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서 뿌옇게 흙먼지가 일었다. 거세게 밀려오리라 생각했던 고통은 예상보다도 훨씬 작았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다리를 추스리고 일어서려는데 정강이뼈에 여럿의 거친 발길들이 닿는다. 성한데 없는 얼굴 피부에 닿는 바닥의 느낌이 까슬했다. 주먹을 꽉 쥔 훈이 부어오른 눈을 꾸역꾸역 뜨며 깜빡이는 창고의 백열전등을 올려다본다.

– 하…

갈비뼈께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에 훈의 어깨가 들썩여지며 웃음을 토해낸다. 훈의 간헐적인 숨소리를 따라 온 몸의 구석구석이 불규칙적으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 …어

오래 쓰지 못한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제 팔에 닿은 빛 한줄기를 내려다보는 훈의 행동이 굼떴다. 분명 빈틈없이 밀폐된 공간이었음에도 어느 틈새론가 빛의 조각이 흘러들고 있었다. 빛은 언제나 희망을 가지게 했고, 그 희망을 손에 잡으면 다시금 암울한 절망을 가져다줬다. 그리고 헛된 욕심보다도 더 큰 어둠을 선사했다. 지금 훈의 등 뒤로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는 지폐들이 곧 그것을 여실히 증명했다.  

한참을 바르작대다 곧 몸에 힘을 푼 훈이 손에 쥔 패를 펼친다. 화려한 도안위로 번진 붉은 것이 갈색으로 서서히 응고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한참이나 지났을 것이다.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 죽을만큼 달렸다면 택시가 나오는 길목까지는 다달았을 시각.  

그럼 이쯤이면 되었다. 더이상 잃은 것이 없는 훈의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 훈아, 그 패 끗수가 0이야. 망통이라고.  

축축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자 점멸하는 빛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길게 늘어진 핏줄기가 서늘했다. 비릿한 맛이 입 안 가득 돈다.  

– 망통…  

훈의 목소리가 빈 공간에 낮게 울렸다. 이윽고 손에 쥔 패를 더듬던 훈의 왼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그에 공산 옆으로 순식간에 나타나는 사쿠라. 암행어사가 온대도 잡히지 않는 38광땡.

– 난 안버려요.

해보다도 뜨겁고 붉은 화염이 번졌다. 훈은 결국 끝까지 다이를 외치지 않았다.

가까스로 소년

A.

공장의 점심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끊임없이 이는 기계들의 인위적인 소음속에서도 사람들은 잠을 달게도 잤다. 쓰러지듯 누운 그들의 작업복에서는 아마 평생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기름냄새가 배어있을 것이었다. 언제 사고가 일어나도 이상할법하지 않은 공장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몸과 정신을 모두 병들게 했다. 변변치 않은 식사를 하고, 매일 열다섯시간을 넘기는 고강도의 반복작업은 원체 무던한 성격을 가진 이도 예민해지게 만들군 했으니까.
그러나 그속에서도 훈은 달랐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입가에서 웃음을 떠나보내지 않는 그에게 순이가 했던 평은 고작 한단어에 불과했다.

– 팔푼이.

그리고 그에 훈은 순이에게 활짝 웃으며 넌 글씨도 예쁘게 쓴다, 라는 말로 답했다. 그런 그의 말을 증명해주듯 순이의 성격과는 다른 둥글둥글한 글씨체가 정갈했다. 순이에게는 여전히 미싱기보다는 연필이 훨씬 더 잘어울렸다.

쪽잠이라도 자두려고 밥을 5분내로 비우는 여타의 사람들과는 상반되게도 순이는 언제나 짬을 내 이렇게 일기를 썼다. 노란 종이 위로 끝이 이미 뭉퉁해진 연필이 지나가며 타이어자국과도 같은 흑연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훈은 밀려오는 하품을 손바닥으로 막고는 아예 자리를 옮겨 일기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낮지만 얇은 목소리.  

– 저리가.

제 일기장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건지 순이가 고개를 돌린다. 순이의 눈동자처럼 까만 흑발이 해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날카로운 말에 민망할 법도 하건만 훈은 늘 그랬듯 입술을 시원스레 끌어올려 순이에게 멋드러지게 웃어보인다.

– 내용이 재밌어 보이길래.
– 글도 모름서.

글을 배웠다는 것은 결코 남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과 동등하지는 않았다. 순이는 여과없이 뱉어진 말에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다행이도 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아까보다도 훨씬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속도 없이 글을 가르쳐달라며 이 단어 저 단어 제 마음대로 짚고 발음하는 훈은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했다.

– 순아, 이 구절은 어떻게 읽어?
– 그건 왜.

퉁명스레 대꾸하는 순이에게 훈은 매 페이지에마다 이 구절을 쓰길래… 라고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에 순이의 눈시울이 좁혀진다.  

– 남 사생활에 함부로 간섭하는거 아니야.

미간을 구긴 순이의 얼굴이 화가 난 것처럼 보인 것인지 훈은 웃음을 지우고 사과를 했다. 의도한건 아니였노라고. 하지만 순이는 여전히 답을 해주지 않고 훈이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만 나열할 뿐이었다.  

– 집합!

멀리서 다시 일에 복귀할 것을 알리는 작업반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모두 피곤에 짓눌린 얼굴로 제자리에 돌아갔다. 순이는 아쉬운 기색으로 책을 덮고는 연필을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훈도 바지를 털고 일어서려던 그때, 순이의 낮은 음성이 다시 한번 들린다.

– …이 젊은이는 피라미처럼 슬프구나

혼잣말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훈이 고개를 들고 확인하려 했지만 순이는 이미 저만치에 간 뒤였다. 손에 든 일기장을 귀한 물건 다루듯 하며 작업장 한구석에 숨긴 순이가 이내 급하게 뛰어 미싱기 앞에 선다. 순이의 얼굴은 시종일관 무표정에 가까웠다.
고된 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기계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뛰어 생산라인에 선 훈은 저가 순이에게 물은 구절의 글자수를 되짚는다.
정확히 열네자였다.

B.

매일과 같이 일을 해도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얼마 없었다. 심지어는 그마저도 마음껏 쓰지 못하는 이들이 절반을 넘었다. 자라나는 청춘들은 모두 비참함과 괴로움을 먹으며 어른이 되어갔다. 그리고 순이도 예외는 되지 못했다. 누가 다가설라 치면 불편한 기색을 전혀 숨기지 못하는 순이. 본래 예민하게 태어난 이처럼 조금 초조해보이는 눈빛과, 말의 뒤끝이 느슨하게 가라앉는 울음을 머금은듯한 목소리를 부여받은 순이.

그러나 훈은 아직도 여름냄새가 나던 순이의 웃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학교가 파하면 교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근사한 외제차를 마다하고 친구들과 웃으며 걸어가던 모습은 잊을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순이는 훈에게 웃는 것이 개울보다 말갛게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첫사람이었다.

순이는 분명 완연한 민낯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예쁜 얼굴이었다. 입술 주변을 감싸는 근육의 움직임과 함께 하얗고 고른 치열이 보이면,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접히는 눈꼬리가 그 유순함을 더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일 때는 그것이 가지인줄로만 알고 내려앉던 흩날리는 꽃잎들. 시원스레 웃었지만 웃음이 헤퍼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이 이상했다. 그저 온전히 그녀에게 어울리는 하얀 웃음.

그리고 그 웃음이 훈을 움직였다.

– 백날천날 본다고 네가 학교엘 갈수 있을 것 같니.

분명 농담 반에 진담 반이 섞인 말이었음에도 훈은 늘 필요이상으로 화를 냈었다. 이미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숨도 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리 괴롭지 않았지만 꿈조차 꾸지 못하게 하는 것은 순수한 고통만을 안겨줬다. 이어져야 하는 것은 슬픔이 마땅했지만, 훈은 모양 빠지는 눈물 대신 분노를 택했었다.

– 고훈, 너랑은 아예 다른 세상에서 태어난 애들이라고.

하지만 훈은 더이상 이런 류의 말에 얼굴을 구기지 않게 되였다. 웃을 일이라곤 없던 훈은 어느샌가 순이처럼 웃게 되였으므로.

C.

– 나 글 좀 배워주라.

또 실없는 말일 것이 확실했다. 순이는 지우개로 틀린 글자를 벅벅 지웠다. 옆에 앉은 훈에게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굳이 눈길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워낙에도 짧은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 글 배워보고 싶어.

또 틀렸다. 순이는 방금 내려놨던 지우개를 다시 집어들었다. 옆에서 자꾸 말을 거는 탓에 실수가 잦았다. 순이는 결국 작은 한숨을 잇새로 흘려보낸다.
조용히 좀…

– 진심인데.

뒷말을 마저 이으려던 순이는 결국 입을 굳게 닫고 만다. 글을 배우겠다는 말이 진심이었던 것인지 훈의 얼굴이 진지했다. 이미 익숙해진 얼굴과는 확연히 다른 구석이 있었다. 순이는 그에 결국 잡고있던 연필을 내려놓는다.

– 왜… 배우고 싶은건데.

음.
대답을 망설이는듯 하던 훈에게서는 예상외로 단순한 답이 돌아왔다.

– 그냥.

순이의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곧게 펴졌다. 고작 두글자로 포괄된 이유가 훈 다웠다. 곱슬기가 도는 머리카락과 악의 없는 눈이 공장에 오기 전까지 키웠던 폴을 떠올리게 했다. 순이는 그저 변덕과도 같은 마음으로 훈의 제안을 수락하려고 했다. 순이가 막 입을 떼려던 그때, 훈의 잔뜩 기죽은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혹시… 싫어?
– …
– 과외비도 낼게!

순이의 침묵을 부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다급하게 말을 덧붙인 훈의 눈빛이 걱정과 기대로 가득 찬다. 순이는 그런 훈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연필을 잡았다.

– 점심시간이랑 일과 후.

뭐?
실망을 띠던 훈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순이의 말에 터지고야 마는 웃음.

– 하루 두번. 5원으로 합의 해.

D.

공장에서 보내는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코끝까지 발갛게 물들이는 추위는 옷을 껴입어도 뼈속까지 스미는 한기를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순이가 훈에게 글을 가르치게 된 것도 이미 석달에 접어들고 있었다. 모든 기계가 멈추고 공장의 불이 꺼지면 사람들은 고단함과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오늘보다 힘들 내일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잠을 잘 자두어야 했다. 매 삼십초마다 한번씩 들리던 한숨소리가 멎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공장 뒤로 멀어지면 훈은 촛불의 불을 밝혔다. 그러면 그 옆의 순이는 제가 가진 공책에 어제 써두었던 글씨들을 지우개로 벅벅 지운다. 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긋함이었다. 수입제비닐로 대충 외풍만을 막아둔 창문에서는 이따금씩 거센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 할'아'버지. 이렇게 쓰면은 할'어'버지가 되잖아.
– 어엇.. 또 틀렸네.

훈이 주먹을 들어 제 머리를 한번 가볍게 친다. 바닥에 쌓인 지우개밥이 벌써 한웅큼이었다. 그에 훈이 멋쩍은 미소를 띄운다.

– 넌 안추워?

왼손으로 열심히 연필을 움직이던 훈이 코를 훌쩍였다.

– 별로.

순이의 말이 가라앉자 훈의 움직임이 멎는다. 이어 불쑥 다가간 훈의 손이 무방비한 순이의 볼에 닿는다.

– 거짓말. 볼이 이렇게나 찬데.

뒤늦게 제 상황을 자각한 순이의 손이 훈을 쳐내려던 그때, 훈의 손이 빠르게 떼어졌다. 곧이어 들리는 잔뜩 신이 난 목소리.

– 눈 온다! 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밖으로 달려나가려는 훈의 손목을 잡은 순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 공부 시작한지 이십분도 안됐어.
– 눈 오잖아. 눈!
– 겨울에 눈이 오는게 신기한 일은 아니잖아.
– 우리 눈싸움 하자. 응?

여전히 제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순이의 모습에 훈의 눈꼬리가 내려앉고야 만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를 깨닫기라도 한듯 훈이 손에 들고있던 연필을 도로 내려놓는다.

– 야! 고훈!

결국 순이가 손 쓸 새도 없이 훈이 밖으로 달려나간다. 작게 한숨을 내쉰 순이가 창가로 걸어가 창틀에 몸을 기댔다. 밖은 이미 온통 흰 빛으로 물들고 있는 중이었다.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선 훈의 쪼그려앉은 뒷모습이 보였다. 그런 훈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흰 눈의 흔적에 옷깃이 축축이 젖어갔다. 말없이 그 광경을 보고있던 순이가 창을 연다. 그에 따라 겨울임을 증명하듯, 한기 서린 바깥공기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순이는 찬 공기를 한모금 들이마셨다. 주황색의 하늘에서 내리는 흰 눈이 손에 닿는 순간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
멍하니 눈을 보고있던 순이의 입에서 한음절의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훈이 던진 눈뭉치가 정확히 순이의 머리카락에 닿은 뒤, 신발 앞코로 떨어진 것이었다. 눈이 녹자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결국 앞머리를 쓸어올린 순이의 앞에 훈의 밝은 목소리가 침범한다.  

– 빨리 나와! 눈 대따 많이 와!  

새하얀 눈밭에 훈이 남기는 운동화 밑창의 자국이 이질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질적인 것도 한가득 모이니 오히려 조화로웠다. 훈에게 화를 내려던 순이가 결국 실소를 토해낸다. 일곱살 어린애처럼 허리를 접어가며 웃는 훈의 모습을 보고도 웃음을 참는다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 반푼이…

이제는 팔푼이라는 말도 아까웠다. 멍청해 보일만치 순수한 고훈에게는 반푼이라는 칭호가 더 잘 어울렸다. 이어지는 훈의 해맑은 웃음소리에 따라 순이도 소리내어 웃었다. 오랜만의 순수한 즐거움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다.

눈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어디선가 한겨울의 매미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 구성에 큰 도움 주신, 메르(OF거리) 님께 감사 드립니당

* 가볍게 쓴거라 가독성이나 개연성이 엉망입니다 ㅎㅎㅎ 가볍게 읽어주세요 ~

 

이 글을 공유하기:

새턴

거리의 새턴은 씁니다.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
10
응원합니다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