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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선배 자꾸 이러시면 저도 곤란해요, 저 징계 받고 바지 벗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요?
-사진 자료는? 없어?
-와 너무하네 정말.
-됐고 새끼야, 얼른 내놔.
이무명이 후배의 서류 가방을 빼앗아서 뒤진다. 오래되어 꾸깃해진 사진 세 장이 비닐 봉투 안에 들어있다. 첫 장은 "마리아 보육원"이라는 간판이 달린 건물 앞에 중년의 남성 원장과 조금 더 젊은 여선생님 한 명 그리고 열일곱명의 아이들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다. 이무명이 느린 손짓으로 사진을 넘긴다. 이어 화재 진압 후 건물의 모습, 보육원 원장의 독사진이 차례대로 펼쳐진다. 마지막 사진에 눈길을 두며 후배에게 묻는다.
-이 양반 죽기 전에 이미 재판 중이었지?
-그렇죠. 근데 재판을 받았다 해도 승소했을거예요. 워낙 지역사회에 영향력이 살벌해서 정계고 재계고 뒷심 없는데가 없던데요. 누가봐도 사탄같은 새낀데 신부라는 이름 걸고 가진 힘들 총동원해서 빠져나갔겠죠. 오히려 하늘이 도운거예요. 불 질러서 태워 죽인거지.
-화재 사건 파일도 다음 주에 가져다 줘.
-아잇, 선배! 아니지, 형! 자꾸 이러기야? 이젠 경찰도 아니고 뭣도 아니잖아! 왜 이렇게 보육원 사건에 집착하는 건데? 요즘 반장님 내가 옛날 사건 파일 들추어 보는 거 눈치 챘단 말이예요. 그리고 나도 이제 옛날에 형 심부름이나 하던 막내 아니라고요.
-내 조카 여자 후배들 많다.
-아이고~ 그러면 내가 퍽도 넘어가ㄱ
-무용과.
-다음 주 목요일에 봬요.
후배의 다급한 태세전환에 이무명이 가소롭게 바라본다. 손 안의 사진들을 외투 주머니에 넣으면서.
-하여간 단순한 새끼.
22.
안내를 종료한다는 내비게이션의 건조한 소리가 흘러나올 때쯤 눈앞에 펼쳐진 건 나무가 우거진 숲길이었다. 탈탈탈 맥 없이 엔진음이 꺼지고 이무명이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막다른 길은 아니었지만 건물이랄게 없는 곳이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대체…
이무명이 쪽지를 꺼내서 주소를 낮게 읊더니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주소와 대조해보았다. 문제는 없어보였다. 곧 턱을 쓸며 한숨을 뱉았다.
-산에 뭐가 있다고… 시체라도 유기했나
조롱처럼 느껴지는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
-하긴. 범행 흔적을 쪽지로 남길 일은 없겠지.
-시체니 뭐니,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뭐예요?
-아무 의도 없어. 추적하는 사람이 연쇄살인범이고, 주소가 적힌 쪽지를 발견했고, 와봤더니 산길이고. 아주 합리적인 의심 아냐?
-저한테 형이 진짜 살인자라 생각하냐고 물었죠? 아니요. 아직도 꿈 같을 때가 많아요. 예민한 사람이긴 했어도 누굴 죽일수 있는 사람이 절대 아니거든요.
-너도 두눈으로 봤다며. 그날, 욕실에서.
-…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나를 흘깃 보더니 이무명이 차에서 내렸다.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가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른쪽의 숲을 멀거니 주시하다가 다가가서 나무가지들을 헤집었다. 이내 이쪽을 바라보며 손짓하였다. 이리 와보라는 뜻이었다. 얼기설기 엉킨 가지들을 거두니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잡초들이 좁다란 흙길을 침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했다. 그 끝에 흰 벽의 낮은 건물 하나가 보였다.
23.
-수..안납골당…
단층짜리 허름한 건물에는 흑백 조합의 간판이 걸려있었다. 해빛이 눈부신지 이무명이 손으로 이마 앞을 가리며 건물의 이름을 읽어나갔다. 건물의 나이를 보여주듯 간판의 글자들이 색바래져 있어 온전히 읽어 내는데 시간이 걸렸다. 납골당에 와보기도 처음이었다.
-정훈이 이 곳에 올만한 이유가 뭐지, 아는 거 없어?
언젠가 형에게 물은 적이 있다. 묘지나 납골당 같은데에 왜 가지를 않냐고. 형이 대답했다.
"갔어. 나 혼자." "혼자서?" "응 혼자서." "왜? 나는 안 데리고 가?" "그냥. 좋은 데도 아니고.""그런게 어딨어. 나도 보러 가야지.""넌 죄가 없잖아. 그러니 갈 필요도 없고."
-친족 없는 건 알고, 그렇다면 보육원 인물인데, 죽은건 원장이랑 여선생. 그리고
-승아 누나.
-…
-이승아, 겠죠
24.
그 밤의 끝은 온통 붉은 색이었다. 화마에 뒤덮인 보육원이 붉은 물결에 일렁였고, 그 곳 어딘가에서는 선혈을 남기며 조용히 죽어가던 사람이 있었다. 내 아랫층 침대는 승아 누나의 자리였다. 나는 낮 동안의 고된 노동에 죽은 듯이 자다가도 달이 너무 밝은 밤이면 어김없이 깼다. 어떤 날의 달빛은 너무 투명하고 창백해 방을 명과 암 두 곳으로 쪼갤 듯 침대 위로 날카롭게 떨어졌다. 그 빛에 베이기라도 한듯 고통스럽게 잠에서 깨면 온 방이 아이들의 새근대는 숨소리로만 가득했다. 불규칙적인 그 소리들은 오래 듣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하모니처럼 조화롭게 들려 불안한 마음을 달래줬다. 뒤척이다가 잠시 일어나 아이들을 내려다봤다. 덩치가 좀 더 작은 아이들은 둘이서 한 침대를 쓰기도 했다. 문 바로 옆 침대 중 일층 침대가 형의 침대였고 그 자리는 자주 비어있었다. 그날도 예외 없었다. 다시 누워 잠들려다가 문득 아랫층 침대를 내려다봤다. 승아 누나는 거기 없었다.
25.
크지 않은 납골당에는 칠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 한 명이 공간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그 곳의 주인으로 보이진 않았다. 목제 책상 두개를 나란히 붙인 허술한 안내데스크 뒤로 찢어진 가죽 의자에 기댄 백발의 노인이 머리를 젖힌 채 졸고 있었다. 나와 이무명이 들어서자 소리에 놀라 움찔하며 깨었고, 이내 어떻게 왔냐며 다급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잠겨 쉽게 나오지 않았는지 헛기침을 요란하게 하면서.
-고인 이름이 뭐요?
-이승아요.
이무명이 앞서서 대답했다. 노인은 잊어 먹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이승아라는 이름을 여러번 되뇌이며 책상 밑 서랍에서 서류첩을 꺼냈다.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찾아서 걸고는 명단처럼 보이는 것을 훑어 내려갔다.
-언제 이 곳에 안치됐지?
노인이 찾기 힘들었는지 단서가 될만한 다른 질문을 했다. 답이 바로 나가지 않아 머뭇거리는 찰나에 이무명이 또 대답했다.
-9년 전이요.
나조차도 승아 누나의 장례 날짜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이 곳에 있을 거라는 것 역시 추측일 뿐이었는데 이무명은 마치 그럴 수 밖에 없다는 듯 모든 답이 정해진 사람처럼 확신에 차있는 목소리였다. 9년 전이라면 화재사건이 있던 해였다. 그 시간을 기억해내는 데에도 잠깐 시간이 걸릴만큼 아득하게 느껴졌다.
-오래도 됐네… 복도 왼쪽 끝 안치실로 가면 돼. 9년 전은 거기에 다 몰려있어.
노인의 태도는 무신경했다. 나이에서 오는 것인지 권태에서 오는 것인지, 다 몰려있다는 표현은 망자를 물건 쯤으로 치부하는 성의없는 태도였다. "영혼에게 애도와 안식을". 그의 뒤로 펼쳐져 있는 그럴 듯한 슬로건이 코미디같았다. 그러나 이무명은 개의치 않은지 먼저 걸음을 옮겼다.
26.
승아 누나의 안치단은 두번째 줄 아래 층에 놓여져 있었다. 쪼그려 앉아야만 자세하게 들여다 볼수 있는 맨 밑. 안에는 이승아라는 이름이 새겨진 항아리와 14살이었던 누나의 독사진, 보육원 단체사진이 세워져 있었다. 그밖의 별다른 유품이 없는 썰렁한 상자 안을 바라보는데 승아 누나가 머리를 땋을 때 쓰던 빨간 리본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봤던 누나의 침대까지. 이불은 아무렇게나 헤쳐져 있고, 손을 넣어 봤을 때 온기만 옅게 남아있던.
-뒷조사는 어디까지 했어요?
-뭐?
-나랑 형한테서만 그친거예요 아니면, 이승아가 방화범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
-9년도 지난 일이지만 훼손된 필름처럼 어떤 장면들이 뚝뚝 끊기며 생각날 때가 있어요. 생애 처음으로 경찰을 만났는데 완전히 잊을리가 없죠. 아, 변호사였나…. 다들 하나같이 물었어요. 그날 보육원에서 뭘 봤는지, 이승아가 특별한 행동을 하진 않았는지, 가령 그 밤에 창고에 가는 걸 본적이 있다던가… 창고에는 농장 일을 할 때 쓰는 각종 기계들이 있거든요. 휘발유도 거기 있고. 창고 열쇠는 승아 누나 담당이었어요. 설마 거기에 있던 아이들이 강제노역에 쓰였다는 걸 모르고 있는건 아니죠? 보육원 뒷편의 블루베리 농장에서요.
고개를 들어 이무명을 올려다 봤다. 잠깐 시선이 얽히자 그가 시선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작은 한숨이 들렸다.
-알고 있었네.
-불 지른 사람이 도망치지도 못해? 네 말대로라면 자발적 방화이면서도 의도된 자살로밖에 안돼.
-그렇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곳이었죠.
27.
다리 균형이 맞지 않은 철제 이층 침대는 사다리를 밟고 내려갈 때마다 끼익끼익 불쾌한 소리를 냈다. 숨을 참는다고 소리가 사라지는 게 아닌데 한 발 한 발 내려가는 동안 유독 크게 느껴지는 그 소음에 절로 호흡을 멈췄다. 침대에서 내려 온 뒤에도 누군가 깨진 않았을까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승아 누나의 침대로 손을 뻗었다. 침대보와 어지러진 이불 속은 따뜻했다. 어렸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이곳에 승아 누나가 있었다는 걸. 심장이 떨려왔다. 명백한 이유는 알수 없지만 징후적으로 이미 체화하고 있는 어떤 불안이 다시 덮쳐왔다. 발이 서서히 문으로 향했다. 닫혀있는 문 너머로 승아 누나를 찾아러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너 뭐해?
어깨를 덥석 잡아오는 손길과 불쑥 들려온 음성에 화들짝 놀랐다.
-어디 가려고?
-…큰 누나.
보육원의 누나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았던 박주영을 아이들은 모두 큰 누나라고 불렀다. 박주영이 그 곳에 서있었다. 검은 색의 트레이닝 복 상하의를 입고 긴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이 침실과는 어울리지 않아 오싹해났다.
-승아 누나가 없어서…
박주영은 큰 누나라 불리는 만큼 아이들을 잘 챙겨줬다. 어머니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모두 씻겼고 빨래와 주방일을 도맡아했다. 침착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의 큰 누나는 조금 달라 보였다. 말끝에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고 들이마시는 숨이 가빠보이기도 했다.
-승아, 승아는 화장실에 갔을거야.
-아닌데…승아 누나는 자기 전에 미리 화장실에 간단 말이야…
-유민아. 네가 걱정할 일은 없어. 그러니까 어서,
그리고 침실의 문이 열렸다.
28.
안치실로 누군가 들어왔다. 적막뿐인 공간에 새로 등장한 사람은 이무명이 벽에 기댔던 몸을 떼어내게 만들었다. 남색의 야상 재킷을 입고 길지도 짧지도 않은 머리를 낮게 묶은 여성, 익숙한 눈매와 실루엣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같은 모습인
-큰 누나?
박주영은 매우 놀란 얼굴이었다. 눈앞의 나를 분간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해 보였고 벌어진 입 사이로 뭔가 말을 뱉으려고 주저했으나 이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한켠에 서있던 이무명을 보고는 생각에 잠긴듯 인상을 쓰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형사님..?
-…오랜만이네요.
이무명이 팔짱을 풀며 박주영에게 다가섰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일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난 그저 땅에 얼어붙은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29.
-유민아, 잠이 안와?
-형.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형이었다. 갓 세수한 사람처럼 얼굴에 물기가 흐르고 있었고 나와 박주영을 번갈아 보았다.
-유, 유민이가 자다 깼나봐…
박주영의 설명에 형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내 팔을 잡아 침대로 이끌었다. 박주영도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누웠다.
-형, 승아 누나 어디 갔어?
-너 잠이 안 오나 보다.
승아를 찾는 나를 승아의 침대에 눕힌 형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말없이 머릿결을 정리해 주었다.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려주고선 어서 잠에 들라는 듯 등을 토닥였다.
-승아 누나 내일이면 오겠지? 곧 생일이라면서 어딜 간거야…
-유민아, 쉿.
형이 자신의 입술 가까이 검지를 갖다 댔다. 설핏 미소가 스쳐지나가며 입꼬리가 반쯤 올라갔다. 창을 투과해 들어온 달빛이 형의 눈동자에 맺혔다. 시선의 방향을 타고 푸른 슬픔이 미끌어지는 것 같았다. 등을 토닥이는 리듬따라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왔다. 몽롱해지는 정신과 함께 형의 모습이 천천히 흐릿해졌다.
30.
근데 형,
형이 입은 그 옷,
원래 소매에 무늬가 있던가?
장미마냥 붉게 핀 무늬 말이야.
24번 묘사가 너무 좋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