나는 대뜸 보위부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날 원정에 대었을 때 88호가 보이지 않았는데 회사에 전화를 해 보았더니 용철이가 마중간 지 오래다고 했다.

선봉 수금소에 전화를 걸어 88호가 보이면 원정으로 되돌려 보내라고 부탁했고 한 시간이 썩 지나서야 88호가 다시 원정에 나타났다. 용철이는 기다리다 못해 오지 않는 줄 알고 되돌아갔고 선봉 수금소에서 머리를 돌려 다시 원정에 온 것이었다.

피곤해 했기에 내가 운전했다. 나진에 도착한 후 다른 사람들은 다 집에까지 태워다 주고 그 젊은 친구만 남았었다. 심리 과장과 채영 지도원은 트렁크 하나뿐이었는데 이 친구는 트렁크 외에도 많은 짐을 갖고 왔다.

그 날 저녁 일곱 집을 찾아갔는데 사온 선물을 일일이 보내 주었던 것이다. 이 친구는 차가 있을 때 한꺼번에 일을 다 해치운 거고 출국 방문의 길에서 동행자들에게 많은 불편을 끼치고 난 뒤 나한테도 추호의 사양도 없이 노고를 끼치고 있었으며 자기 집에 도착한 다음 수고했다는 말도 변변히 해 주지 않아서 원래부터 아니꼽게 보던 나를 더 기분 나쁘게 해 주었었다.

그 선물들은 말치 않아도 여행 경비를 잘라내어 자기만 산 것임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로서 출국 방문단과 마찬가지로 관광팀에도 보위부 소속의 지도원들이 동행하는 조선의 제도를 어느 정도 알 것 같기도 했다.  

뭐가 어떻든 지간에 나는 모처럼 칠보산 관광을 했다는 것으로 더없이 흥분하고 있었다. 갖고 갔던 돈은 1인당 인민폐 300원 정도 되게 썼는데 로따가 다 결제해 주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투자자들의 나진에 대한 공헌을 격려해 주기 위해 인민 위원회에서 조직해 준 관광이었는데 우리는 이번에 칠보산에 가보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관광 효과가 좋으면 명년에 평양 관광도 신청해 주겠다고 부국장이 얘기해 주어서 은근히 명년이 기다려지게 된 것도 그때의 일이다.

길에서 고생했던 일을 생각하면 어련히 포기해야 했지만 어쩐지 평양에 가고 싶은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고 나진을 떠나더라도 평양 관광이 가능하다면 그때는 반드시 일행 속에 끼워 보겠다는 생각을 그 후 오래 동안을 두고 한시도 버린 적이 없었다.  

로따에게 작업실 열쇠를 전부 맡기고 칠보산에 갔다 왔기에 수리소에서는 결국 휴가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공구는 전부 용철이와 내가 관리했기에 열쇠가 없으면 공구가 없어 수리 작업을 할 수가 없다. 이미 단련대에서 나온 광수가 수리공으로 일했는데 로따에게서 열쇠를 받아 가려 하는 걸 주지 않았다고 한다.

도둑이 살판치는 곳이라 종업원들에게마저도 마음놓고 열쇠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로따는 열쇠를 돌려주면서 자기한테 맡기고 간 것이 잘된 일이라며 우리를 칭찬해 주었다.

몇 번 받아 보았는지 손꼽아 헤아려 볼 수 있는 칭찬 중에서 이번 칭찬이 제일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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