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가 나를 알 리 없다.

당연하게도 그리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나는 교실의 맨뒷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그는 그 악명높다는 물리학과 과탑답게 늘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군 했으니까. 사실 우리에겐 접점이라 할만한 것도 없다. 내 시선이 그에게 닿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어릴적부터 숫기가 없었던 나는 주구장창 교우관계가 썩 좋지는 못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사람을 상대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에겐 그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가왔었던 사람들은 말 몇마디에 금방 지쳐 나가떨어졌다. 하긴, 이 세상에 일방적인 소모만을 필요로 하는 관계는 없으니까. 안위 삼으며 살았지만 이제는 솔직히 그다지 괴롭지도 않았다. 습관적으로 혼자 사는 삶에 적응했다. 그래서 이기적이고 재수없다는 얘기, 지겹게도 들었던 것일지 몰랐다. 혹여 누가 높이 쳐준다면 그저 자발적인 아싸 정도. 해가 떴다 지는 과정이 무색하게도 매일이 같은 하루였다. 웃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니였으니 괜찮았다. 

그런 내가 어둠이라면 그는 빛쯤될까. 어쩌면 더 큰 격차였을지 몰랐지만 그것 이외엔 따로 비유할만한 것도 없으니 이쯤에서 줄일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과 필요 이상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그의 옆에 섞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친구들이 저렇게 많으면 가끔은 한두명쯤 이름을 잊어버리기도 하는게 아닐까,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뜩 강의실 칠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의 풀이식들을 보며 깨달았다. 아, 저렇게 똑똑하니까 절대 그럴 일은 없겠구나, 하고.  

그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웃는 낯에 어딘가 뒤가 구려보이는 쎄한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저 판단과 생각에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행동하는 꽉 막힌 사람인 것 같아보이긴 했다. 순수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는, 깊고 곧은 신념을 가진 사람. 무언가를 집중적으로 파는 사람들은 그랬다. 어딘가 타인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순수한 열정을 가진 눈동자로 모두를 압도하기도 했다. 고집이 세다거나 융통성이 아예 없는 사람같지는 않은데 자기가 하는 일에는 예외를 두는 것 같은 사람. 백지에 적혀진 활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생각이 많은 탓이다. 앞머리가 너무 길어져 곧 있으면 눈을 찌를 것 같았다. 늘 찾던 미용실은 경영난으로 얼마전에 문을 닫았다. 유리문에 걸린 팻말을 보고나서 받은 충격이 잊히지 않았다. 다섯살때 이사한 이후로 늘 두달에 한번쯤은 들렸던 곳이었다. 좋지는 않은 시설이었어도 익숙했는데. 머리를 다른 미용실에 맡기려니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기분이라 그것도 할 수 없어 이대로 두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미용실에 들려야 할 것 같았다. 뿌리염색을 오랜 기간 하지 않았더니 원래 머리색이 올라오는 폼이 여간 못난 것이 못되었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고개를 드니 벌써 진도는 서른장 이상이 넘어가 있었다. 머리를 좌우로 붕붕 저었다. 듣는다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들어두지 않으니 마음이 영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번 시험도 망하면 말그대로 유급인데. 걱정이 되긴 했지만 아무렴 어떨까 싶었다. 전공을 쉽게 선택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교수님, 이때 면의 방향은 면에 수직한 방향을 말하는건가요?

목소리가 흘러나온 곳을 바라보니 역시 뻣뻣할 만큼 곧은 정자세다. 필기구 하나 들지 않고 오로지 눈으로만 담는 강의. 그이기에 가능한 공부법. 교수가 설명하는 단어들을 띄엄띄엄 걸러들었다. 선전하, 전기장, 가우스 폐곡면. 두꺼운 전공서적을 치우고 아래에 깔려있던 고전소설을 꺼냈다. 영어로 된 원서를 다 읽으려면 몇달이고 걸릴테지만 아무리 잘 된 번역이라 해도 빈틈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모든 문장을 단어 하나하나로 쪼개서 모조리 다 읽어내려 드는 내 성격을 맞추려면 원서가 꼭 필요했다. 좋은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의 구성이 촘촘하게 짜여있어 독자를 숨 쉴틈 없이 휘몰아쳐야 한다. 등장하는 인물도, 그 인물들이 살아가는 환경도, 그 환경속에서 만들어가는 관계도, 심지어 일어나는 일들조차 연관성을 가진다. 하지만 현실 속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마주치는 곳곳이 빈틈투성이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빈틈을 군데군데 가지고 있고. 빈틈, 입속으로 그 단어를 조용히 굴려본다. 여전히 교수가 내놓은 결론에 반박하고 있는 그가 시야사이로 들어왔다. 

-아, 제 실수였습니다. 이쪽은 지우고 다시 풀게요.

끝내 교수와의 입씨름에서 이긴 모양이었다. 가끔은 그냥 넘어갈 법도 하건만 그는 늘 저런 식으로 빡빡하게 굴었다.

그에게도 빈틈이란 것이 있을까. 끝없는 직선을 따라 걸으며 살아왔을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그건 다리조차 꼬지 않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나기까지는 아직 40여분이 남아있었다. 쉬고 있던 손으로 펜을 들어 글자들을 훑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오래된 책내음이 좋았다.

암막커튼을채여미지못한창문에서뻗어나온, 오후의 해빛 한줄기가 그가 쓴 공식들을 지워가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빈틈이었다.   

과회식자리에 처음 참석한 날, 난 모든 이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아야 했다. 이토록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 아이들의 중앙. 눈에 띄는 자리에 앉은 그가 보였다. 그리 가벼운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농담도 제법 잘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도 아이들은 술렁이며 박수를 치고 그를 추앙했다. 그리고 문뜩, 나는 어쩌면 내 착각이라는 생각마저도 했다.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굳이 테이블의 테두리 끝에 앉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시선까지 옮겨가며 나를 바라봤다. 지금 몇시냐, 를 물어보듯 소란스럽지 않은 투로 시를 쓰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머리속에서 문장이 채 조합되기도 전에 멍청한 탄사가 섣불리 튀어나갔다. 물리를 전공하는 사람 치고는 말을 유려하게 하는 편이었지만 난 한마디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괴로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져가는 뻔한 일은 없었다. 내게 말을 건 순간 쥐죽은듯 조용해졌던 분위기는 또 다시 그의 말한마디에 의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술은 한잔도 채 들이키지 않았는데, 목구멍이 뜨겁고 뱃속이 뒤틀렸다. 모두가 그의 손가락에 의해 조종당하고 움직이는 인형들 같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웃고, 활기차지고, 즐거워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언가가 내 속에서 무너진 기분이었다. 내가 그렇게나 외면하던 것을 정면에서 마주치게 해놓고. 날 이 곳의 모든 이들에게 타의적으로 소개시킨 그는, 어느새 웃고있는 아이들 속에 다시 뒤섞여 있었다. 담배생각이 절실해져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아이들의 시선은 나에게 닿았다 이내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아마 한번쯤은 고개를 들지 않았을까. 

난 그 이후로도 혹여나 그가 말을 걸진 않을까, 베껴두었던 글들을 찾아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도 그 말이 신기루라도 되는 것인양 굴군했다. 사실 실망이라 할 것도 없었다. 그저 그정도사이였던게다. 나 혼자 마음을 쓰는 일 또한 우스웠다. 여전히 바뀐 것이라곤 없었다. 그는여전히긴 속눈썹으로 어려운 말들이 빼곡히 적힌 전공책을 훑었고, 수업이 끝나면 가장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훑다 가방을 챙겼고. 학점은 당연히 밑바닥이었다. 이렇게 엉망인 학점으로는 팀플을 해도 조원들한테 민폐밖에는 되지 않았다. 교수는 조를 임의로 묶어주지 않았다. ‘팀플의끝은두가지뿐: 적을 만드는 것, 혹은 원수를 만드는 것’이라는 아이들의 제의를 고려한 결과였다. 그리고 뻔한 결과. 나와 함께 팀을 하려는 이는 없었다. 팀 별로 앉은 아이들 틈에 홀로 서있으니 성격이 모나지 않은 교수는 난처한 얼굴로 안경만을 매만질 뿐이었다. 아이들의 시선은 나에게 닿지 않았다. 고작 말 한마디 걸어줬다고. 잊고 있었나보네, 병신같이. 자조적인 헛웃음이 튀어나갔다. 그렇지, 이 강의실에서는 나만이 이방인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교수님.

익숙한 목소리.  시야에 채 담기지 않는 곳에서, 손을 드는 그가 보였다. 바른 자세로, 흐트러지지 않은 손짓으로,

-저도 조원이 없는데요.

그렇게 같은 조가 됐어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남한테 기대지 않는 성격이었을지도 몰랐다. 자료조사, 피피티, 그리고 발표까지. 혼자서도 척척 해낸 그였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친절은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별 수 없었다. 프린트 첫부분에 그의 이름과 나란히 적혀진 내 이름이 이질적이었다. 한 것도 없는데. 착한 것인지, 무딘 것인지. 함께 적어준 이름 덕분에 조별과제 점수는 에이플이었다. 이쯤되면 망친 중간고사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가방을 정리하고는 함께 밥을 먹자는 아이들을 물리고 강의실밖으로 나가는 그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멈춰선 그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형식적인 감사인사 같은 입에 발린 소리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아이들의 따가운 눈길은 여전히 익숙치 않았다. 다들 알겠지, 같은 조라 득 본거. 곱지 않은 시선을 간신히 피하며 그를 교실밖으로 이끌었다. 

-고마워.

그리고 건넨 볼품없는 한마디.

-괜찮아.

다행이도 그는 예상대로 친절이 몸에 배여있는 사람이었다. 답을 한 그는 더이상 볼 일 없다는듯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저렇게 깔끔한 성격이라 다들 좋아하는건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들려오는 벨소리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알바로 일하는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늘어나는 초과근무는 힘들었지만 좋아하는 일이라 그나마 버틸만했다. 출근 첫날에는 물리학과를 다닌다는 내 말에 잔뜩 불신의 눈길을 보내더니 이젠 믿을만한 모양이었다.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출판사의 특성상 직원을 많이 둘 수는 없었다. 편집장도 직함에 어울리지 않는 일들까지 떠맡다보니 그동안 힘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학교에서 택시로는 10분거리. 가끔은 걷기도 했지만 오늘은 그리 걷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수고했어요.

사무실에 들어서서부터 내리 일만을 했더니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벌써 다섯시간은 훌쩍 지나있는 시계에 미간을 찌푸렸더니 미안한 표정을 하는 편집장이었다.

-오늘 수당은 꼭 챙겨줄게요.

본인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초과근무수당을 무슨 수로 나에게 준다는 말인가. 문학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은 편집장은 심성이 너무 여렸다. 스스로를 글이나 사고파는 장사꾼이라 지칭했지만 그 말에서는 씁쓸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답을 찾지 못한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체했다. 잘가라는 말과 함께 다시 자리에 앉은 편집장은 이어질 미팅을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편집장님.

-네?

근무에 관련된 질문이나 답 이외에는 말을 아끼던 내가 건넨 말에 당황한 듯, 조금은 높은 음으로 되물은 편집장의 말이 이어졌다.

-시도…쓰신다고 하셨죠?

-네…뭐 가끔요. 요즘은 바빠서 손 놓은지 꽤 됐어요.

-혹시, 시 쓰는거, 부럽다고 하는 말 들어보신적 있으세요?

음…손에 들고 있던 원고를 내려놓고 곰곰히 생각하더니, 결국에는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한번 숙였다 올렸다. 그리고는 출입구로 향하는데 뒤에서 편집장이 한마디 덧붙인다.

-그런데 그런 얘기, 한번 들어보고 싶긴 하네요. 

그럼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아보이잖아요. 뒷말은 흘리듯 삼키고는 다시 원고에로 시선을 옮긴다. 한번쯤 들어보고 싶다고? 흔한 휴대전화 부속품 하나 못만드는 시가 뭐라고. 죽어가는 사람 한명 더 살리지도 못하는 그깟 시가 뭐 대수라고. 추잡한 꼼수가 넘쳐나는 썪어빠진 사람들이 쓰는 아름다운 비수가 다 뭔데. 둔한 몸짓으로 이어폰을 꺼내고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붕붕 저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은 눈물이 났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시를 쓰는 나도, 참 어지간히 답없다 싶었다.   

오후강의는 언제나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대강당을 가득 채운 뉘엿뉘엿 지는 오후해가 그의 머리카락에도 닿아있었다. 검은색의 결 좋은 머리카락 틈틈히 해로 인해 만들어진 빈틈이 보였다. 절로 나오는 하품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교수의 강의내용을 타이핑해넣었다. 교양과목은 왜이리도 재미없는걸 선택하는지. 히스테릭한 교수와 루즈한 수업진행까지.  성적은  F도  준다면서 관련서적조차 찾을 수 없는 강의자료는 넘기지 않겠단다. 인생을 사는데 쓰일 일이 조금도 없을 것 같은 참 추상적인 학문이었다. 그래도 있는 정신력 없는 정신력 다 끌어와서 듣고 있는건 단순히 정말 유급만을 피하기 위해서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자리에 엎드린 아이들이 절반 이상을 넘어가고 있었다. 늦가을은 정말 사람을 감성적으로 변하게 한다는 말이 맞긴 하나보다. 모든 아이들이 졸고 있을때에도 곧게 펴져있던 그 어깨가 아주 조금, 조금은 버거워 보이게 했으니까.

그리고 그날 역시도, 접점따위 없는 또 다른 하루. 슬리퍼를 신어서인지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 곧눈이 내릴 것처럼 하얗던 하늘.

집으로 가는 첫번째 골목에서 비틀거리는 그가 다가왔다. 백팩끈을 꾹 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이런 조우는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난 시에서나 쓸 법한 말을, 기억도 나지 않는 말을 먼저 건넸고.그는 아주 작게 웃었다. 소리내어 웃었다. 해빛사이로 흩날리는 눈꽃과는 같은 작은 웃음이었다.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었어야만 눈치챌 수 있는.

-너 등단했다며.

그 눈빛이 왜 그리도 찼는지. 나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말.

-응.

망설이다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의 얼굴이 내어깨로 기대져왔다. 반동에 의해 후들거리는 다리를곧게 세우기 위해 애를 썼다.

-너같은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해줘?

흰셔츠가 적셔지고 있었다. 무엇이 그에게 이토록이나 짙은 술냄새가 배이게 했을까.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입은 검은 정장에서 나는 싸구려 향수냄새가. 아니라면 이렇게 무스로 고정시킨 앞머리가. 또는 그의 눈가에 고여있는 슬픔이. 그것도 아니라면.

-…미안해.

내말에 그가 다시 웃었다. 그것에 아주 작은 바람이 일었다.

-괜찮아.

나조차 무엇이 미안했던 것인지를 모르겠는데,  그는 도대체 뭐가 괜찮다고 하고있는걸까.

그것도 저렇게나 암울한 표정으로.

-수,수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지 않는 그.

적요한 계절이었다. 

이윽고 툭 떨어지는 지갑이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떨어진 지갑속에 있던 사진은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기사속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인물이니 알 만도 한 이였다. 꽤나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

-떠올리지 않는다고 해서 잊는 건 아니더라고.

내가 바라본 그는 처음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답을 찾지 못할때 너는 이런 얼굴을 할까. 너조차도 모르는 문제는 어떤 것일까.

-물리학과에라도 오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식 하나쯤은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없더라도 내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됐어.

후련해야 하는데. 홀가분해져야 하는데. 나 이제 그 지긋지긋한 공부 안해도 되는데. 무섭도록 추락하는 사람을 보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빈틈. 그에게도 빈틈은 있었다. 그 역시도 자기가 주인공으로 있는 소설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빈틈을 가진 인간. 내가 소설속에서나 읽던 인물들 같은건 없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은 되지 못했다.

나는 내가 감정적이고 예민한 것이 계절 탓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은 역시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역시도. 그는 다시 돌아온 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더이상 다닐 필요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학교에는 또 다른 그가 나타났다. 빈틈따위 없어보이는, 그보다 훨씬 완벽한 그가. 

곧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은 말투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 그는, 여인의 장례식장에서는 아주 덤덤한 얼굴을 했다. 내가 늘 보던 표정이었고 다른 아이들도 늘 보던 표정이었다. 여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집 거실에서 떨어진 샹들리에에 의해 죽었다고 했다. 사인은 과다출혈이었다. 그는 어떨까. 그도 샹들리에 아래에서 사는 것은 겁이 날까. 또 다른 그는. 또 또 다른 그는.

하지만 그 앞에 있었던,

그의 얼굴을 보고있던,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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