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럴수 없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서은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에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 사망시간을 알리는 의사의 침울한 목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눈앞에서 그의 산소마크가 제거되고 있는게 보였다.

“이 사람…아직 안 죽었어요. 아니, 안 죽어요! 누가 죽는다 그래요? 당신들이 뭘 알아? 당신들이 어떻게 안다고 그래?”

그녀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앞으로 다가가 깊이 잠들어 있는 그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이봐요, 눈 떠봐요…이럴수 없어요…어떻게 당신 기다려왔는데, 어떻게 우리가 이 시간들을 견뎌왔는데…너무해요…이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서은아…그러지 마…”

곁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그 손을 뿌리쳤다.

“이럴 수 없어…돌려놔…모든걸 돌려놔줘.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내가 이제 더이상 뭘 포기하면 되는 건데?”

“서은아…”
“염라대왕…내가 졌어요…내가 무모했어요…지옥에 가라면 가고, 18층 고초를 겪으라면 겪겠어요…당신이 말하지 말라면 함구하고, 당신 시키는대로 다 움직일테니 이 사람 돌려줘요…제발…”

그녀는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차라리 까무룩 정신을 잃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멍한 눈길이 그의 얼굴을 더듬는다. 절망으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듯 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실안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후 그녀는 다시 머리를 숙여 여전히 평온한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제야 어렴풋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각난 모양으로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잠깐만 기다려요…혼자 외롭지 않게 할테니까.”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뒤따른 그녀의 돌발행동에 순간 병실안에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들을 아득하게 뒤로 한채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왔다.

“다 끝났어요…이제 우리…절대 헤어지지 말아요…”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그의 손을 스치며 천천히 흘러내려 시트를 적셨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와 함께.

1.

“서은아, 일어나. 임서은, 얼른 일어나!”

아침 여덟시를 알리는 어렴풋한 알람소리에 서은은 겨우 잠에서 깨고있었다. 평소에는 귀맛좋게 울려오던 알람소리가 오늘따라 귀찮게만 느껴졌다. 흐리멍텅한 정신을 가다듬자 알람소리에 이어 뭔가 같이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자신의 핸드폰 벨소리였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아침 시간에 전화가 오는 사람은 단 한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길게 하품을 하며 액정을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임서은씨?”
“…누구시죠?”

수화기 저쪽에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중저음의 목소리가 전해와 그녀의 잠기를 말끔히 날려버렸다.

“오주명입니다.”
“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오주명이라면, 그녀가 알기로는 그녀가 있는 베이징, 아니 중국이라는 이 거대한 대륙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잘나가는 영화감독이 아닌가. 그런 그가 왜 자신에게 전화를 했을까…핸드폰을 든 그녀의 손이 긴장으로 인해 살짝 떨렸다.

“혹시 오감독님?”
“네, 감독 오주명입니다.”

오주명이 재차 확인해주자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 안녕하세요. 오감독님께서 무슨 일로…제게 전화를…”
“오늘 오전중으로 제 사무실로 와주시겠습니까.”
“제가요?”
“네, 전화 받으신분이 임서은씨 본인이 맞으시다면 말입니다.”
“네, 맞는데요…왜…저를…하필…”

그녀가 뜨아해하자 오주명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새로 찍을 사극의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학교에서 보낸 프로필이 틀림없다면 지금 베이징 H대 연극영화과 3학년 재학중이 맞습니까.”
“네, 맞아요. 저 맞습니다. H대 재학중인것도 맞구요…”

이번엔 손이 아니라 목소리까지 떨렸다. 오주명은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오늘 오전 10시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오디션이 있습니다.”

통화가 끝난 후 그녀는 손을 내밀어 자신의 얼굴을 꼬집었다. 꿈이다, 이건 분명…꿈이 아니라면 저 유명한 감독이 별 볼일없는, 한낱 연극영화과 3학년 학생을 부를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꼬집힌 얼굴은 아팠고 그녀는 잠시 멍해있다가 침대에서 바닥으로 유려하게 몸을 날렸다.

“꺄아악!!!”

비명소리는 예외 아니게 맞은켠 조윤아의 침대에서 새여나왔다. 그녀가 다니는 H대에서는 학생들의 기숙소 생활을 권장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지금이라도 룸메이트를 바꿔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정상인 사람보다는 몇옥타브 높은 그 비명소리에 서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조윤아, 너때문에 내가 더 놀랐어. “
“그냥 일어나면 될 걸 왜 하필 꼭 그렇게, 그렇게 니 현란한 경공을 선보여야 하겠니? 부탁인데 침대에서 내려올땐 말이야. 제발 그 몸 돌리는 동작만은 그만해줄래?”

그녀는 피씩 웃었다. 룸메이트로 산지 2년인데 윤아는 그녀가 가끔 펼쳐보이는 무예에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듯 했다.

“그런데 왜 벌써 일어나? 오늘 주말이잖아.”

조윤아는 잠을 다 깼는지 이불을 개이면서 투덜거렸다. 그녀는 오감독의 전화를 말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연기학과 학생으로서 이런 기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지만, 다른 학생들이 안다면 미리 자신을 견제할 것이 분명했다.

윤아처럼 친한 친구라도 일단 오디션을 보고 출연이 확정된 다음에 다시 알려줘도 늦지 않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약속이 생겼어. 나 잠깐 나갔다가 오후에 들어올께.”
“뭐야? 나랑 쇼핑가기로 했잖아.”

윤아가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비쭉 내밀었다. 서은은 웃으면서 그녀의 앞머리를 살짝 흐트러뜨렸다.

“빨리 들어올테니 쇼핑은 오후에 가자. 지금은 메이크업 좀 부탁해.”
“메이크업? 데이트야? 아니면 맞선? 일단 씻고 나와. 언니가 완전 예쁘게 꾸며줄테니까.”

윤아는 금세 표정을 풀고 해쭉 웃으면서 서은을 떠밀었다. 서은에게는 둘도 없는 절친이였지만 생일이 좀 빠르다고 항상 언니로 자처하는게 문제였다. 서은은 머리를 한번 흔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

약속시간 5분전, 서은은 오주명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감독계의 황제답게 오감독의 사무실은 도심에서 제일 크고 화려한 건물에 자리잡고 있어서 찾기 쉬웠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8층 회의실로 올라오시랍니다.”

데스크 직원이 그녀를 엘레베이터로 안내했다. 그녀는 8층에서 내린 후 회의실을 찾아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누군가 문을 열었고 안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있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녀는 그만 주춤하고 말았다.

“임서은씨, 어서 오세요. 오주명입니다.”

테이블 제일 안쪽에 앉은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굵은 눈썹에 진한 눈꼬리, 카리스마 넘치는 강한 인상의 30대 남자였다. 그의 예리한 눈길은 서은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가 다시 테이블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로 옮겨졌다.

“H대 연극연기학과 임서은씨입니다. 오늘 제가 불렀습니다.”
“안녕하세요. 임서은입니다.”

그녀는 인사를 한후 남자가 권하는 테이블 말석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바로 이 학생이란 말입니까?”

맞은켠 중앙에 앉아있던 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람이 오주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사람의 어조에는 뭔가 불만이 잔뜩 섞었다. 오주명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네. 바로 이 학생입니다.”
“말도 안됩니다. 그리 많은 유명배우들을 제쳐두고 왜 하필 이런 신인을 쓰려고 하는지 전 도저히 이해할수 없군요.”
“이번 사극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왜 그렇게 판단하죠?”
“제 느낌으로요.”

오주명의 자신있는 대답에 날카로운 인상의 사람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런 미팅따윈 필요없고 오감독님의 느낌만 중요하다는 건가요? 이번 사극은 구경 어떤 것인지 감독님도 잘 알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아무런 연기경력도 없는 애숭이 학생에게 이런 배역을 맡긴단 말입니까!”
“이번 배역이 어떤 역할인지 진PD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주연배우는 아니더라도 일단은 여러 언어에 능숙해야 하고, 무술PD님이 요구하는 무예에도 자질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번만큼 제 감을 믿어본 적이 없습니다. 진PD님도 저를 한번 믿어주십시오.”

진PD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한참동안 오주명을 응시했다. 방안에서는 팽팽한 기운이 흘렀고 그녀로서는 눈앞의 이 상황이 불편하고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저…”

두사람은 동시에 그녀에게 머리를 돌렸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마디 내뱉었다.

“신종 오디션인가요.”
“…”
“어떤 제스추어를 취해야 하는 건지…혹시 신인 테스트라도 하는 건가요.”
“…”
“설마 오감독님이 이런 준비 안된 오디션을 준비했다고 생각되진 않아서요.”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말에 놀랐다. 방안의 모든 사람은 뜨아한 표정이였고 그녀는 차라리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은 마음이였다.

아무리 눈앞의 상황이 자신에겐 무례한 일일지라도 그녀는 지금 한낱 연극연기학과 학생이었고 상대는 감독계의 황제와 엘리트들이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다른 사람들은 꿈에도 그리는 출연기회가 그녀의 눈앞에서 환영처럼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는가! 아무리 그래도 어찌 당사자인 그녀를 앞에 두고 실랭이를 벌인단 말인가.

오감독과 진PD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거의 동시에 머리를 쳐들고 프하하 웃었다. 방안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웃기 시작했고, 그 웃음이 잠시 즘즉해지자 오주명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학교에 휴학신청서를 내셔야겠어요. 축하드려요. 임서은씨.”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그녀의 떨떠름한 표정을 본 오주명은 다시 피씩 웃었다.

“테스트 맞습니다. 지금 저희가 새로 기획한 대하드라마 [만력황제]에서 임서은씨가 꽤 중요한 배역으로 케스팅 되었어요.”
“정말요?”

그녀는 눈앞의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듯 한참 멍해있다가 다시 머리를 들고 오주명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저를…”
“학교에서 추천한 것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임서은씨의 프로필이였어요. 물론 방금전 테스트 통과한 것도 한몫 했고.”
“제 프르필에…뭔가 특별한 것이 있나요?”
“우선 전화에서 언급한대로 무예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기서화는 물론, 한국어, 중국어, 몽고어, 그리고 만족어까지 여러가지 언어를 능란하게 구사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사극의 캐릭터에 꼭 들어맞는 장점들이죠. 솔직히 요즘 이런 신인배우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무예와 금기서화, 그리고 외국어까지…어릴 때에는 그토록 배우기 싫어서 투정 부렸던 일들이 지금에 와서는 자신의 진로에 이토록 도움이 되는 일일줄은.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주명의 사무실에서 나와 숙소로 향할 때에야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듯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의 그녀에겐 이런 특대 희소식에 같이 공감하고 기뻐해줄 친구가 필요했다.

“여보세용?”

항상 그러하듯 윤아의 목소리에는 콧소리가 잔뜩 섞여있었다. 자신에겐 부럽기만 한 애교 필살기, 윤아에게는 그것이 제일 큰 매력이었다. 그 콧소리에 서은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윤아야, 너 오주명 알지?”

다짜고짜 묻는 서은의 말에 윤아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어느 오주명? 감독계의 황제? 그 유명한 오감독? 베이징, 아니 중국에서 제일 알아주는 그 오주명?”

잠시후에야 되묻는 윤아의 말에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응…바로 그 오감독 맞아…윤아야, 나 축하해주라. 나 지금 오감독 만나고 오는 길이야.”
“뭐? 오감독을 만났다고?”
“응. 나 이제 곧 사극 찍게 돼. 내일 사인하러 오라고 했어.”
“뭐?”

뚜…뚜…소리를 내면서 통화가 끊겼다.

그녀는 피씩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윤아는 이런 친구였다. 가식으로 축하한다는 말도 못하는, 그녀에 대한 질투조차 숨길줄 모르는 곧은 성정의 친구였다.

그녀는 늘 그런 윤아가 신경 쓰이고 안쓰러웠다. 생일은 윤아가 좀 더 빠르지만 그녀가 오히려 윤아를 더 챙겨주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쉰후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늘 그러하듯 자금성위의 하늘은 뿌연 회색이었다. 그 회색 사이로 한가닥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그녀의 눈앞을 흐릿하게 했다.  

“참 이상해…분명 기쁜 날인데…난 왜 눈물이 날까.”

그녀는 그 싸늘한 바람에 휩쓸려 떨어진, 땅바닥 한가득 나뒹구는 낙엽을 내려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조윤아…”

서은은 숙소에 돌아서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운 윤아의 이불을 벗겨냈다.

“통화를 끝내지도 않았는데 전화를 끊어? 친구가 잘되는게 그렇게도 질투할 일이야?”

서은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도 윤아는 눈을 감은채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서은에게는 그녀를 달랠 방법이 따로 있었다.

“할수 없지. 원래는 오감독님한테 부탁해서 아무 배역에나 널 넣어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정말?”

윤아가 드디어 눈을 떴다. 그녀의 큰 눈에 어린 광채를 보면서 서은은 풋 웃다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조윤아, 너…”

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크다란 눈에서 눈물흔적을 발견하고 서은은 그녀옆에 나란히 앉았다.

“울었어?”
“화나서 울었지. 남은 학교 다니면서도 기회 빵빵 터지는데, 내 인생은 왜 요 모양 요꼴이냐?”
“윤아야, 그게 아니야…”

서은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니가 왜? 집안 좋지 인물 예쁘지 나긋나긋 여자답지. 너답지 않게 웬 청승이야.”
“난 오히려 니가 부러운 걸. 성적 좋아서 학교에서 추천해줘, 못하는 것 없어서 감독님도 맘에 들어해…암튼 난 너보단 집안 빼곤 뭐든 내놓을 것이 없단 말야. 그리고 그 잘난 집에선 이젠…”

윤아가 말을 중단했다. 서은은 미간을 구기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집에서 왜? 새엄마가 또 괴롭혀?”
“새엄마가 아니고 아빠가…”
“…”

서은은 이 수도권 도시 어느 정부기관에 중요한 한자리를 차지한 윤아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딸을 보러 올때면 학교 학장이며 교수들이 영접하느라 부산을 떨군 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지만 막상 딸에게는 한없이 자상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이어서 그녀가 부러워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항상 그녀에게 딱딱하고 엄격한 요구를 들이대는 그녀 아버지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선을 보래…”
“선? 공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미뤘었잖아.”
“이번엔 상대까지 다 골라놨어. 이까짓 연극 뭘 배울수 있냐며, 삼류배우로 될바엔 차라리 시집이나 잘 가라고 하셨어.”
“…”
“어차피 지금까지 작은 배역 하나 건지지도 못한 거 아니냐면서.”

문득 그녀가 윤아의 어깨를 잡았다. 윤아의 말을 듣자 한가지 어렴풋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당돌하게 보이기는 하겠지만 어쩌면 오주명이 대답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무 신경쓰지 마. 내가 도와줄께.”
“니가 어떻게 돕냐.”

윤아의 미심쩍은 표정에 서은은 담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윤아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입밖으로 나온 것은 다음날 오주명과의 계약서에 싸인을 하기 직전이었다.

“감독님.”

그녀는 조금 민망하지만, 그 어떤 결의가 다져진 얼굴로 오주명을 보았다.

“계약사항에 이의는 없지만…작은 조건을 하나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오주명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한번쯤은 들어주셨으면 하는 부탁이어서요.”
“말해봐요.”
“학교에 제 절친이 있는데…이번에 마땅한 역할이 없을까요? 괜찮은 친구여서 추천하고 싶습니다.”

오주명은 한참 말이 없었고 서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실은 그 친구 사정이 딱해서, 이번에 꼭 같이 출연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정입니까.”
“그건…그 친구 프라이버시인데, 만일 이번에 기회가 없다면 그 친구는 앞으로 원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몰라요…전 그 친구가 그렇게 사는 걸 원하지 않구요.”
“그러니까 지금 그 친구와 임서은씨 사정을 내걸고 제게 딜을 하는 겁니까.”

오주명의 냉정한 얼굴을 보며 서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바로 그때 오주명이 말했다.

“내일 데려와보세요.”
“네?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급히 머리를 숙여 인사했고 오주명은 알릴락말락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대답했는지 아세요?”
“네? 왜…죠?”

오주명은 펜으로 계약서를 가볍게 두드렸다.

“임서은씨가 여기에 아직 싸인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
“그리고 만일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어쩌면 임서은씨는 싸인을 하지 않을 거니까요.”
“죄송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오주명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죄송할 것까지야 없어요. 그게 임서은씨 선택이고,내 선택은 그 조건에 대답을 하는 거니까요.”
“…”
“다만 그 선택이 후회를 낳지 않을지, 그것이 과연 그 친구를 위한 길인지…그건 임서은씨가 이쪽 업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알아가야 할 일이지만 말입니다.”

뭔가…오주명의 말은 굉장히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계약절차 때문에 서은은 그 말들을 미처 곰곰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계약을 마치고 대본을 넘겨받을때 오주명이 스치듯 말을 건넸다.

“임서은씨 무예는 언제 익히셨죠? 금기서화(琴棋书画)는 물론 팔괘, 병법까지 다소 알고있다고 하던데…요즘 학생들 치고 좀 특별한 케이스인데요.”
“이건 다 아버지때문이에요.”

그녀의 대답은 어딘가 불퉁했다. 친구들이 뛰어놀 때에도 혼자 피말리는 연습만 해야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마의 실종사고가 있은 다음 아버지는 더욱 과묵해진 듯 싶었다.

평소 딸에게 잔소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입을 열지 않는 아버지를 보고 동네 사람들이 혀를 차던 기억도 떠올라 그녀는 잠시 얼굴을 흐렸다.

“아버지 덕분이 아니고 때문이라…”

오주명은 뭔가 생각하는 듯 보였다.

“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제게 무예를 가르쳐주셨어요. 아버진 무술관 관장이셨어요. 그리고 금기서화, 팔괘나 병법같은 것도, 제가 어릴때 무술관에 들리신 어떤 스님께서 그런 걸 배워두면 제가 언젠가는 쓸 때가 있을거라고 하셔서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그녀는 말하다 말고 너무 개인사를 오픈하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오주명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친구분 데리고 오세요. 오디션을 볼께요. 서은씨는 카메라테스트 해보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밝게 대답했다. 오주명의 사무실을 나선 그녀는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다. 윤아에게 이번 출연기회가 있게 되면 집에서 주선한 맞선을 핑계대어 미룰수 있었다. 윤아가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가 케스팅된 일을 아버지가 알면 기절초풍할 일이었지만 그녀는 잠시 그 걱정은 내려놓기로 했다. 이제부터 그녀 인생은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이고 모든 고생의 끝, 행운의 시작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튿날, 그녀와 함께 오주명의 사무실을 찾은 윤아는 오디션에 무난히 합격되었고 극중의 꽤 비중이 있는 조연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대본을 훑어보던 윤아는 잔뜩 볼이 부어 오주명에게 말했다.

“감독님, 좀 더 괜찮은 역할 없을까요?이건 별로 매력 없는 캐릭터잖아요.”

오감독은 무표정한 얼굴로 윤아를 보았다.

“그래요? 조윤아씨에겐 딱인데, 윤아씨라면 그 캐릭터를 잘 소화해낼 거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도 이건…좀…”

윤아는 손에 든 대본을 보며 불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개성도 없고 성격도 나약하고…”
“…”
“자기것이 아닌걸 욕심을 내고 민폐캐릭터에 답답하기까지 하고…”
“그럼 궁녀역이 하나 남아있는데 바꿔드릴까요?”
“감독님…”

윤아는 체념했는지 어깨를 떨구고 맥없이 중얼거렸다.

“아니요, 원래대로 할께요. 다시 보니 괜찮은 캐릭터 같아요.”

……

만일 시간을 되돌릴수만 있다면…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후에 서은은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날은 그녀 인생을 통털어 슬프도록 불행한 날이였고, 바로 자신의 운명이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 갈길을 잃은 불운의 시작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바꿀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 숙명때문에 엇갈린 인연으로 그녀는 얼마나 큰 고통과 시련을 감내해야만 했던가…만일 시간을 되돌릴수만 있다면…

“왜 아직 연락이 없지? 무슨 문제가 생긴게 아닐까?”

카메라 테스트 이후 촬영이 시작되기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오주명에게서는 가타부타 연락이 없었다. 윤아는 서은을 향해 투덜거렸고 서은 역시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는 중이었다.

“계약서도 다 싸인했고 문제 생길 일이 뭐 있겠어? 호사다마라고 일들이 좀 있겠지. 좀 더 기다려보자.”
“그날 보니 케스팅은 거의 다 된 거 같은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끌까.”

윤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서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은은 발신인이 오감독인것을 확인하자 윤아에게 조용하라는 손짓을 한 후 전화를 받았다.

“네, 감독님.”
“임서은씨, 오후에 교외 목장으로 나와주세요. 대역배우를 써야 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오주명의 말에 서은은 윤아를 돌아보았다.

“감독님…오늘은 저 혼자 가는 거에요?”
“네. 혼자 오세요.”
“혹시…촬영은 언제부터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남주 스케쥴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가지 다른 준비를 해두어야 하니 조급해하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서은이 통화를 끝내자 윤아는 품에 안고있던 쿠션을 벽쪽으로 집어던졌다.

“내가 그럴줄 알았어. 캐릭터도 마음에 안들더라니, 또 너 혼자 오라고 하지?”
“대역배우 써야 하는지 확인만 한대. 갔다 금방 올께.”

서은은 윤아가 한시라도 자신을 떨어지기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학교생활동안 쭉 이어져온 그녀들의 우정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윤아의 태도는 반상적이었다. 서은이 외출복을 갈아입은 후 윤아의 얼굴에는 황황한 기색이 더 짙어졌다.

“나 말이야, 오늘 아침부터 이상하게 가슴이 떨리고 불안해. 가슴 떨리는 건 내게 징크스거든. 너 오늘 혼자 가서 조심해…알았지?”
“언제는 니가 날 지켜줬냐…그래도 항상 내가 널 보호해줬지. 안그래?”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걱정 붙들어매고 기다려. 올때 니가 좋아하는 햄버거 사올테니까.”

서은은 버릇처럼 윤아의 머리를 한번 흐트러놓은 후 그녀의 잔소리를 뒤에 남기고 숙소를 나섰다.

윤아의 불안과는 정반대로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았고 하늘과 이어진 푸른 목장에서는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감독 오주명은 승마복을 갈아입고 나오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목장에 서있는 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본은 봤어요?”
“네, 밤샘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촬영 일정은 아직 받지 못했어요.”

그녀의 대답에 오주명은 머리를 끄덕인후 살짝 미간을 구겼다.

“촬영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남주 스케쥴도 문제가 있고, 만력황제역을 케스팅 못했어요. 그건 중요한 캐릭터여서 만전을 기해야 하거든요.”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고 오주명은 다시 목장쪽을 바라보았다.

“뭐 어차피 시간이 있으니까, 당분간 기마술을 조금이라도 익혀두어야 합니다. 말은 탈만하겠어요?”
“네, 전 대역을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그녀의 말에 오주명은 머리를 저었다.

“말들이 달리기 시작하면 약간의 기술을 가지고는 누구도 컨트롤 못합니다. 난 내 배우들이 그런 위험부담을 안고 가게 할수 없어요.”
“그럼 한번 보여드릴께요.”

그녀는 작게 웃어보인 후 발을 한번 구르고 몸을 날려 제일 가까이에 있는 밤색 말을 가로탔다. 말은 잠시 움찔거렸지만 그녀가 고삐를 팽팽하게 당기자 금세 고분고분해졌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오주명을 돌아보았다.

“대역 안써도 되죠?”

오주명이 놀라운 기색에 그녀는 한번 더 미소를 지어보인 후 채찍을 휘감아 말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말은 깜짝 놀라 앞발을 들더니 곧 네굽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목장을 한바퀴 달리고 돌아오자 오감독의 옆에 누군가가 와 서있었다. 서은은 그를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진PD님.”
“오감독이 사람 하나는 제대로 골랐어.”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진PD가 웃으면서 말했다. 오주명은 서은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PD님은 그날 반대가 심하시던데요.”
“신인이고 경험이 없어서 이 배역을 감당하지 못할가봐 그랬죠. 하지만 면접전엔 검토해서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진PD의 말에 오주명은 머리를 돌려 다시 말위의 서은을 바라보았다.

“제 느낌 믿으라 하셨잖아요. 처음부터.”
“우리 오감독님도 30대에 들어서더니 드디여 필이 제대로 꽂히셨나…”

진PD의 농담이 바람을 타고 서은의 귀에까지 들렸다. 서은은 살짝 민망해졌고 오주명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건 아니구요…뭐랄까…굉장히 친숙해요. 꼭 마치 원래 알고있던 사이처럼.”
“에이, 그런 멘트가 바로 작업인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PD의 말에 오주명이 대답하기전에 서은이 고개를 돌려 오주명에게 말했다.

“감독님, 이런 온순한 말 말고 좀 더 빠른 말이 없나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기마신이 많긴 해도 대역을 쓰면 되니까 그만하면 됩니다.”

오주명의 말에 진PD가 하하 웃었다.

“오감독이 벌써 챙기는 걸 좀 봐. 임서은씨 본인이 괜찮다는데 뭘 그래요.”

진PD는 고개를 돌려 목장주인을 불렀다.

“여기서 제일 빠른 말이 있으면 한번 끌고 나와보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얼마 안지나 목장주인이 끌고 나온 말은 피빛처럼 진한 색상의 늠름한 적토마였다. 서은이 아까처럼 몸을 날려 말잔등에 올라타자 말은 머리를 내저으며 거센 코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줄곧 놀란 눈길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오주명이 낯색을 변하며 손을 저었다.

“안됩니다. 이건 너무 위험할 거 같은데요.”
“감독님, 괜찮아요. 제가 조심할께요.”

서은은 조심조심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다들 손에 땀을 쥐고 그녀가 말을 조련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이 머리를 숙이고 그녀를 태운채 씩씩거리면서 목장을 한바퀴 돌고 와서야 그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괜찮다는데도.”

말이 목장을 두번째로 돌때, 서은은 머리를 돌려 오감독을 바라보았다. 오주명의 걱정어린 시선에 진PD의 짓꿎은 농담이 생각나서 왠지 웃음도 나왔다. 바로 그때 문득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한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 승마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하자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킨 후 응답버튼을 밀었다.

“네, 아버지.”
“어디냐.”
“…학교에요.”
“윤아에게서 들었다. 네가 이젠 내 말을 안듣더니 거짓말까지 늘었구나.”

아버지의 냉랭한 말투에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죄송해요…”
“그 계약 취소해, 당장.”
“네? 그게 무슨…”

그녀는 문득 갑갑해졌다. 항상 이런식이였다. 매사 딸의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딸의 모든 일을 결정해버리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이사도, 진로도, 그리고 이번 일도 그랬다.

단순히 아버지 몰래 사극 배역 하나 맡은 것이 뭐가 그리도 큰 일이라고, 이미 다 사인까지 한 계약을 취소하라고 하는 걸까…그녀는 말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핸드폰을 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 제 일은 제가 정하게 해주세요.”
“그래서 학과도 네가 원하는 걸로 선택하게 했었다. 사학과가 아닌 연극연기학과로.”
“하지만 그것 빼곤 다 아버지 마음대로였어요. 연극연기학과도 제가 그때 금식까지 해서야 겨우 대답하신 거구요.”
“그래서, 네가 내 말대로 해서 지금까지 뭐 잘못 된 거라도 있었더냐?”
“그 말이 아니잖아요.아버진 항상…”
“당장 취소해. 그 계약.”
“죄송하지만 이번만은 그럴수 없어요. 이번은…”

바로 그때였다. 그때까지 씩씩 코김을 내뿜던 말이 갑자기 앞다리를 공중에 쳐들고 한번 내젓더니 등위의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네굽을 안고 냅따 뛰기 시작했다. 뜻밖의 소동에 그녀쪽을 주시하고 있던 오주명의 얼굴은 금세 사색이 되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미약하게 공중에서 흩어졌다 .

“감독님…말이…멈추지 않아요…”

오주명은 나는듯이 그녀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사고는 그렇게 눈깜빡 할 사이에 일어나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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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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