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방금 뭐라…하셨습니까."

서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쩐지 울컥 하는 기분도 들었다. 숲속에서 혼자 보내졌을 때부터 알아야 했었다. 자신은 이여백에게 그 어떤 도움이 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먼저 보내려고 의도한다 쳐도 말을 꼭 이런식으로 해야만 할까. 더 화나는 것은 이여백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언제는 제가 총병부로…광녕으로 오자고 했습니까. 금주까지만 동행한다고 분명히 말씀 드렸을텐데요."

울컥하는 기분에 이어 섭섭함과 원망이 생겨났다.

"저는 형님께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하찮은 존재였군요."
"…"
"언제는 형제라면서요. 앞으로는 형제가 있으니 더이상 혼자가 아니어도 된다면서요…"

그녀는 말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큰일이다…하필이면 이럴 때 눈물이 나오려 하고 있다니…입술을 깨물며 애써 자제력을 되찾은 그녀는 동굴입구로 불어들어오는 냉랭한 산바람을 한번 들이켰다.

"뭐라 정확한 이유를 말씀하시기 전엔, 저 절대 못갑니다. 아니, 안갑니다."
"네가 싫어졌다고 하지 않았는가."

웃음이 나오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는 그의 대답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처음 만났을때 느꼈던, 이여백의 공허하고 냉랭한 분위기는 결코 자신의 착각이 아니였다.

그동안 그녀가 잠시 잊고 지냈던, 부마자리를 마다하고 부귀영화에 통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 남자의 마음은, 사실 그 어떤 사람도 비집고 들어갈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닫혀있고 얼어있다는 것이 바로 그녀가 마주한 현실이였다. 그녀는 맥이 풀리는 감을 느꼈다. 그동안 그와 어느 정도까지는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것도 자신의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여백은 그런 그녀를 아무 말 없이 바로보기만 했다. 그녀는 그를 한참 주시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좀 있다 날이 밝으면 여길 떠나죠. 총병부도 곧 떠나겠습니다. 그동안 귀찮게 굴어 송구합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동굴을 나서서 동쪽으로 가면 광녕으로 가는 길이 있다."
"제가 어련히 찾아가지 않을라구요."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 쓸쓸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이길로 총병부로 가서 시종을 데리고 바로 가겠으니, 형님께서도 몸조리 잘하시고 이만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알았다."

그녀는 눈을 들어 잠깐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누구한테도 알리고싶지 않은 일이라면…최대한 조용히 처리하시고 가십시오. 명교는 제가 알기론 절대…녹록한 무리들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그럼…이만, 작별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서은은 그에게 머리를 숙여보인 후 담담히 몸을 돌렸다.동굴입구를 빠져나와서 희붐히 밝아오는 동녘하늘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실눈을 지으며 피씩 웃었다.

"이렇게 쉽게 갈줄 알았지? 어림도 없는 일…"

그녀는 주위를 살펴보면서 몸을 숨길만한 장소를 찾았다. 한편 그녀는 방금전 이여백의 반응을 곰곰히 되새겨보았다. 분명 명교의 말에 그는 낯빛을 흐렸었다. 그로 유추해보면 그와 복면의 남자와는 꼭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명교와 이여백이 대체 어떤 사이인지 궁금했다. 한번 궁금증이 일면 그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꼭 답을 얻고야 마는 그녀의 무서운 집념에 아버지도 두손들고 투항하지 않았던가.

"꼭…끝까지 찾아내고야 직성이 풀려하는구나. 그러나 이 세상엔 정답이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하지만 그래도 전 끝까지 문제를 파고들어 최선의 답을 얻어낼 거에요.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었잖아요."

그녀의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리던 아버지…그런 아버지가 곁에 계셨더라면 지금의 자신에게 그 어떤 조언도 아끼지 않을텐데…문득 자신에게 멘토 역할을 하던 철령의 무당 할머니를 떠올리자 그녀는 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여백에겐 아직 할머니의 소식을 알리지도 못했는데…

그녀는 큰 바위 하나를 찾아 그뒤에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인기척소리와 함께 동굴입구에서 싸늘한 살기가 엄습해오는 감을 느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바위뒤에 바싹 몸을 움츠렸다.

"도련님이 날 기다릴 줄 알고있었소."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목소리는 분명 명교 출신인 복면남자의 냉랭한 목소리였다. 그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피씩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녀석이 걸리적거리던데 용케도 빼돌렸네그려."
"빼돌렸다고 하기엔 그렇게 깊은 사이가 아니오. 그냥 연이 다하여 서로 갈길을 갔을뿐."
"허…내가 그 말을 믿을상 싶은가."
"오랜만이오. 우사."

대답대신 화제를 돌리는 이여백의 목소리에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느정도는 짐작은 하고있었지만 막상 이여백에게서 복면남자의 신분을 듣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 명교 우사를 잘 알고있는 이여백에 대해서도 새삼스럽게 궁금해졌다. 저 남자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 진정한 모습이였을까.

"말 돌리지 말게. 자네 말을 믿는 사람이 바보지. 누가 보기에도 두사람은 정이 깊은 사이였는데 말일세."
"이렇게 찾아와서 정작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다니 명교도 예전의 그 명교가 아니군."
"너무 건방떨지 말아. 넌 항상 그게 문제였지."

복면남자의 말투가 확 바뀌었다. 그는 거의 이사이로 내뱉었다.

"그래도 내가 먼저 널 구했다. 내가 아니였다면 네놈은 지금쯤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을 만나야 하는 거라구."
"구하는 방법이 독침이였군그려."

이여백이 피씩 웃으며 말하자 복면남자의 목소리는 한결 더 음침해졌다.

"어쨌든 넌 날 믿지 못할테니…독침은 내가 썼다고 치자. 독이 제거되었으니 시간, 지점 정해서 연락하거라."
"내가 누차 말했을텐데…"

이여백은 차분히 우사의 말을 받았다.

"난 당신과 겨룸할 생각이 없소."
"그게 과연 네놈 생각대로 될까."

복면남자는 또 한번 낮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소리는 왠지 적의에 차있었다.

"난 정말 이해할수 없다. 이런 네가 뭐가 좋다고 아직도 잊지 못하고 계신지. 교주께서 단 하루만이라도 널 거론하지 않는다면 내가 10년은 더 오래 살 것이야."

우사에 이어 교주까지…그들과 엮인 이여백의 정체가 설마…그녀는 잠시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리 호전적인 우사(右使)가 있으니 교주께서 명교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오."
"그래도 너처럼 명교를 배신한 좌사(左使)보다는 내가 더 낫지 않겠나."

우사의 말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가 사람을 잡는 다더니. 좌사…명교에서의 좌사라면 교주 바로 버금가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녀가 알기로는 교주가 자리를 비울때 교주대신 명교를 움직일수도 있는 최고의 지위가 좌사였다. 생각해보니 건곤대나이 보법을 익힌 사람이라면 명교에서의 지위가 적어도 좌우사나 호교법왕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여백은…

문득 금주성밖에서 자객을 만났을 때와 고륵성으로 가는 길에 독침을 피하던 이여백의 번개처럼 날렵한 행동들이 머리에 떠올랐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교묘하게 감추기는 했지만, 이여백의 보법 역시 신출귀몰하는 건곤대나이를 완벽하게 닮아 있었다.

……

무예를 익힌 사람들이 예외는 아니듯이, 그녀는 어릴때부터 무협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녀가 특히 즐겨 읽었던  [의천도룡기]는 바로 명교 교주 장무기(张无忌),광명좌우사 양소(杨逍)와 범요(范遥), 건곤대나이와 의천검, 그리고 명교와 명태조 주원장의 관계를 다룬 소설이었다.

[의천도룡기]는 무릇 무협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첫손에 꼽을만한, 홍콩과 중국에서 몇십년을 거쳐 여러 버전의 영화와 드라마로 끊임없이 각색된 유명한 무협소설이였다. 바로 이 소설에 명교가 등장하고 있었고, 중원에서 사악한 교파라고 불리우는 그 명교에는, 교주가 자리를 비우면 감히 교주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교도들을 마음대로 움직일수 있는 광명좌우사가 있었다.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교주 장무기를 좋아했지만, 그녀는 준수하고 풍류스러우며 무예가 출중하고 총명이 절인하여 강호에서는 [소요이선(逍遥二仙)]으로 불리우는 광명좌우사 양소와 범요에게 더 몰입했었다.

양소는 고독해보이지만 지혜롭고 자부심이 강했고, 범요는 성격이 괴벽하지만 위급한 상황일수록 오히려 자신을 깊숙히 숨기는 인물이였다. 언젠가 숙소에서 그녀가 그 책을 보고 멍해있을때 윤아가 들어오다가 깜짝 놀라 그녀를 흔들었다.

"무슨 일이야? 누가 널 괴롭혔어?"
"아니…책이 너무 슬퍼서 그만…"
"무슨 내용이 그리 슬픈데?"
"양소 말이야…[의천도룡기]의 명교 광명좌사…"
"그 양소가 왜?"
"사랑하는 여인이 죽자 한평생 혼자 살았어. 얼마나 외롭고…허무했겠니. 그 여인이 죽을때 양소도 마음이 같이 죽어버린 거야. 너무 짠하고…안쓰럽지 않니?"
"양소는 자식이 하나 있잖아? 그러니 너무 외롭진 않았을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빈자리를 과연 자식이 채워줄수 있었을까."

윤아는 못말린다는듯 머리를 흔들었고 그녀는 그후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을 우울해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여백과 복면남자는 어딘가 양소와 범요를 닮은데가 있었다. 그녀는 이런 신통한 두 사람을 광명좌우사로 둔 명교 교주의 정체가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그녀의 사색을 깨뜨리며 복면남자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이상 명교 좌사가 아니라고?"
"광명좌우사는 한사람이 겸할수 있소. 난 일찍 명교에서 했던 일을 영원히 묻어두기로 교주와 약조를 했소. 지금 난 더이상 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명교는 광명좌우사를 통합하여 광명사자 한사람으로 직책을 둔다고 전해들었소만."

이여백의 말에 복면남자의 목소리가 차거워졌다.

"누구 마음대로, 네가 양보한 자리를 나더러 가지라고? 그래서 내가 너에게 고마워하고 더이상 널 잡고 늘어지지 말라는 건가.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는 안될 걸."

복면남자의 빈정거리는 말에 이여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날 찾아온 걸 교주가 아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걱정해줘서 고맙구려."

복면남자는 야유조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교주는 차기 교주를 선정하느라 북방을 관리할 틈이 없지. 나 또한 교주대신 북방 명교를 관리하라는 교주의 명을 받들어 온 길이라 문제될 거 없고."
"차기 교주를 선정한다면 당신이 제일 유력한 후보가 아니오?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소."

이여백의 의아한 말에 복면남자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너만 아니였어도, 네가 그런 식으로 명교를 떠나지만 않았어도 차기 교주 자리는 내 자리였어. 좌우사 무예 경합을 해서 내게 지기만 하면, 넌 자연스레 명교를 떠나게 되는 거고 난 교주자리에 앉게 되는 건데…왜 얼마 남지 않은 경합시간까진 참지 못했나."

이여백은 잠시 침묵하다가 뭔가 사색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지면 되는 것이오?"
"이것 봐!"

복면남자는 화가 난듯 버럭 언성을 높였다.

"내가 널 싫어하는 게 바로 이런 것 때문이야. 네놈의 그 말인즉 지금 나한테 작정하고 져주겠다는 건가?"
"그런 뜻으로 들렸다면 미안하오."

이여백이 사과조로 말하자 복면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원하는 건, 우리가 죽기를 각오하고 최선을 다해 대결을 하는 것이야. 이로 인해 둘중 하나가 죽더라도 난 원이 없을테니까. 우리 어디 한번 목숨을 걸어보지 않겠나?"

서은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복면남자는 범요를 닮아서 성격도 괴벽한 듯 했다. 둘의 무예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것은 둘째치고 굳이 왜 이런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그런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복면남자는 다시 음침하게 웃었다.

"하긴 네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일에 목숨을 걸겠냐만, 이번엔 절대 그리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야."

이여백은 침묵했고 그녀는 복면남자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네놈의 그 고운 아우 말이다. 친하지 않는 사이라 들었는데 사람을 시켜 명교에 데려와도 괜찮겠나?"

그녀는 이 시점에 자신이 거론될 줄은 생각지도 못해 깜짝 놀랐다. 이여백은 조용히 웃었다.

"그 아일 명교에 잡아들여 무얼 하겠습니까? 게다가 그 아인 이미 광녕으로 가버렸고, 곧 총병부도 떠날텐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복면남자는 말을 마치자 머리를 돌려 날카로운 휘파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크고작은 바위뒤에서 복면을 한 몇사람이 벌컥벌컥 일어섰고, 그들은 서은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전에 그녀가 숨은 큰 바위를 겹겹히 포위해버렸다. 이여백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뭣들 하는 것이요."
"자, 이젠 나오시지요."

복면남자는 대답대신 그녀가 숨어있는 쪽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자신의 존재를 들켰음을 알고 그녀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바위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여백은 그녀쪽을 바라보다가 곧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정말 귀찮은 아이로구나."
"죄송합니다…형님."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방금전 복면남자와의 대화에서 그녀는 그가 자신을 빼돌리려고 무진장 애를 쓴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채 민폐만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크다란 죄책감이 들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복면남자를 향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이겼소."
"지금 장난해?"

복면남자는 주먹을 틀어쥐었다. 복면뒤에서 그의 눈길이 살벌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난 너와 무예겨룸을 하자는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일전에 당신이 날 구했으니 무예로도 이겼소."
"그렇게는 안되지."

복면남자는 싸늘한 눈길로 서은을 한번 바라본 후 다시 이여백에게 시선을 옮겼다.

"네게 사흘 시간을 주겠다. 원기를 완전히 회복하고 이곳에서 다시 만나 한번 자웅을 가려볼 것이야."
"이 겨룸…꼭 해야 하겠소?"

이여백의 말에 복면남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사흘 후 네가 오지 않으면…내 독침엔 더이상 눈이 달려있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할걸세. 임서안이라 했나?"

복면남자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지면 더이상 널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나, 내가 이기면 이 아우의 목숨은 내게 달렸다. 네가 만일 겨룸에 응하지 않아도 이 아우의 목숨은 내것이다."

그녀는 억이 막혀 복면남자를 보았고 이여백은 아무 말 없이 그녀쪽을 주시했다. 복면남자는 그들을 향해 한번  냉소를 하더니 허공으로 몸을 휙 날려 자취를 감추었다. 복면을 한 사람들도 뒤따라 몸을 날려 하나 둘 수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두사람 사이엔 공허한 침묵만 남았다. 그녀는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들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눈물이 눈확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한번 쏟기 시작한 눈물은 걷잡을 새 없이 흘러내렸다.

"미안해요…형님…정말…미안해요."
"되었다."

그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체념어린 말에 그녀는 아예 얼굴을 한쪽으로 돌리고 말았다. 그는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되었다고 했다."
"정말 미안해요…"

낮게 중얼거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의 조용한 한마디가 그녀의 귀전을 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여인이냐."

……

서은은 눈물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동안 줄곧 조심스럽게 정체를 숨기고 행동하던 자신이 언제부터인가 그의 앞에서만은 긴장의 끈을 놓고 있었다. 고개를 든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깊은 눈빛에 잠시 얼굴을 외면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제가 그만…저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너때문이 아니다. 그러니 한낱 여인네처럼 울고불고 하지 말거라.”

이여백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떠나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네가 이번일에 얽히는구나."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문득 이름못할 오기가 서서히 머리를 쳐들었다. 애초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사람이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잊은 채 그의 말투와 행동에 신경을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단지 그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자신의 집념때문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그녀는 청량한 시선을 들어 이여백을 주시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제가 얽힌 것이 아닙니까. 지금부터 제 목숨은 명교…아니, 형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여백은 말이 없었고, 그녀는 또렷하게 이어 말했다.

"우리가 의형제를 맺을때 형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 둘중 누가 누구를 기만하거나 배신을 한다면, 하늘땅이 함께 주살할 거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여백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형님께선 저를 기만하고 있었습니다. 맹세를 어기면 하늘이 가만있지 않을 건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설마 형님께선 하신 그 맹세가 진심이 아니었던 것입니까."
"내가 뭘 기만했다고 그러는가."
"형님께서 명교 사람이었다는 것을요."

그녀의 말에 그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그는 잠깐 그녀를 보다가 머리를 돌렸다.

"과거를 말하지 않은 것과 기만한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남몰래 행동해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녀의 예리한 말에 그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왠지 상처를 받은 듯한 기색이 스쳤다.

"넌 지금 내가…널 속였다고 질책하고 있는 것인가."
"질책…까지는 아니지만."

그녀는 입속말로 낮게 웅얼거렸다. 그는 그녀를 응시하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되었다…이젠 총병부로 돌아가거라. 아버님께 여쭤서 집까지 호위하게 하겠으니 돌아가면 준비하거라."
"저는 싫습니다. 형님!"

그녀는 발을 탕 굴렀다. 이여백은 눈섭을 꿈틀했고 그녀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직도 제 말을 이해 못하셨습니까. 지금 제 목숨은 형님 손에 달린 거라구요."
"하지만 난…이 겨룸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도 낮게 울렸다. 그녀가 그를 주시하자 그는 머리를 숙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명교 살수였던 것을, 세상이 알아선 아니 된다."
"…"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이었다. 항상 담담하던 그의 목소리에 어렴풋이나마 회한이 섞여있는 것은.

"내가 우사와 대결을 한다면 바로 소문이 퍼질건데, 이 일이 알려지면 아버님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요?"
"태조이후로 명조정의 녹을 받는 관리치고, 명교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거의 다 역모로 몰릴 테니까."
"우사가…떠들고 다닐까요."
"사람을 인질로 잡고 위협하니 반드시 이 겨룸에 응해야 할 것인데, 우사가 지든 이기든 나는 이미 그에게 진 것이다."
"괜히 저때문에…"
"저쪽에서 만단의 준비를 했으니 그런 자책은 하지 않아도 된다. 허나 내가 아는 명교는 절대 우사가 개인행동을 하도록 버려두지 않아. 내가 보기엔 이 일은 명교 교주의 지시하에 추진되는 일인만큼, 그 파장도 꼭 작진 않을터."
"명교 지시라면 아는 사람도 많아지겠군요…"
"소문이 퍼지는건 시간문제지. 지금 아버님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이 일로 아버님께 연루를 끼친다면…그 후과는 참담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의 말에 그녀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둘사이에는 장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한낮의 햇살이 나무가지 사이로 촘촘이 내리비칠 때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매미, 사마귀, 그리고 황새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당랑포선, 황작재후(螳螂捕蝉,黄雀在后)가 아닌가."
"네. 춘추시기 오나라왕 부차는 노나라의 땅을 손에 넣은 제나라의 배후를 공격하여 전승을 했지만, 결국은 월나라왕 구천의 미인계에 넘어가 월나라에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
"노나라가 매미라면 제나라는 사마귀이며, 오나라는 황새가 되고 월나라는 황새를 노린 사냥꾼입니다."
"…"
"보통 우리는 눈앞의 일만 보고 생각이 길지 못하면 매미가 될수도 있고, 사마귀나 황새가 될수도 있죠."
"…"
"이 이야기의 결말도 아시는지요. 사냥꾼은 황새를 잡으려다 옆에 있는 물웅뎅이에 빠지게 됩니다."

이여백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형님과 만나 지금까지의 일들을 유추해 봤을때, 우리는 줄곧 매미나 사마귀, 그리고 황새의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이제부터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물웅뎅이를 파놓고 사냥꾼을 데려와야 합니다."
"사냥꾼은 누군가."

이여백의 질문에 서은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누가 지시를 했으면 누가 와야지요."
"명교 교주?"

이여백도 뭔가에 생각이 미친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보면…경성 주막에서, 금주성밖에서 우린 자객을 여러번 만났습니다. 어쩌면 형님께선 애초부터 그 자객들은 명교에서 보냈다는걸 알고 계신 겁니다."
"…"
"망강루에서 형님께선 일부러 주막에 남아 자객을 기다리셨고, 금주성밖에서 제가 상했을 때에도 그 자객이 저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상관이 없으면 당연히 형님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후 여러번 나타난 자객도 거의 다 형님만 노리고 있었지요."
"…"
"어차피 형님을 노린 것이니 피하지 못하면 즐겨야지요. 지금 형님께서 방법을 대시기만 한다면 명교 교주에게 우사의 움직임을 전할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명교 교주만이 우사의 행동을 제어할수 있습니다."
"음…네 뜻은, 교주가 은밀히 지시한만큼 공공연한 겨룸은 원치 않을터."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린 사람을 시켜 소문이 강호에 파다하게 퍼졌다고 교주한테 고해야지요. 그러면 교주는 일을 진행하기도전에 비밀히 하지 못한 우사의 이번 행동을 반드시 중단시킬 것입니다."

그는 시선을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얼핏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너 설마…내가 소식을 전할수 있는 방법까지 알고있진 않겠지."
"만일 제 추측이 틀림없다면…"

그녀는 그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가 들렸던 금주성 주막이…바로 명교의 한 연락지점이 아닌지요."
"넌 참."

그는 못말린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향해 또 한번 빙긋 웃었다.

"왜요? 영민해서 탄복되시는 가요? 형님께선 제가 예지능력보다 더 놀라운 분석력과 통찰력을 갖고있다는걸 자주 잊으시는군요."

그의 입가에 담담하게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는 속으로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짚은 것이지만 어쩌면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알고있는 명교는 그렇게 쉽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조직이 아니였다. 그가 비록 명교를 탈퇴했지만 그의 지위가 높았던만큼 명교의 많은 비밀을 알고있을 것이고, 그가 완전히 명교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길은 단 하나, 죽어서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는 일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걱정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명교엔 왜 계셨던 것입니까."

그의 입가에 그려졌던 미소가 설핏 굳어졌다. 그녀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 말머리를 돌렸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그때 가서 저한테 알려줄수 있겠습니까."

이여백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바로 그 순간 그녀는 그의 얼굴에 스치는 슬픈 기색을 보고 말았다.

……

주야로 말을 달려서 금주성안 주막에 이르자, 실눈의 주점 주인이 이미 문밖으로 마중나와 있었다. 이여백을 맞이한 주점주인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는 이여백의 뒤를 따르는 서은을 힐끗 바라보다가 이여백에게 몸을 기울이며 바싹 목소리를 낮추었다.

"안채로 가서 따로 여쭐 것이 있습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서은이 늦을새라 주점주인의 말을 받자 주인은 얼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분은…"
"전에 동행한적 있지 않습니까. 벌써 잊으셨습니까."
"그게 아니라…"

주인이 말끝을 흐리고 이여백을 쳐다보자 이여백은 머리를 끄덕였다.

"믿어도 되는 사이니 시름 놓으시오."
"안채로 뫼시겠습니다."

주인이 더이상 말하지 않고 앞장서 안내했다. 앞쪽 누각을 에돌아 뒤뜰 한쪽 구석으로 향하자 으슥한 건물 한채가 나타났고, 주인은 그들을 안내해서 방으로 들인후 뒤를 밟는 사람이 없나 문밖을 살펴보다가 안으로 빗장까지 지르고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이여백에게 정중히 예를 행했다.

"좌사님…"
"당주(堂主)는 잊음도 헤프시오. 언제부터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이런 예도 가당치 않소."

이여백은 주인을 일으켜 세운 후 서은에게 머리를 돌렸다.

"이분은 북방 명교 요동지점 당주어른이시다."
"당주어른이시군요. 전에는 눈이 있되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여 인사가 소홀했으니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서은이 깍듯이 읍을 하자 당주는 당황한듯 두손을 맞잡았다.

"이거 큰일입니다. 제게도 이런 예가 가당치 않습니다."

이여백은 담담히 웃어보인후 당주를 향해 물었다.

"오늘은 마중까지 나와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이요?"
"저도 방금 입수한 소식인데, 도련님께선 명교 우사가 북방으로 온걸 알고 계신지요."

이여백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미 만나서 무예겨룸까지 강요받았소. 사흘 기한에서 이미 하루가 지났으니 이틀후 그와 다시 만날 것이요."
"끝내 도련님을 놓으려 하지 않는군요."

당주는 머리를 흔들면서 한탄을 했다. 이여백은 당주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내 이 일로 특별히 당주를 찾아오는 길이요."

당주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도련님이 찾아온 뜻을 제가 모르진 않습니다. 하지만 설령 제일 빠른 말로 소식을 전한다 해도 교주의 지시가 바로 당도하시긴 어려우실텐데요. 제가 이 일을 좀 일찍 알았더라면…"
"교주가 오지 않아도 상관없소. 우사의 행동을 제어할수 있는 교주의 교패가 당주에게 있지 않소."
"도련님께서 모르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일년간 교주께선 각 지역 당주에게 있는 교패를 모두 회수하시고, 이제는 단 하나의 옥패만 쓰십니다. 제에게 있는 교패도 회수를 해갔습니다. 그리고 그 옥패는, 교주를 제외하고는 차기 교주만 가지고 다닐수 있다고 합니다."

이여백이 침묵하자 서은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당주님, 죄송하지만 교패란 뭔가요?"
"일명 목패라고도 하는데, 각 지역의 당주들이 쓰던 패쪽입니다. 교주께서 친히 지시하신 일들은 모두 그 교패를 사용하여 전달했습니다."

당주는 그녀에게 대답한후 이여백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선은 제일 빠른 아이들로 교주에게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우사와 호교법왕을 제외하고는 교주가 어디 계신지 누구도 모르기때문에 우선은 호교법왕에게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틀후에도 당도하지 못한다면 이 일은 제가 따로 방법을 대겠습니다."
"이틀후에 당도하지 못하면 이 또한 내 명이 아니겠소."

이여백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고 그녀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후 이틀간 이여백은 원기회복의 좌선을 다그쳤다. 서은은 할일이 없어 무료한김에 당주를 도와 주막일을 거들었다. 당주는 그녀가 돌아치자 어쩔바를 몰라했다.

"젊은 도련님께 이런걸 시키다니…이도련님이 아시면 저를 나무람 하실텐데요."
"제가 원해서 하는것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밥값은 해야지요."

서은은 웃으며 당주의 말을 막았다. 현대에서 알바를 할때 못해본 일도 아니였고, 주막에 드나드는 손님은 다들 내력이 있는 사람들이여서 그리 피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앞뒤로 드나들면서 강호의 이야기들을 귀동냥 할수 있는 기회를 놓칠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런 주막이나 차집에는 꼭 강호와 조정의 일들을 늘어놓는 이야기꾼들이 있었고 그것은 이날도 예외가 아니였다.

"아니 글쎄…요동총병 이성량의 차자 말일세. 출사도 못한 주제에 공주와의 혼사를 거절했다더군."

서은이 주문을 받아서 막 몸을 돌릴때 누군가가 침을 튕겨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이여백에 관한 화제가 나오자 그녀는 몰래 귀를 기울였다. 같이 온 무리들이 왁작 떠들고 있었고 이야기꾼은 신명이 나서 말을 이었다.

"금상폐하가 어디 가만히 있겠는가. 이건 황실과 조정의 명예와 자존심이 걸린 문제일세."
"가만히 안있으면 어쩔텐가."

누군가가 말을 받자 이야기꾼은 화제에 열을 올렸다.

"그 서안공주는 이태후마마께서 애지중지하던 금지옥엽이라네. 다들 알다싶이 이태후마마의 소생이면 금상페하와 그 공주외엔 더 없지 않은가. 금상폐하와 동복남매인 여동생이 남자에게 혼사를 거절당했으니 그 친오라비가 가만히 있겠는가 말이네."
"거야 모를 일이지. 공주라면 요동총병의 아들에겐 아까운 걸. 신분이 확연히 차이나지 않는가. 폐하께서 오히려 이 혼사를 막으실 걸."
"문제는 그 공주가 눈에 뭐가 씌였는지 이도련님이 아니라면 시집을 안가겠다고 하는거여."

이야기꾼의 말에 주막안의 손님들은 거 참 희귀한 일이라면서 왁작 떠들었다. 그녀는 세간에서 이런 이야기를 환하게 알고있는데 대해 은근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놀란 것은 하나 더 있었다. 황궁을 떠날때 자신은 만력에게 분명 공주가 죽은 것으로 반포하라고 했는데,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만력은 아직 서안공주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않은 듯 했다. 그녀의 의심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는듯 문득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 공주라면 부끄러워 어디 낯을 들겠는가. 차라리 죽고 말겠네."
"말도 말게. 그러잖아도 혼사를 거절당해서 수은을 삼켰는데 천만다행으로 회생했다네. 그후로부터 조석으로 궁녀들이 곁을 지키면서 침실은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한다더군."
"그렇다면 자네 말대로 금상께서도 가만있지 않을 듯 하네. 감히 이 나라 공주를 모독하고 위해하다니…"
"내말이 그걸세. 그래도 저 이성량은 제 아들이 어떤짓을 저지른지도 모르고 제가 뭐 요동 제후가 되기나 한 듯 거들먹거리니 말이네."

그녀는 듣다듣다 불쑥 화가 치밀었다. 솔직히 명장 이성량이 아니라면 금주성 백성들이 이렇게 한낮에 주막에 앉아서 차나 마시면서 소일할수 있겠는가. 그녀의 이런 생각은 걷잡을수 없이 입밖으로 불쑥 튀어나갔다.

"재간있으면 어디 요동총병이 되어서 저 만주벌을 휘어잡는게 어떻겠소. 여기서 이런 이야기나 팔지 마시고."

주막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고, 이야기꾼은 허공에 삿대질하던 손을 멈춘 채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런 사람들에게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인 후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뜰로 향하는 문을 지나칠 무렵 문득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그녀는 하마터면 그 사람의 몸에 얼굴을 박을뻔 하였다. 눈을 든 그녀는 미목이 청수한 눈앞의 사람의 이채어린 눈빛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차갑지만, 왠지 그녀에겐 낯설지 않은 눈빛이였다.

"우사…?!"

남자는 천천히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뒤이어 그의 손이 허공에서 한번 번뜩하자 곧 코를 찌르는 은은한 향기와 함께 그녀의 눈앞은 차츰 희미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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