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순백의 피아노 앞에서 우리는 많은 얘기들을 했다. 재밌는 꽃말, 좋아하는 피아노곡과 아티스트, 근처 음반가게 불친절한 직원에 대한 약간의 불만, 소소한 그 대화들의 시작과 끝엔 항상 너는 어떠냐고 물어 오는 노아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방적인 나의 경청에 그가 내던진 일종의 조치였던것 같다. 열쇠를 주며 문을 열어 달라는 듯이. 안에 가둬 놓은 이야기를 쏟아 내달라는 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말문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던 건 나는 정말로 할 얘기가 없었기에, 악을 써대며 지내왔던 과거얘기를 제외한다면, 나에겐 웃겨서 바닥을 구를만한 또는 화나서 열변을 토할만한, 그런 흥미로운 일화도 없었고 그럴싸한 이야기꾼이 되지도 못했다. 해본거라고는 그저 이룰수 없는 망상, 고장난 배에 앉아 삐걱이며 파도를 타려던 일뿐이였다. 들은 것에 비해 충분하지 못한 나의 이야기는 대화의 맥을 자꾸 끊는듯 했으나 그런 걱정은 부질없었다. 노아는 나를 재촉하지도 방치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생각을, 입밖에 나오지 못한 내 생각마저 대신 어둠 속에 수놓았다. 그의 토 하나 단어 하나가 내 모든 감각을 빼앗았고 시간의 흐름이 지각되지 않을만큼 노아의 소리가 좋았다. 그 아이가 했던 말처럼, 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면 노아에게서 나오는 모든 소리에 나는 중력과도 같은 영원불멸한 힘을 느끼며 그라는 세계 속으로 무한히 빨려 들어갈수 있었다. 마치 바다 속을 나아가듯, 망가진 내 배를 버리고 풍덩 뛰어들어 형형색색의 물고기떼와 산호 사이를 가로 지르듯,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의 바다로 잠수하였다. 흡사 내가 그와 헤엄치는 것처럼, 함께 바다의 끝에 다다를듯 했다.
-이제 진짜 라일락 필요 없나 보네.
노아가 습관같이 사던 라일락을 찾지 않은지가 꽤 되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매일이다 싶이 가게문을 두드렸고 나는 그런 그의 잦은 방문들이 매번 반가웠다. 한결같은 그의 생기가 적막뿐인 공간에 비집고 들어오면 그제서야 나는 이곳의 꽃내음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 이젠 라일락이 필요없냐며 물었더니 말없이 내 쪽을 힐끔 보고는 장난기 넘치게 말했다.
-왜, 매상 좀 올려줘?
그 농담에 맥없이 웃음이 터졌다.
-그런 말도 할줄 알아?
-내가 이 동네 개그맨인거, 몰랐어?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을 떨던 노아, 그에게 문득 부탁하고 싶었다.
-피아노 좀 연주해주라 노아야.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비꼈다.
-궁금해, 너의 연주.
그가 가게의 피아노로 처음 연주한 곡은 쇼팽의 녹턴 2번, 밤새 울려 퍼지던 노아의 피아노 소리는 그냥 노아같았다. 예쁘고 깨끗하고 생기로웠다. 하나 하나의 음표들이 거저 흘러가지 않은채 그의 손끝에서 숨을 쉬고 춤을 췄다. 매끄러운 건반에 내린 두 손이 노래하는것 같았다. 달콤한 꽃내음이 노아를 감싸 바람타며 그를 배회했다. 한송이 꽃같은 노아는 나와는 참 달라보였다. 얼마 만에 누군가의 연주를 오롯이 감상한건지 모르겠으나 아스라한 기억 사이로 노아가앉은 그 자리에 똑같이 앉아 있있던 내모습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런 나의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는 허상을 보는 것도 같았다. 찬란하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갈매기 한마리가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허상. 반짝이는 물빛이 아름다워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내일에도 연주해 줬으면 좋겠다.
의자를 밀어 넣다 말고 비스듬히 피아노에 기대 서던 노아는 팔짱을 끼며 무언갈 고민하는 듯했다.
-합주라면 해볼께.
합주라는 단어에 당혹감을 느꼈다. 말이 멈춘 사이,내 앞으로 다가온 노아의 눈이 빛났다. 즐거운 듯 활짝 열린 입동굴이 보조개를 달았다. 이내 내 손을 잡더니 손깍지를 껴주며 말했다.
-네 손을 위한 판타지아.
-…근데 난,
-너랑 꼭 연주해보고 싶어.
순간, 마디마디의 손가락에 옅은 온기와 함께 힘이 들어갔다.
—
-안돼요 이건..
-이 지경이 되고도 피아노에 미련 같은게 있는거냐.
한결같이 차가운 말투는 언제나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같이 악보만 쳐내는게 바로 재능부족이라는 증거라ㄱ
-유품이라고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언성을 높였던 순간이였다.
-엄마 유품이라고요.. 못버려요 이 피아노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악에 받쳐 말하자 그의 눈에 날이 설더니 그대로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얼굴만 지 엄마 빼닮아 뭐해. 손가락이 저주스러운데.
—
숨이 턱 막혔다. 호흡이 가빠지더니 머리가 깨질듯 아파왔다. 아직도 생생한 아버지의 말들이 머리 속에서 난잡하게 뒤엉켰다. 정신이 혼미해져 피아노를 짚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쉴새없이 차오르는 눈물 사이로 피아노 건반이 일렁였다. 주먹을 꽉 쥐며 의자에 주저 앉았다. 단지 피아노 앞에 서는것 만으로도 기절할 듯 고통스러운데 합주라니.역시 안 되는건 안 되는 거였다. 눈앞으로 천진하게 웃던 노아가 스쳤다.아직도 생생한 손의 온기를 떠올리며 아버지의 기억을 밀어내려 애썼다. 다시, 피아노보다 무거운 두 손을 올려본다.
놓은지 오래 되었더라도 그 기간 이 피아노와 함께 한 시간들을 이겨 내기에는 역부족이였다. 건반 위에 올려진 손가락은 습관처럼 첫 음표를 찾아 자리잡으려 했고, 여전히 세차게 울렁이는 마음을 안고, 참지 못한 눈물 방울이 그 위로 애처롭게 떨어졌다.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존재가 안타까운 순간이었고, 나약한 스스로가 죽도록 미워지는 동시에 한없이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내는 소리를 거부하는 머리와 나아가고저 하는 손가락의 교차선이 함께 머무르는 선에서, 나는 그저 그렇게, 소리없이 내버려졌다. 흐르는 시간이 머무는 그곳에서 나는 서성였다.
어리석은 나는 또 망상을 했나 보다. 따뜻한 그 아이의 존재에 속아 감히 주제를 잊어 버렸나 보다. 과거에 발목 잡혀 헤엄치지도 못하면서, 제자리에서 버둥거리기만 하다가 익사할거면서, 무슨 수평선까지 나아가겠다고. 노아와 함께라면 나 역시 수평선 가까이 갈수 있을까. 그처럼 하늘의 축복을 온몸으로 받아 푸르게 일렁일수 있을까. 어쩌면 노아가그 수평선은 아닐까, 나는 그것이 진실이길 바랐다. 노아가 수평선 자체라면 나는 그걸 충분히 가질수 있다고, 그렇게믿고 싶었다.
소설 잘 읽힙니다. 작가님한테는 좀 죄송한 얘기지만 요즘 파친코를 읽었더니 자꾸 그 소설속 노아랑 여기 노아가 겹쳐서 읽히네요. 생각외로 캐릭터가 넘쳐흘러서 ㅎㅎ
앗, 파친코에 노아라는 캐릭터가 있나요? 좋은 작품인줄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보지를 않아서.. 묘하네요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노아도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라고 봐야겠지요. 노아 외에도 모자수(모자), 솔로몬 등이 나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