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훈은 거창한 꿈을 가진적 없다. 그건 성장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채 삼켜내지 못하는 욕심은 악의를 가진다. 그래서 훈은 평범한 욕심조차 품은적 없다. 그렇다면 순이는 그런 욕심을 가졌기에 노도怒涛처럼 덮쳐오는 악의를,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얼굴로 버텨내게 된 것일까.

– 훈아.

그렇다면 신은 없다.

– 한 시인이 그러는데, 몽골 사람들은 키우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대.

순이의 눈동자에 비낀 노을이 온통 붉었다. 훈은 여상한 그 시선을 고요하게 마주했다.  

–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말을 마친 순이는 곧 부딪혀오는 훈의 눈길을 피했다. 순이의 손이 집요하게 옷소매를 괴롭히고 있었다.

– 그래서, 난 내 전생의 주인이 너무 원망스러워.

순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겨우 일주일이었다. 일주일만에 다시 공장으로 돌아온 순이는 오히려 초연해 보였다. 그래서 훈은 그 속에 억눌린 슬픔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부러 강한 척 하는 모습의 순이는 부자연스러웠다. 순이는 모두를 속여도 훈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였다. 공장이 문을 닫았다. 공장장은 밀린 임금을 모두 들고 밤사이에 도망쳤다. 많은 사람들은 분노를 선택했고, 또 다른 다수의 사람들은 포기와 순응을 택했다. 그리고, 순이는 어디에 설까. 훈은 포기의 쪽에 서며, 순이가 원한다면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훈아.

물기가 가득했던 목소리가 결국 울음을 토해내고야 만다. 순이가 울었다. 목놓아 울었다. 곧 무너져버릴 다리처럼 휘청이던 순이는 한번도 타인에게 슬픔을 내비치지는 않았었다. 울면 더 슬퍼질 것을 알고 있으므로. 하지만 지금의 순이는.

– 순아.

잘게 떨리는 어깨 너머로 괴로움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 아파. 곧 죽을듯이.
– 우리가 바뀌면 돼.
– 어떻게?
– 새로운 공장을 찾아가는거야. 일년정도는 주숙만 제공받고, 안정이 되면 조금씩 돈을 모을 수 있어.
– 그렇게 살기 시작하면 평생 이렇게 살게 돼.  
– 이렇게 사는게 뭐가 나쁠게 있겠어. 지금부터라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순이의 팔이 훈의 손을 쳐냈다.

– 이런 삶은 희망이 없어. 난 이탈리아에 갈거야.
– 무슨 수로?

시선이 부딪쳤다. 순이는 훈의 가라앉은 눈을 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 너는 늘 밑바닥이었잖아. 넌 무슨 수로 내 기분을 짐작할 수 있는데? 내가 얼마나 비참할지 생각이나 해봤어?
– 그런 뜻 아닌거 알잖아.

순이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그에 훈이 순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순이는 고개를 숙였다. 덧붙여지는 말은 한숨처럼 토해졌다.  

– 너랑 친하게 지내줬다고,
– …
– 날 너랑 같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리고 그 말에 등을 두드리던 훈의 손이 멎는다. 훈은 몸을 일으켰다. 훈의 등뒤에서 순이의 울음이 소리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훈은 돌아보지 않았다.

J.

– 여기.

순이의 시선이 눈앞에 던져진 흰 봉투로 옮겨졌다. 내용물이 두둑하게 들어있는 것인지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묵직하다.

– 이게 뭔데.

순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 앞에 선 훈에게 그 말만을 건네곤 다시 시선을 거뒀다.

– 내가 잡았어. 우리 돈 들고 튄 사람.
– 뭐?

훈의 말에 고요하던 순이의 눈동자가 일렁인다.

–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하는 대가로, 돈 받았어.
– 고훈.
– 그러니까 이 돈으로 떠나.

이탈리아로.
훈의 말이 맺어지고, 순이는 묵묵히 훈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눈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 그럼 넌?
– 나도 지긋지긋한 공장생활 벗어나서 좀 다르게 살아보려고.
– 어디로 갈건데?
– 좋은 데.
– 그 곳도 이탈리아처럼 아름다운 곳이야?

훈이 가벼운 웃음을 터트린다.

– 좋다고 했지, 아름답다곤 한적 없어.

순이는 훈의 말에 고개를 짧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훈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 행복하게 살아.

등을 반쯤 돌린 훈이 순이를 돌아본다.

– 비밀 지킬게.

미소와 함께 꽃잎처럼 내려앉는 순이의 말에 훈은 양쪽의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미련없이 등을 돌린 훈은 빠르게 순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순이는 곧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담긴 편지를 펼쳤다.

‘이 젊은이는 피라미처럼 슬프구나.’

그 안에 담긴 글씨는 고작 열네자. 그러나 순이는 그 구절을 한참이나 읽어내려가야만 했다.
그 구절이,
훈이 글을 배운 뒤에 두번째로 쓴 구절인줄을 순이는 알지 못했으므로.

K.

눈앞에서 뿌옇게 흙먼지가 일었다. 거세게 밀려오리라 생각했던 고통은 예상보다도 훨씬 작았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다리를 추스리고 일어서려는데 정강이뼈에 여럿의 거친 발길들이 닿는다. 성한데 없는 얼굴 피부에 닿는 바닥의 느낌이 까슬했다. 주먹을 꽉 쥔 훈이 부어오른 눈을 꾸역꾸역 뜨며 깜빡이는 창고의 백열전등을 올려다본다.

– 어제는 이자까지 붙여서 갚겠다고 호언장담해놓고. 왜, 지금은 도저히 안되겠냐.
– 하…

오래 쓰지 못한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갈비뼈께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그에 훈의 어깨가 들썩여지며 웃음을 토해냈다. 훈의 간헐적인 숨소리를 따라 온 몸의 구석구석이 불규칙적으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 그러게. 웬 미친놈인가 싶었어. 그 큰 돈을 빌려가서는 하루만에 갚겠다고 하는게 말이 안되는데.

사내의 말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제 팔에 닿은 빛 한줄기를 내려다보는 훈의 행동이 굼떴다. 분명 빈틈없이 밀폐된 공간이었음에도 어느 틈새론가 빛의 조각이 흘러들고 있었다. 빛은 언제나 희망을 가지게 했고, 그 희망을 손에 잡으면 다시금 암울한 절망을 가져다줬다. 그리고 헛된 욕심보다도 더 큰 어둠을 선사했다. 지금 훈의 등 뒤로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는 지폐들이 곧 그것을 여실히 증명했다.  
축축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자 점멸하는 빛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길게 늘어진 핏줄기가 서늘했다. 비릿한 맛이 입 안 가득 돈다.  

순이의 탓이 아니다. 어떻게든 공장을 지켜보려 했지만 결국 임금을 제대로 주지도 않은채 급히 도망친 공장장의 탓도 아니였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보기 위해 발버둥치던 훈의 잘못도 없었다.
그냥, 그냥. 아직은 어른이 되지는 않은 소년들이 모르는 그 무언가의 까닭이었다.

해보다도 뜨겁고 붉은 화염이 번졌다.

훈은 불타는 빛 아래 조그맣고, 말갛게 빛나는 순이를 생각한다. 금방 물을 준 잔디에도 망설임 없이 앉는 순이의 물빠진 청바지를. 이태리어사전을 옆에 내려놓은 순이의 맑은 눈이 활자에로 닿아있는 것을. 책을 읽던 순이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기색을 보이다 이내 나열된 글자에 다시 집중한다. 영화가 상영되기 직전의 상영관처럼 깨지지 않을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혹여나 훈은 순이에게 제 숨소리가 들릴까 싶어 숨을 죽인다. 짙은 흉터의 흔적이 묻어있는 손으로 렌즈를 움직였다. 그리고 카메라에 담겨진 순이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뚝- 떨어지는 것을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에 화면에 물방울 하나가 소란스레 퍼진다. 방금까지도 맑았던 하늘의 색이 순식간에 회색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에 미간을 좁히던 순이는 아쉬운듯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순이의 발 밑에서 물방울을 머금은 풀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그건 마땅한 굴복.

이름 지어지지 못한 훈의 감정은 여전히 죄질이 무겁다.

* 훈이 글을 배운 뒤, 가장 처음으로 쓴 건 사채업자와 거래한 신체포기각서.

* 훈은 순이를 이 비극속에서 도려내고 싶었다. 中편에 있던 H부분의 모든 구절은 둘의 감정이 오고간 은유였다. 훈은 깨달았고, 차마 이름지을 수 없었기에 끝까지 욕심을 부리지는 못했다. 결국 훈은 순이의 삶 속에서 자신을 도려내 순이의 행복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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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턴

거리의 새턴은 씁니다. (+ 海子,顾城을 사랑하는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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