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DEEP

눈 앞의 이젤을 당장이라도 치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나 염원하던, 손가락이 다 어긋나도록 담고싶었던 그림은 이제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그려낼수 있었다. 그럼에도 난 처절하게 병들어야 했다. 그는 겨우 고작이라는 말로 내 상실감을 갈무리하려 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질리 없다. 난폭한 감정이 상식을 밀어내고 누구보다 빠르게 이성을 차지했다. 안타까운 눈을 한 그에게 거친 말을 서슴치 않으며 당장 작업실에서 나가라 소리쳤다. 지금은 누군가를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잠자코 서있던 그는 결국 작은 한숨을 내쉰다.

"동혁아, 네가 진짜 화가였다면, 지금도 온전한 비너스를 그릴 수 있어야 하는거잖아."

그는 그렇게 말을 끝냈고, 나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그를 향해 시계를 내던졌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십년이 넘도록 손목을 채우던 시계는 벽에 걸린 그림에 맞고서야 바닥으로 떨어졌다. 근사한 인물화의 찢어진 부분을 통해 보이는 벽을 형형하게 노려본다. 이미 망가져버린 시계에 시선을 옮기던 그는 그제서야 발길을 돌려 출입구로 향했다.

그는 철저히 조롱했다.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날. 더이상 붓을 잡지 못하는 날.

“시발!”

책상위에 있던 온갖 것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미 밑바닥인줄 알았는데, 이보다 더한 밑바닥도 있을거란 생각이 들자 오히려 초연해지는 것도 같았다. 수용의 한계를 넘어선 분노가 소용돌이를 만들며 노도怒涛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비로소,
손가락을 잃은 수재의 몰락이었다.

**

"나가."

곧게 뻗은 어깨, 그리고 해빛아래에서 더욱 반짝이는 왼쪽 귀의 피어싱.

"할 수 있는걸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목에 잔뜩 힘을 준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도록 담담하게 들렸다. 그에 나는 들고있던 리모컨을 조금은 거칠게 내려놓아야 했다.

"짜증나."

사내인 주제에 예민한 여자아이같은 말이 툭하고 튀어나간다. 아무렇게나 골라왔을 법한 꽃을 꽃병에 옮겨담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넌 여전히 잔인해."

그에 꽃을 다듬던 손길이 느려진다. 이내 어깨를 으쓱인 그가 말을 이었다.

"잔인한게 아니야. 흔들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 하는거잖아, 나."
"그 최선이란 것도 결국엔 자의식에 불과한거지?"
"그렇게 따지면 거의 자의식과잉 수준에 가깝겠지."

아무 일도 없는 척 하는건 여전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끔찍한 영화이길 바라는 것인지도 몰랐다.

"너랑 상대할 기분 아니야."

뾰족한 말을 내뱉고는 냉장고문을 열어 젖혔다. 찬 기운이 피부를 덮는다. 뜨겁게 달구어졌던 머리가 식어내리는 기분이 좋았다. 맥주캔을 꺼내 글라스에 따랐다. 조금은 급한 손길에 하얀 거품이 컵을 가득 채운다. 입술에 번지는 기포가 소란스러웠다. 오른쪽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길게 자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난… 네가 괜찮아 졌으면 좋겠어."

망설이던 끝에 내놓은 답이라기엔 지나치게 무책임했다. 긴 호선을 그으며 날아간 유리잔이 벽에 부딪쳐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으으… 내내 억눌려있던 울음이 터져나오자 기괴한 목소리가 목을 긁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힘겹게 들어 목에 갖다대었다. 푸른 혈관이 부러지기 직전의 나무가지처럼 손등을 얽고있었다. 그는 더이상 말이 없다.

"내 슬픔을 확인하는 걸로 위안받지 마."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 기분따위 안중에도 없으면서.

**

꿈을 꿨다.
그리고 꽤 길었던 잠에서 깼을땐 얇은 티셔츠가 온통 땀으로 젖어있었다.
배경은 건물의 한쪽 면을 가득 채운 벚꽃이 핀 화사한 봄. 꿈속에서의 그는 산뜻한 분홍색 니트 차림이었다. 그리고 난 그에 잔뜩 장난끼가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고.

"구려,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응?"

순수한 의문의 투로 말을 건넨 그에게 난 맨투맨위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건넸고, 그는 곧 그것을 받아쥐고는 멍청한 표정을 했다.

"입으라고, 패션의 완성은 재킷인거 모르냐."

아아, 내 말에 수긍하며 작은 옷을 꾸역꾸역 껴입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꺾고는 반문한다.

"그럼 넌?"
"난 얼굴."
"그런건 생각으로만 하라고, 좀."

옆에서 스프레이통을 일렬로 세우던 치수가 질색을 하며 스프레이 하나를 던진다.

"아!"

정확히 발목을 강타한 스프레이에 인상이 구겨졌다. 짐짓 정색하는 표정을 지으니 치수의 표정이 한층 더 발랄해진다. 저걸 그냥.

"한치수, 아프잖아."
"한치이수우~ 에프줴나~ "

부러 말꼬리를 늘이는 치수를 보며 옆에 서있는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턱짓으로 치수를 가리켰다.

"쟤 저거 시비 맞지."
"아니라고는 말을 못하겠네."
"저 놈 잡아."

하오의 열기가 땅을 지독하게 내리쬐고, 해의 호흡이 등으로 여과없이 쏟아졌다.
나는 웃었고, 그가 따라 웃었다.
그리고 치수도 웃었던 것, 갑자기 머리가 띵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뇌세포 하나하나를 쥐어짜듯이 끼치는 격렬한 두통에 정신이 희미해졌다.

하얀 벽을 채운 벽화가 잘게 부서지고, 웃음소리가 탁하게 흐려졌다. 이내 배경은 비오는 밤이 되었다. 그 해의 여름엔, 그것도 끝자락에 가까운 모하에, 장마는 왜 그렇게나 길게 이어졌던지. 나를 스치는 모든 일은 태연하게 지나쳐가질 못했다. 언제나 남들보다도 버겁고 무거운 흔적을 남겼다.

신호등 저 편엔 밤까지 영업하는 학원이 있었고, 몸이 중력을 잃은 듯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꿈이 아니었다. 다리를 움직일수 있다고 안도한 사이, 숨막히는 격통이 찾아왔다. 생경한 감각으로 파고드는 괴로움이 이 상황이 현실임을 증명했다. 백팩에 넣어뒀던 스케치북이 찢겨지고 깔끔하게 틴케이스에 정리해 두었던 고체물감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졌다. 붉은색 물감이 바래어져 가는 곳이 하얀 도화지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까지 드로잉을 마쳐야 했다. 수업시작은 겨우 삼분남짓을 남겨두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지만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거미줄처럼 엉켜있던 기억이 문뜩 드문드문 끊겨지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나를 에워싼 사람들이 보였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땐 흔들리는 차안이었다. 호흡기가 갑갑했다. 그것을 떼내려 손을 들어도 힘이 빠져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숨을 쉴때마다 고통이 엄습했다. 그 밤에 선명하던건 오직 빗길, 범퍼, 차에 탄 사람에게서 나던 위스키 냄새뿐.

배경은 다시 벽화로 돌아와 있었지만 날 부르는 치수의 목소리는 점점 아득하게 멀어졌다. 이미 완성된 화려한 벽화에 검은 스프레이로 중학생들도 하지 않을 법한 욕설을 써넣었다. 가슴께가 답답했다. 돌풍처럼 휩쓰는 기억의 편린들 사이로 사람들의 얼굴과 건물, 그리고 나무같은 것이 선명해졌다가 다시 뿌옇게 흐려졌다. 완전히 짓눌려진 오른손이 시야에 잡혔다 곧 초점을 잃었다. 시끄러운 소리들과 함께 어둠이 덮쳐오고 있었다.

**

"쏟아지는 유학제의 다 거절하고 남은 이유가 뭐야? 이런 입시미술보단 그 편이 훨씬 낫잖아."

책상위에는 고흐의 환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일면을 차지한 신문이 있었고, 그 옆에 함께 게재된 사진에는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냥. 난 입시가 체질인거 같더라고."
"노예체질이네."

실없는 말로 거짓일것이 뻔한 그 말에 대답했다. 머리가 멍해졌다. 잠을 깨고 싶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꽤나 오래 쓰지 못한 목도 함께 가다듬어야 했다.

"나 졸려."

물론 그리하면서까지 뱉어낸 말치곤 그리 생산적이지 않았지만. 내 말에 안도인건지,경멸인건지 도저히 알수가 없는 그의 시선이 함께 따라붙었다.

"커피 좀 그만 마셔."
"사실은 잠들면 이상한걸 봐."
"너."

잠깐만. 무언갈 더 덧붙이려고 하는 그를 막으며 말을 이었다.

"흙으로 만든 성같은건데, 흐릿하게 보이긴 했어도 충분히 어두웠어."

잠에 취한듯 나른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귀를 적시고도 턱을 타고내리는 그 부드러움은 간만의 것이었다. 겨울치곤 따뜻한 실내의 온도가 얼굴에 닿는다. 힘없는 몸이 자연스럽게 책상위로 쓰러져 내렸다. 종이에 스친 손가락이 그새 베이기라도 한건지 따끔함에 어깨가 전율하고 있었다. 탁하게 입에서 빠져나간 한숨이 공기에 섞여 다시 페를 가득 채웠다.

"흐릿하게 보인다며, 어떻게 명암을 단정할수 있어?"
"내가 떨어져."

그가 주머니에 넣은 손이 건반을 치듯 움직였다. 초조할때마다 나오는 습관이었다.

"내가 떨어지니까, 거의 확실해."

조금은 자조적인 것에 가까운 헛웃음이 튀어나갔다.

"그런데."

제한된 시야에서 모호하게 보이는 그의 운동화를 직시했다.

"그게,"
"…"

점멸.

"…"
"널 닮았어."

이윽고 암전.

**

"긴 꿈을 꿨어."
"악몽이었어?"
"아니, 그릴 그림이 생겨서 기뻤어."
"다행이네."
"그런데 손 대기도 전에 부서졌어, 잔해가 됐지."
"그래도 숨 쉴순 있는거지?"
"꿈속의 나는 나만큼 비참하지 않았으니까."

그의 손을 뿌리쳤다. 핏물이 후두둑 카펫에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암담해, 죽고 싶어."
"죽을 용기로 살아가."
"살아내는게 더 무서울땐 어떻게 해야 해?"
"차라리 불행을 상품이라고 생각하고 소비하는게 나을지도."
"사실은 무서워."

손이 아파.
그렇게 말하며 울었다.

그는 언제나 나에게만 통하는 폭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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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번 편은 물리천재이고 이번 편은 천재화가. 이런 유형의 캐릭터가 계속 등장한건 우연인가요? ^^ 읽으면서 뭔가 의식의 흐름대로 가는듯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마지막, ‘불행을 상품이라 생각하고 소비한다’는 구절 자꾸 생각이 납니다. 글에서 젊은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1. 의식하고 쓴 건 아닌데, 듣고 보니 그러네요 ㅎㅎㅎ 아무래도 여러 분야에서 가장 특징적인 인물들을 설정하다보니 천재캐릭터를 중심으로 글을 이끌어나가게 된 것 같아요 ^ ^ 주인공에게는 어쩌면 불행에 값을 매기는게 위로가 될 수 있겠단 생각도 했네요 ㅎㅎ 부족한 점은 채워나가며 지금에만 쓸 수 있는 글 써나갈게요 ~ 댓글 넘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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