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교주…
교주??
교주!!!

물뿌린듯 조용한 마당…자객들은 마당 한가득 꿇어앉아서, 땅에 이마를 붙이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마저 그대로 얼어붙은 느낌이었고, 우사는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아니…이럴수 없어. 이건 말도 안돼…어떻게 이런 일이…성화…명교…옥패…”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었다. 마당 한가득 꿇어앉은 자객들을 멍하니 내려보다가, 맨처음 그녀의 머리를 스치는 것은 바로 이여백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그리고 그녀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그만 발견해버렸다. 그의 눈에 깊게 가라앉은, 그 자신도 애써 억제하려는 진한 불신의 눈빛을.

최악이다. 눈앞의 상황은 그녀가 상상했던 모든 것 이상으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녀를 주시하는 이여백의 눈빛은 일순 착잡해졌다가 다시 담담한 냉정을 회복했다.

“교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에 그녀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아닙니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가로저었다. 우사는 그때까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 했고, 그녀는 우사와 자객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이여백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손에 와 닿았다.

“교주를 상징하는 옥패가, 그대의 손안에 있거늘.”
“이것…말입니까.”

그녀는 급히 옥패를 내렸다. 그러던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에야 자신이 옥패의 뒷면을 내보였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는 깊숙히 미간을 구겼다. 옥패 뒷면에 완연하게 새겨진 성화의 무늬가 그녀의 눈을 자극했다.

정면에 만력이란 글자가 새겨져있는 옥패 뒷면에 명교를 상징하는 성화의 표시가 있다니. 왜 여태껏 주의하지 않았던가…최악이다…아니, 최악이 아닌 극악이다…말도 안된다…그리고 이런 말도 안되는 오해가 벌어져서는 아니 된다…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흐트러진 시선이 이여백의 얼굴을 향했다. 그녀는 왠지 머리속이 어지러웠다.

“이건…이건 오라버니가…주신 것입니다.”

이여백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걸렸다. 애당초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것이 분명했다. 하긴 그녀 스스로 듣기에도 두서없었다. 그녀는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몸을 홱 돌려 우사와 자객들을 마주했다. 우사는 망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문득 손을 머리위에 올려 상투에 꽂은 은잠을 빼냈다.

까만 머리카락이 비단결처럼 쏟아져 내렸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흰색 도포 차림으로 바람에 가볍게 떨고있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름답다 못해 진흙탕에 떨어져서도 청초한 자태를 잃지 않는 한떨기 부용꽃을 방불케 하고있었다. 그 유려한 모습에 우사는 놀라 입을 벌렸다. 그녀는 다시 옥패를 정면으로 쳐들었다.

“이보시오, 금의위 지휘사. 아무리 명교 우사라 해도, 이 옥패도 못알아본단 말씀이시오.”
“…?”
“교주라니 이 무슨 망발입니까! 어서 부하들을 일어서라 하세요!”

그녀의 호통소리에, 우사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주시했다.

“그 옥패는…”

우사는 아까 자객들이 꿇어앉았을 때보다 더 놀란 듯 했다. 그는 한참 서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로 입을 열었다.

“내가…지금 뭘 잘못본 건 아니겠지? 금상의 옥패가…”
“…”
“금상폐하의 옥패가 왜 그대 손에…”

문득 뭔가 짚힌 듯 우사의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못믿겠다는 듯 그녀와 옥패를 번갈아보다가 황급히 검을 내리고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공주님…”

우사의 말에 자객들은 한번 더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옥패를 내렸다. 최악의 상황을 바로잡고자 노출한 신분이었으나, 이제 더이상 이여백의 반응을 볼 용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금의위는 이번 길에 폐하의 은밀한 명을 받잡고 요동으로 왔사옵니다.”

잠시후 우사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주님을 찾아 속히 환궁시키라는 폐하의 전교입니다.”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이여백의 시선을 마주할수 있었다. 우사의 말에 살짝 흔들리긴 했어도 그의 얼굴표정은 항상 그렇 듯 침착했다. 그는 예의 그 깊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다가,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자조섞인 말투로 말했다.

“여백이 참으로 어리석군 .”
“형…님.”
“원수를 지기로 착각했었다니.”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차거운 말과 냉랭하게 웃는 모습에 슬프고 참담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사는 이여백의 말을 듣자 다시 검을 바로잡고 호통쳤다.

“네놈이 정녕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냐! 금지옥엽의 공주님께 그 무슨 고약한 말버릇이냐! 그리고 어찌 예도 올리지 않는단 말이냐!”

이여백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객들이 땅바닥에 납죽 이마들을 찧었다.

“공주님…눈이 있어도 망울이 없어 공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죄 용서하시옵소서.”

그녀는 자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여백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처연한 시선을 마주하면서 여전히 딱딱하고 냉랭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공주님…소인이 인사 드리겠습니다.”
“…”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입에서 그 호칭과 존대를 듣는 순간 눈에는 보이지 않는 크다란 간격이 두 사람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감을 느꼈다. 그녀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며 그가 살짝 입꼬리를 틀었다.

“이젠 그만 환궁하시지요. 요동이 그리 재미있는 놀이터는 아닙니다. 속고 속이는 재미도 이미 사라졌으니.”

쨍…

그녀의 손에서 옥패가 미끌어 떨어져,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쟁쟁히 마당에 울려퍼졌다. 우사와 자객들은 그대로 어정쩡하게 마당에 꿇어앉아 있었고, 그녀는 싸늘하게 식은 이여백의 얼굴을 아득히 바라보다가, 눈앞의 상황에 절망을 느낀 나머지 주르륵 눈물을 떨구었다.

……

“난…난 아직도 석연치 않네.”

숨막힐 듯한 정적이 감도는 민가 마당에서 우사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신음 비슷이 울렸다.

“금상의 옥패에 어찌 성화의 상징이…어떻게 이런 일이…”

우사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이여백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깊이 주시했다. 그녀는 눈물을 거두고 시선을 들었다. 그의 냉혹한 시선과 마주하자 차츰 뜨거웠던 마리가 식어가면서 그녀는 냉정을 되찾았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자 방금전 우사의 말을 단색으로 뭔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옥패를 주어들었다. 성화 무늬가 있는 옥패에 역력히 새겨져있는 만력이라는 두글자가 그녀의 의심을 더한층 확인시켜 주고있었다. 만력…옥패…명교…교주…

“지휘사님, 우선 저 사람들을 뒤로 물려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또렷한 말에 우사는 고개를 들었고, 이여백은 한결 냉정한 눈길로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의 비장한 얼굴에 우사는 머뭇거리다가 자객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너희들은 잠시 한마장 밖으로 물러가 있거라.”

자객들이 민가 마당을 벗어나자 그녀는 우사를 바라보았다.

“지휘사님…어차피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고 지휘사님도 이쯤이면 감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에요. 명교 교주는…”

우사는 그녀의 말에서 풍기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뒤로 물러섰다. 그의 발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공주님…”
“명교 교주는…우사님이 잘 아시는 분입니다.”

우사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그녀는 허구프게 입꼬리를 올렸다. 비밀리에 자객을 길렀다는 만력의 야사는, 결코 후세사람들이 지어낸 허황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명태조 주원장처럼 만력 역시 줄곧 왕권 강화에 명교를 이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사의 반응과는 상반되는 이여백의 차분한 표정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문득 공주에 대한 그의 거부는 단지 그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우사를 바라보면서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명교 교주는, 금상폐하이십니다.”
“…”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만 우사는 여전히 몸을 휘청거렸다. 이여백의 입가에도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우사는 머리를 흔들면서 그녀와 이여백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엔 이보다 그 불가사의한 일도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명교 교주는 금상폐하이시며, 그분은 제게 옥패를 주실 때 이미 당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얼굴은 우사를 향하고 있었지만, 눈길은 곧바로 이여백에게 돌려졌다. 이여백은 그녀의 말을 동조하지도,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은 채 말없이 그녀를 주시하기만 했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그 뒤를 이었다.

“이미 우리 누군가가 폐하의 신분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

우사의 흐트러진 시선도 그녀를 따라 이여백에게 향했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잠시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이 모든 것이 정리가 되는군요.”
“…”
“형님께서 무과 장원으로 용안을 뵜을 때, 분명 폐하의 정체를 알아봤을 것입니다.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도 부마자리를 마다하고, 심지어 출사까지 포기한 것이 바로 그때문이 아닙니까.”
“…”
“명교를 탈퇴한 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조정과 황제의 지배를 받기 싫다는 것이 바로 형님께서 출사를 포기한 제일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
“폐하께서는 그런 형님을 곁에 두고자 공주와의 혼사를 추진하셨고, 그렇지 않으면 명교 좌사로 복귀해달라고 하셨겠죠. 이미 비밀을 알아버린 형님을 완벽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자면 이 두가지 방법밖에 없을테니까요.”
“…”
“망강루 자객과 그동안 우리를 따라다녔던 자객들…그러고보니 자객이 출몰하는 곳엔 꼭 형님이 계셨었군요. 형님께선 목숨을 노리는 위협에 타협하진 않으셨지만, 그동안 줄곧 이를 회피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이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구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저를 접근하셨습니까. 공주님.”

그녀의 말을 자르며 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들려왔다.

“황제는 사람을 잡아 입을 막으려 하고, 공주는 사람을 홀려 미인계를 쓰려고 했군요.”
“형님…”
“이래서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을수록 뒤통수를 치고 배신들을 일삼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정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애써 숨기려 하고있지만 그의 눈빛에 깊숙히 가라앉은 분노를 그녀는 발견할수 있었다. 그녀는 체념의 한숨을 내쉰후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을 똑바로 마주했다.

“형님께선…제가…자청비가 되길 원하셨지요.”
“…”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자청비 역시 자신을 숨기고 문도령을 접근했습니다.”

그의 눈에 일순간 야릇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뒤이은 그의 냉소가 예리한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박혔다.

“자청비는 여자라는 정체를 속였지만, 자신의 신분을 속이진 않았지요.”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속인건…죄송합니다. 믿어달라고 해놓고…이제부터 숨기지 않겠다고 해놓고…형님께서 제게 여러번 기회를 주신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제가 그동안 망설이고 있었던것이…바로 지금의 이런 상황을 걱정했기 때문이었음을…형님께서도 이해해주시길…기대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고, 그녀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주시했다.

“제가…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공주라는 신분…제겐 중요하지도 않고 버리고싶은, 아니 이미 오래전에 버린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 출신이 죄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형님께서 원하신다면…영원히 제가 누구란 것을 잊고 살수 있습니다. 공주를 버리고 살겠습니다.”
“제가 왜 원해야 합니까. 무엇때문에 원해야 하는 겁니까.”

그의 말이 재빨리 그녀를 중단했다. 그녀는 그래도 마지막 노력을 하고 싶었다. 그녀는 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제가…어떻게 해야 형님 마음이 풀릴까요…말씀만 해주세요…”
“그만 돌아가십시오.”

그는 다시 냉정을 회복했다. 그녀는 살짝 입술을 떨었다. 짐작했던 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더없이 슬프게 들렸다.

“또…가라는 말씀이시군요. 형님…”
“형님이라고도 하지 마십시오. 더이상 제 눈앞에 나타나지도 마십시오. 그것이 저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녀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잔인하다…그정도로 그녀가 싫었단 말인가. 손에 쥐고있었던 은잠의 뾰족한 끝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선득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감각이 없었다. 가슴이 아픈 것에 비하면 이깟 통증이야…

그녀는 시선을 내려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허탈했다. 모든 것이 허탈했다. 염라대왕의 명령도, 자신의 목적도, 그리고 스스로 부여했던 이 시대에서의 사명도 모두가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순수하지 못했던 자신의 목적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진심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을수도 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던 것을. 어쩌면 자신은 그의 마음이 아니라 기본 신임조차 얻지 못하였던 것을.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쓸쓸하게 웃었다.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헛헛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누구 맘대로.”

문득 한쪽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멍해있던 우사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이여백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지휘사님.”
“누구 맘대로 오라 가라 하는가. 공주님은 내가 단연 궁으로 모실 것이고, 너 또한 교주 앞으로 대령해야겠다.”
“지휘사님, 그게 무슨…”

서은은 의아한 얼굴로 우사를 보았다. 우사의 집요함을 그동안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휘사님은 이 일에서 빠지시는게…”
“제가 왜 빠져야 합니까. 교주의 명입니다. 아니, 금상폐하의 명입니다. 교주가 폐하라 하면, 폐하 역시 저의 집안 청산내막을 잘 알고 계실테지요.어쩌면 그래서 저를 금의위 지휘사로 발탁하신 것이 아닙니까.그러니 제가 어찌 그분의 명을 어긴단 말입니까.”
“지휘사님…”
“우선 저놈을 잡아가고 연후에 금상께 저의 죄를 청하겠습니다.”
“형님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지휘사님께서 명교 우사라면, 이런 강호의 도리쯤은 지켜주십시오.”
“공주님, 송구하오나 저는 명교 우사가 아닌, 황궁의 금의위 지휘사 신분으로 저놈을 생포해 가겠습니다.”

우사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그녀는 입술을 옥물었다. 싸움이 불가피하다 여겼는지 이여백은 서서히 검을 빼들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비장한 눈빛에서 그가 절대 우사에게 쉽게 끌려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의 성정으로 보아 옥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질지언정 완정한 돌조각으로 남길 바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철령 숲속에서 누르하치를 만났을 때에도, 동굴에서 우사와 자객들을 만났을 때에도 그는 타협하지 않았으니까. 굳이 그녀를 보호할 필요가 없어진 지금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또한 그녀가 우사를 협박하여 그를 놓아보낸다 해도 그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우직스러운 성정이었다. 그를 무사히 보낼 방법은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당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우사의 눈을 막으려면 그 방법은…피할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써서라도, 그의 자존심만은 지켜주고 싶었다.

만일 이대로 명교 교주, 아니 만력에게 허무하게 끌려간다면…지금껏 지켜왔던 저 사람의 소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있는 한 절대 일이 그리 흘러가게 두지 않을 것이다.

“저도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묵묵히 시선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한점 온기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방금전보다는 한결 공허한 느낌의 눈빛이 그녀의 얼굴이 와 닿았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기억해두려는 듯 그를 깊이 응시했다.

“제가 여자라는 걸 알았을 때, 형님께선 기꺼이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또 제가 형님을 연모한다고 고백했을 때, 형님께선 그에 해당하는 답을 제게 주셨습니다…”
“…”
“…그래서…그래서 저의 진짜 신분을 말할 때엔, 형님께서 그동안 저의 노고와 제가 품었던 마음을 헤아려…부득이 저라는 인연을 끊어내려 하실지라도, 조금이라도 고민을 하고 망설여주실줄 알았습니다…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저의 이런 예지력은…가소로울 정도로 빗나가기만 했습니다.”
“…”
“이젠 더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겠습니다. 더이상 절 믿어달라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의 제 마음…형님께서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신다면…”

그녀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토록 애절한 모습의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도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금세 기색을 일변하며 그녀가 그를 마주하고 섰다. 느닷없는 그녀의 공격태세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저랑 한번 결판을 내시지요.”
“…”
“검을 드십시오. 제가 무예는 형님을 초과하지 못하오나, 지금 형님께서 원기를 회복하지 못했으니 이 대결은 공정한 것입니다.”
“임서은.”

그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크다란 곤혹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었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

그녀는 쌀쌀하게 웃었다.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뒤로 흩날려 한결 비장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형님께선 불꽃과 나비의 삶을 아십니까.”
“…”
“불꽃처럼 한순간을 불태우고 화려하게 스러지는, 나비처럼 제한된 수명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사라지는…저는 그런 삶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
“해서 저는…그 불꽃에 뛰어드는 나비가 되겠습니다.”

그가 그녀의 말을 미처 이해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녀는 허공에 몸을 날리면서 검으로 그를 겨누었다. 쨍강 하는 소리와 함께 검과 검이 부딪쳐 작은 불꽃을 튕겼다. 그가 그녀의 검을 쳐내고 잠깐 뒤로 물러선 사이 그녀는 맹렬하게 두번째 공격을 들이댔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과 흰 옷자락이 바람에 날렸고, 그가 방어하느라 뿜어내는 검기가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다. 우사는 눈앞의 정경에 놀라 멍해진 듯 했고, 자객들도 소리를 듣고 우르르 마당안으로 몰려왔다.

자객들이 비좁은 민가 마당에 들어오자 그녀는 몸을 날려 민가를 벗어난후 그대로 물가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니 이여백이 바싹 뒤따라 오는 것이 보였다. 그뒤로 우사와 자객들도 따라붙은 것을 보며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한번 자웅을 가려보죠.”

물가를 등지고 선 그녀의 청량한 눈빛에 이여백은 여전히 의혹어린 얼굴이었다.

“너…”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우사와 자객들이 그의 등뒤에 당도한 것이 보였다.

“사정을 봐주지 마십시오. 저 또한 그리할 것이니까요.”

말을 마치기 바쁘게 그녀는 또다시 맹공격을 펼쳤다. 검으로 방어를 하던 그의 행동에 차츰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떠올렸다.

“안녕히 가십시오…형님.”

그가 크게 미간을 구겼다. 뒤이어 그녀의 손이 한번 번뜩하자 선득한 검이 곧바로 그의 급소를 노렸다. 그바람이 줄곧 방어만 하던 그는 크게 몸을 틀며 그녀의 공격을 맞공격으로 쳐내려고 검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한마디 내뱉었다.

“미안…해요.”

푹…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입안으로 사라졌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자신의 검이 향한 곳에 그녀의 몸이 스르르 쓰러지는 것을 그만 보아버린 것이다. 그는 손을 거두어 황급히 검을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넌 어찌하여…”

그의 손이 닿은 그녀의 하얀 옷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힘을 거두는 바람에 겨우 심장을 비껴가긴 했지만 그녀의 어깨를 관통한 검상은 얼핏 보기에도 심각한 정도였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녀를 껴안은 그는 잠시 움찔한채로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시선을 내린 그의 눈안에 자신의 가슴에 꽂힌 그녀의 은잠이 보였다.

“너…”

그는 다시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의 아연한 눈빛을 마주한 채 처연히 입꼬리를 올린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를 힘주어 밀었다. 첨벙…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물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물속으로 사라진 그의 모습을 뒤쫓았다. 잠시후 그녀는 물에서 시선을 거두고 두 팔을 내밀어 물가로 다가오는 우사와 자객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쫓을 필요 없습니다. 그 상처에 살아남기가 어려울테니.”

우사는 물속에 퍼진 붉은 피를 이윽히 내려다보다가,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주님께 급소를 찔렸으니 아마 회생하긴 힘들 듯 하옵니다. 하지만 금상께선 산 채로 대령하라 하셨사온데…사람을 풀어 시신이라도 찾아야…”
“지휘사님은 지금 제 부상이 가볍게 보이나 봅니다.”
“그럴리가요.”

그녀의 비아냥에 대경실색을 한 우사는 급히 앞으로 다가와서 그녀의 혈을 몇군데 눌렀다.

“우선 지혈을 시켰사오니 부디 안정을 취하시옵소서.”

그녀는 그제야 맥을 풀고 천천히 물가에 주저앉았다.

“그동안 공주에게 불경의 죄를 저지르고도 감히 검을 들어 공주에게 대항하려 들다니…그 죄는 만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우니 오늘 내가 천도를 빌어 그를 처벌하는 것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폐하께서 아신다 해도 꼭 능지처참하라 명하셨을 것을.”

우사의 말을 그녀는 침묵으로 답했다. 긴장이 풀리자 극심한 통증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차츰 희미해지는 시선으로 우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가까스로 입밖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환궁은 언제입니까.”
“네, 공주님…바로 환궁하셔야 합니다. 금상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태후 마마께옵서도…”

우사의 마지막 한마디를 그녀는 미처 듣지 못했다. 칼로 에이는 듯 한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것이다. 그동안 잔잔했던 강물의 흐름소리가 귀전에 세차게 들려왔다. 그녀는 누구도 듣지 못하게 가만히 웅얼거렸다.

당주님…제발 그 사람 구해주세요…

우사가 다가와서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탕개를 풀고 의식의 끈을 놓았다. 조용히 감은 그녀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소리없이 배어나왔다.

노을비낀 하늘과 피빛 강물이 하나로 어우러져, 우사 일행의 환궁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

총병부 후원.

은은한 달빛이 내리비치는 정자 한가운데 맑은 옥적소리가 홀연히 울려퍼졌다가 금세 사라져버린다. 늦가을 청량한 밤바람이 연못을 스쳐, 정자위에 앉아있는 한 절륜한 남자의 흰 도포 자락을 가볍게 흩날려주었다.

달빛에 비친 남자의 준수한 얼굴은 후광이 비치듯 아름다웠다. 비록 핏기가 없어 다소 창백해보이긴 하나, 그것 또한 남자의 선연한 느낌을 더했다. 남자는 연못에서 시선을 거두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다가 다시 옥적을 들었다. 바로 그때 중후한 목소리가 정자아래에서 들려왔다.

“오늘도 밤을 지새울 참이냐. 총병부가 황학루(黃鶴樓,중국 후이베이성 유명한 누각)가 되겠구나.”

남자는 옥적을 내린 후 정자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올라온 사람을 맞이한 후 머리를 숙여보였다.

“아버님.”
“못난놈.”

이성량은 아들의 수척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직히 한마디 내뱉었다. 뒤이어 그의 눈길은 이여백을 스쳐 연못 건너편의 작은 누각에 잠시 머물렀다.

“상처는 완전히 회복 되었느냐.”
“네.”
“이번엔 외상에 중독까지…대체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 것이냐.”
“…”
“그 궁인은 사람을 붙여 경성으로 호송했느니.”
“네.”
“언녕부터 알고 있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더냐.”

이성량의 어조는 꾸지람 보다는 한탄에 가까웠다. 이여백은 조용히 눈을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아버님 또한 진작 알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알고있은 것과 아버님께서 알고 계신 것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난 단지 그 아이가 여아란 걸 짐작했을 뿐이다.”
“저 역시 그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굳이 더 보태자면 황제가 보낸 설객 정도로…어찌 공주인줄 알았겠습니까.”

이여백의 말에 이성량은 가만히 그를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너와 그 아이의 인연이다.”
“그렇습니까.”

이여백의 눈빛에는 침울한 기색이 어렸다.

“하필이면…공주였습니다. 만일 이런 것이 인연이라면…전 차라리 머리 깍고 불교에 귀의해 세상사 모든 인연을 잘라내겠습니다.”
“못난자식.”

이성량은 또 한번 나직히 내뱉었다. 그는 뒤짐을 지고 정자위를 몇발자국 거닐다가 다시 이여백의 앞에 와서 우뚝 멈춰섰다. 이여백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어느새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래전에도 같은 말을 한적 있었지. 설마…아직도 이 애비를 원망하는 것이냐.”

이여백은 머리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이성량은 멀리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네 어미가 그리 된후…네가 줄곧 날 원망한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성량은 고개를 돌려 아들을 깊이 주시했다. 이여백은 여전히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고, 이성량은 단념한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일개 변방의 조선인의 후손으로서, 출사를 하고 요동의 제후가 되는 일이…어디 그리 쉬운줄 아느냐.”
“아버님의 품은 뜻이 단지 그뿐이었습니까.”

이여백의 말에 이성량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드디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정자를 내려갔다. 이여백은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고 옥적을 내려다보았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어머니를 희생하셨겠습니까.”

파란 빛을 띈 옥적이 그의 눈앞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

12년전.

“어머니…”

용모가 준수한 어린 사내아이가 한 부인을 쉬임없이 잡아흔든다. 부인은 망연한 기색으로 한참 묵묵히 앉아있다가, 천천히 사내아이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백아…”
“어머니…왜 이러십니까. 아버님은 왜 그리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여진의 여인들을 놓아준 것이 왜 죄가 되는 것입니까. 전에도 자주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사내아이의 또렷한 말에 부인은 서글프게 웃었다.

“여백아…내 한낱 부인의 약한 마음으로, 그만 큰 일을 그르쳤구나.”
“어머니…”
“하필이면 유왕부(裕王府,유왕은 융경제,만력제의 아버지)의 첩부인이 와있는 동안, 여진과 사사로이 포로를 주고받는 일이 알려졌으니, 내 미천한 아녀자의 식견으로 네 아비의 전정을 그르친 것이 아니냐.”
“그게 왜 큰일이 되는 것입니까.”
“이 일이 아니었으면 네 아버진 이제 곧 철령위 지휘첨사로부터 영전해 요동총병의 관직을 받게 될터인데.”
“유왕부의 첩부인라면 혹시 저희와 동성인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머니께서 그분 역시 조선인의 후손이라 친숙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오니 어떻게 그분께 부탁하여 이번 일이 조정에 알려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사내아이의 차분한 말에 부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선 부인은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별채쪽으로 향했다. 별채에 앉아있던 한 기품있는 여인이 부인을 향해 화려한 미소를 지었고, 부인은 그 여인을 향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동생…한가지 청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여인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부인을 잡아 일으켰다.

“부인님…그동안 유왕부의 미천한 시비인 저를 친자매처럼 대해주셨으면서, 오늘의 이 거동은 어인 일이십니까.”
“동생이 유왕부에 돌아가게 되면, 혹여 조정에 여진과 포로를 주고받은 일이 거론된다면, 모두 이 사람이 부덕한 탓이라 가부와 관련이 없음을 유왕님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부인의 간절한 말에 여인은 영문을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이는 요동에서 자연히 알아서 할 일일터인데 조정이 왜 왈가왈부 하겠습니까. 이 동생이 말을 나르는 일은 없겠사오나 혹여 지휘첨사님께 불리한 공론이 오간다면 꼭 유왕님께 좋은 말씀 올리겠습니다. 부인께서는 부디 마음을 넓게 가지시고, 부중에서 조용히 정양하시옵소서.”

여인의 말에 부인은 몸을 일으켰고, 여인은 얼굴을 돌려 사내아이를 바라보면서 살풋이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가 여백입니까.”
“여백이 아직은 나이가 어려…진왕비마마님(유왕의 정실부인)께서 괜한 마음을 쓰실까 걱정입니다…”

부인이 말끝을 흐리자 여인은 또 한번 빙긋 웃었다.

“왕비마마께서도 지금 당장 혼사를 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옹주님께서 장성하시면 보자고 하시면서 저더러 꼭 둘째도련님을 잘 살펴보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어리시긴 해도 둘째도련님의 총명과 자질에 대한 명성이 조정에 워낙 자자해서…한다하는 명문가 자제들도 그 기에 눌리는 정도니 어찌 욕심나지 않겠습니까. 실은 제게도 소생이 있으나 정출이 아닌지라…욕심뿐입니다.”

여인은 말을 마치자 소매안에서 은잠 한쌍을 꺼내들었다.

“이것은 진왕비마마께서 둘째도련님을 만나면 드리라는 선물입니다. 딱히 선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니 부담갖지 말고 장식품으로 주라고 하셨습니다.”
“어찌 이리 귀한 선물을…저를 대신해 왕비마마께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부인은 한손을 내밀어 여인의 손을 잡아쥐었다. 용과 봉의 무늬가 어린 은잠이 부인의 손에서 반짝거렸다.

“기왕 부담갖지 말라 하셨으니 기꺼이 받고 또 제가 다른곳에 선물해도 되겠지요. 이 은잠은 제가 하나만 받겠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동생에게 선물하고 싶은데 혹 실례가 되지 않을지…”
“실례라니요. 그것은 부인의 마음인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여인의 말에 부인은 은잠중 하나를 여인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동생에 대한 저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받으십시오. 나중에 이 은잠을 보거들랑…오늘의 이 정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

6년전.

“어머니께선 끝까지 그 사람을 믿으셨겠지요.”

아직도 애티를 벗지 못했으나 나이보다 진중한 느낌의 소년이 작은 봉분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오늘은 소년의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6년전 유왕은 상소를 올려 여진족과 사사로운 정을 주고받는다고 소년의 아버지-이성량을 탄핵했고, 이성량은 그후 4년동안 토만과의 처절한 싸움을 거쳐서야 겨우 총병으로 발탁되었다.

그동안 유왕은 유왕부에서 황궁으로 거처를 옮겨 융경제(隆慶帝)로 되었고, 유왕의 첩부인이었던 이(李)씨 부인은 그 아들 주익균(朱翊鈞)이 태자로 책봉되자 황귀비로 일약 신분을 상승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의 운명은 비참했다. 이성량이 유왕의 탄핵을 받고 출세의 길이 막힌 것을 어머니는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렸던 것이다. 유약한 몸은 남편의 냉대와 자책을 이기지 못했고, 일년전 이날 어머니는 그에게 은잠 하나를 남기고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일년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철령의무당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아마 언녕 집을 뛰쳐나왔을지도 몰랐다. 그는 지난 몇년동안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냉대를 잊지 못했다. 아버지가 조금만 따뜻하게 대했더라면, 아무리 어머니의 병이 중하다 해도 그가 장성할 때까지는 더 버티지 않았을까.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는 철령의 무당 할머니에게 동년의 마음을 의지했다. 불교 신자 답게 할머니는 모든것에 숙명론적이었지만, 어쩌면 그런 할머니의 관용과 체념이 그의 상실감을 위로해주었던 것이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잊혀지진 않았다.

“그 누구도 탓할수 없을 때엔 이 세상을 탓해야 하지 않겠는가.”

봉분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에게 누군가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전립을 깊게 눌러쓴 복면인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혼암한 것을 바로잡아야만 밝은 세상이 올 게 아닌가 그말일세.”
“지금같은 태평성세에 어찌 그런 말을…”
“그 천상 무골과 범상치 않은 자질에 그런 구태의연한 말을 하다니.”

소년은 자기보다 키가 조금은 더 커보이는 복면인을 주시했다. 상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지만 그 묘한 끌림을 그는 거부하지 못했다.

“내가 상대하려는 게…누군지 아십니까.”
“상대가 누군들 나랏님보다 크겠나.”

열여섯살의 그날, 소년과 명교 교주의 해후(邂逅)에는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소년은 그렇게 명교에 영입되었고, 6년동안 살수로 훈련받아 뛰어난 무예로 명교 좌사가 되었다. 그동안 그는 교주의 명에 좇아 많은 인물을 제거했다. 매번 교주의 지시대로 움직이면서 그는 그 사람들은 응당 죽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해가 바뀔수록, 그는 자신의 목표와도 점차 가까워 오는 감을 느꼈다. 긴긴 세월 가슴에 품었던 그 원한을 풀수 있는 날이 드디어 오는 걸까. 그러던 어느날 그는 처음으로 교주의 명령에 불복했다.

“장재상(장거정)은 안됩니다.”
“무엇때문이냐.”
“그분은…청렴한 분입니다.”
“해서는 청렴하지만 조정의 분란을 조성했고, 이성량은 사치하지만 나라를 위해 큰 공들을 세웠다. 이 나라 조정 관리들의 공과 실을 어찌 단순한 청렴 두글자로 구분하려 드느냐.”
“하지만 지금까지 명교는 응당 죽어야 할 사람들만 제거해 왔습니다. 그 사람이 죽어야 할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면, 저는 그 일을 행하지 않을 겁니다.”

그의 고집에 명교 교주는 피씩 웃었다.

“죄사가 행하지 않으면 자연 행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응당 죽어야 할 사람이라…그 기준은 누가 정하느냐.”
“적어도…지금까지 명교는 민심에 순응해 악질 관리들만 제거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건 좌사가 그런 명령만 받았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교주님 말씀은 전에도 장재상같은 분들이 명교의 피해자가 되어왔었다는 뜻입니까.”
“좌사가 생각보다 단순하군. 그리 순진해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찌 견딜 것인가.”
“…”
“전엔 어찌하였건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게 세상 이치다. 명교도 명교의 이익을 추구하는 길을 택했을뿐.”

그는 복면에 가려진 교주의 얼굴을 오래동안 주시했다.

“정녕 그렇다면, 저와 교주님과의 인연도 여기까지입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좌사 마음대로 하게나.”

그는 그렇게 명교를 떠났다. 그후 그는 아버지의 지청구에 못이기는 척 무과 과거에 응시했다. 명교 신분을 이용해서 목표를 접근하지 못한다면 이젠 부득불 다른 방법을 써야 할터였다. 그의 이런 희망이 산산히 부셔버린 건 그번 보화전에서 만력황제를 알현했을 때였다.

“경 등은 과연 나라의 동량지재로다.”

머리속이 윙 울렸다. 지난 6년동안 들어왔던 목소리를 그가 못알아들을리 없었다. 그후 황제가 뭐라 더 말했지만 그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나긴 세월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이런 허탈한 반응을 농락이라도 하려는 듯, 황제는 그에게 공주와의 혼사를 제의했고 그는 일언지하에 깔끔하게 거절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보화전을, 황제를, 경성을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를 농락하고 있었어. 이 세상이 다…”

경성을 떠나기 전날 망강루 주막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그는 그리 한탄했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톡톡 뛰는 매력을 가진, 당돌하고 영민한 그녀…그는 자객을 쫓고 자신을 도와나선 그녀에게서 진심어린 눈빛을 보았고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누군가를 믿어보기로 했다.그러나…

……

“하필이면…하필이면 공주였다…궁에서 보낸 자객이라도 좋고, 교주가 보낸 설객이라도 좋은데…하필이면…”

그는 깊은 상념에서 벗어나 혼자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문득 이름못할 화가 치밀어올라 그는 주먹으로 정자 기둥을 내리쳤다. 그 서슬에 소매에서 뭔가 쨍그랑 하고 떨어졌다. 그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어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가슴에 꽂았던 바로 그 은잠이었다.

끝만 뾰족한 은잠이라 상처가 깊지 않았다. 바로 도착한 당주의 구원을 받아 목숨을 건졌지만, 물에 떨어지기전 그녀의 울음을 참는 얼굴을 생생하게 보는 것만 같아서 은잠을 볼때마다 그의 상처는 욱신거렸다.

“미안…해요.”

그의 검에 찔리기전,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분명 그녀는 그리 말했었다. 피할줄 알았다. 아니, 피해야만 했었다. 그녀의 공격을 공격으로 방어하는 그의 검에 그녀가 그대로 마주올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피해야 하는 검날을 몸으로 받아낸 이유는 단 한가지, 그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미안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집요한 우사의 추격을 막는 방법은 바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있었다. 그녀도 잘 알고있는 것을 그는 왜 모르고 있었던 걸까. 그녀가 공주라는 것에,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속여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이성적인 판단을 할수 없었던 그 날, 그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듯한 느낌이었다.

욱신거리는 가슴의 상처 언저리를 누른 그의 시선이 다시 손안의 은잠이 머물렀다. 은잠 다른 끝부분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은잠의 다른 끝은 봉의 무늬였다. 그것을 일찍 발견했더라면 그들의 결과는 달라졌을까.

그가 처음 이 은잠을 봤을 때 다만 그 수공이 범상치 않고 그 모양이 익숙하다고 느껴졌을 뿐이었다. 궁중 하사품으로 보여서 그녀에게 돌려주었으나 후에 그 은잠이 흉기가 되자 당주가 그것을 이성량에게 바쳤다. 이성량은 의식을 회복한 그에게 은잠을 돌려주었다.

“네 어미에게도 같은 은잠이 있었느니.”

드디어 그 은잠이 모양이 익숙해보인 이유를 알수 있었다. 그 은잠은 그의 어머니가 남기고 간 은잠과 끝부분의 무늬가 용과 봉의 차이가 있었을뿐 나머지는 완연히 닮아있었던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애초에 한쌍이었다.

만일 그가 처음 이 은잠을 봤을 때부터 알아봤더라면…

“공주였지. 그래서…그 은잠을 가지고있는 거였군.”

그는 은잠을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어머니의 믿음을 배신한 사람…그래서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을 그는 절대 용서할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바라고 움직인 목표는 오로지 그 한사람이었다. 명교 좌사로 되어서 10년동안 무예에 정진한 것도, 무과 과거에 급제했지만 부마를 거부하고 출사를 포기한 것도, 그리고 임서은…그녀가 공주라는 걸 받아들일수 없는 것도…온전히 그 한사람때문이었다.

“이태후마마…황궁에서 잘 지내고 계십니까…그 황궁이 유왕부보다는 많이 편하시더이까…”

그는 다시 천천히 옥적을 들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준수한 얼굴에 언뜻 냉랭한 조소가 어렸다. 뒤이어 연못 건너편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불편한 듯 떨렸다. 잠시후 처량한 옥적소리를 밤장막에 남겨놓은 채, 그는 연못 한가운데 홀로 남은 연꽃 한송이를 주시하면서 나직히 되뇌였다.

“때가 되었군.”

그는 천천히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멀리 자금성이 있는 방향을 향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임서은…이젠 더이상 피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그녀가 항상 해왔던 것처럼.

“나비처럼, 불꽃처럼 스러지는 삶이 있다고 하였지.”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알릴락말락 미소를 지었다.

“이젠 나비가 되어, 황궁이라는 불꽃에 뛰어들어야 하겠구나.”

밤하늘에 높이 걸린 보름달이, 그의 중얼거림에 구름뒤로 얼굴을 감춰버렸다. 구름은 자금성 방향으로 하염없이 흘렀다. 그 자금성에는 요동의 방향을 향해 달을 바라보는 고즈넉한 한 여인의 그림자가 있었다. 뒤이어 누군가 그녀의 등뒤에서 가볍게 만복을 하면서 말했다.

“공주님, 이태후마마께서 납시옵니다.”

이 글을 공유하기:

pandora

판타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판타지입니다.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
5
응원합니다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