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챙그랑…

소리와 함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고 서은은 눈을 들었다. 누르하치가 옆의 촛대를 던져 단검을 틀어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면바로 맞췄던 것이다.

촛대는 서은의 손을 통해 그녀의 혈을 눌렀고, 그녀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다. 맹고가 다가와 그녀 손에 나있는 상처를 눌러 지혈을 시켰다. 다행이 상처는 별로 깊지 않았다. 그녀는 침상에 쓰러진 채 누르하치를 노려보았다.

“나쁜자식!”

맹고가 그녀의 상처를 깁으로 감았다. 누르하치는 안색을 흐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말로는 통하지 않는가 봅니다.”

그가 눈짓을 하자 맹고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침상옆으로 다가섰다. 서은은 옴짝달싹 못하고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누르하치가 싸늘하게 웃었다.

“설사 죽더라도 이 누르하치에게 허락을 받으십시오. 앞으론 제 앞에서 함부로 죽겐 못할테니 그리 아십시오.”

말을 마친 누르하치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북 하고 그녀의 하얀 중의를 찢는다. 안에 겹쳐 입었던 흰 속적삼이 드러나고, 그녀의 하얀 목이 눈을 자극했는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여전히 누르하치를 노려볼뿐 꼼짝도 할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낮게 뇌까렸다.

“이왕 이렇게 된바엔…”

문득 그가 홱 몸을 돌려 그녀의 침실을 나섰다. 그리고 뒤따라선 맹고에게 낮게 분부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어떻게라도 음식을 먹게 하시오. 그리고 잘 살펴 더이상 다치는 일이 없게 하시오.”

맹고가 대답하는 소리도 들렸다. 뒤이어 맹고가 침상곁에 되돌아왔을 때, 그녀의 볼을 타고 뭔가 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분노의 눈물이자 그녀 자신의 무기력함을 탓하는 눈물이기도 했다. 맹고는 그런 그녀가 안쓰럽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추장님께서 저렇듯 마음을 쓰시니 목숨을 해하는 일은 없으리다.”
“차라리…이런 수모를 겪게 하지 말고, 죽여주세요.”

그녀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맹고를 향해, 슬프게 웃었다.

“당신에겐 어떤 사람일지는 모르나…당신외의 모든 사람에게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누르하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맹고 또한 슬프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조에는 그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의지가 내비쳤다.

"모든 사람에게 위험한 인물일지는 모르나, 제겐 좋은 사람입니다."
"…"
"그리고 곧 당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서은은 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맹고가 시비들을 물러가라고 분부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눈을 감은채 혈이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만일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누르하치가 누른 혈은 그 충격이 크지 않기때문에 한식경안으로 풀릴 것이 분명했다. 혈이 풀리기만 하면 무예를 모르는 맹고를 기습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헤투알라성을 탈출할 생각이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기라도 한 듯, 맹고는 밤이 깊도록 방안을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새삼스레 조급해났다. 잠깐 손을 움직였더니 왠지 혈이 풀린듯 하여,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곧 행동에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맹고…맹고…”

그녀가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자, 맹고가 급히 앞으로 다가와서 그녀를 부축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어…잠깐 소피를…”

그녀의 말에 맹고가 시비를 부르려는 걸, 그녀가 급히 손을 내저어 이를 막았다.

“다들 피곤할터이니 부르지 마십시오. 부인이 저를 부축해서 나가면 됩니다.”
“측간까지는 거리가 좀 있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바람도 씌울겸 나가겠습니다.”

그녀가 고집을 부리자 맹고는 하는수없이 천천히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중의를 여미고 겉옷을 입자, 그녀는 맹고의 팔을 잡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나섰다. 방문밖의 시비들도 자러 갔는지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녀는 맹고가 인도하는대로 측간으로 가는척하다가, 맹고가 길을 살피느라 머리를 숙인 틈을 타서 모든 힘을 다해 그녀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어둠속에서 맹고가 퍽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그녀는 홱 몸을 돌려 정문쪽으로 줄달음을 쳤다. 하지만 몇걸음 못가서 그녀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그녀 자신의 최악의 건강상태는 정문까지의 짧은 거리도 그녀에게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맹고가 깨어나거나 시비들이 사람이 없어진것을 발견한다면, 헤투알라성에서 다시 탈출을 시도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지름을 쓰며 일어나려는 순간.

불길한 생각은 언제나 적중했다. 그녀의 옆에 한 크다란 그림자가 내리드리운 건 눈깜빡할 사이의 일이였다.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가슴속에 무거운 돌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누르하치의 눈에는 의미 모를 섬뜩한 빛이 내비쳤다.

“그새를 참지 못해 탈출을 하다니요. 좋습니다. 차라리 부인의 돌아갈 길을 제가 이참에 끊어드리지요.”

그는 허리를 굽히더니 종이장을 들어올리 듯 가볍게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자기 방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몸부림을 쳤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오늘 기어이…부인께서 오늘의 이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 드리리다.”
“누르하치…”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틀어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아귀는 그토록 무기력했다.

“당신이야말로…오늘의 이 행동을…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어디 두고보시죠.”

어느새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 누르하치는, 탕 하고 문을 닫더니 팽개치듯 그녀를 침상에 내려놓았다. 그의 눈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위험한 신호이기도 했다. 아무리 진정하려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떨렸다.

“뭐하는…짓입니까.”
“이래도 모르겠습니까.”

누르하치가 살벌하게 웃었다. 그녀는 침상안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누르하치가 천천히 다가들었다. 그의 발걸음에는 분노의 무게가 잔뜩 실렸다.

"이도련님이 그리 좋습니까. 인질로 잡혀 누가 되지 않으려고 자결을 시도하지 않나, 그 몸으로 헤투알라성을 탈출하려 들지 않나…"
"…"
"이참에 부인을 안으면, 부인께서도 단념을 하고 이 누르하치의 푸진이 될수 있겠는지요.”
“내가 말했을텐데요, 무력으로 정복하지 말라고…여인이든, 천하든…”

그녀가 이를 갈면서 하는 말에, 누르하치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어디 부인께서 한번 증명해 보이십시오. 무력으로 정복할수 없는 것이 대체 뭐가 있는지를…”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는 더이상 탈출구가 없다…단검도 빼앗겨 버렸고, 몸에 무기로 될만한 그 어떤 물건도 지니고있지 않다…

그동안 꽤 먹히던 그녀의 화려한 말발도, 위압적인 누르하치 앞에서는 이토록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을…그녀의 눈빛에서 두려움을 읽어냈는지 누르하치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손더듬을 하며 침상옆으로 몸을 피했다. 뾰족한 촛대가 손에 잡혔다.

바로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누르하치!”

문쪽으로 머리를 돌린 누르하치는,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뜻밖이였는지 그만 주춤했다.

“나치야…”
“누르하치, 저를 찾는다면 그분을 놓아주십시오.”

서은은 맥이 풀렸다. 나치야…윤아…결국은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두지 않는 것을…그녀의 얼굴위로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그녀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나치야는 냉랭한 얼굴로 누르하치를 마주했다.

“왜요? 설마 그동안 저를 찾는 것이 아니였습니까.”
“나치야…”

누르하치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치야를 보았다.

"당신이 여기 생활에 질려 자의로 헤투알라성을 떠난 건 나도 잘 알고있소."
"…"
"하지만 그것이 내겐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일인지, 당신은 알지 못할 것이요. 지금까지 내가 버린 여인은 많아도, 날 버린 여인은 감히 없었소. 아시겠소?”
“그래서 저의 일가 친척들까지 도륙 내셨습니까.”

나치야는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아버지께선…제가 당신을 따라 헤투알라성으로 오자, 당신과 오랜 원수지간임에도 체념을 하고 우리를 놓아주셨습니다."
"…"
"하지만 당신은 뭡니까. 고작 당신의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칼을 뻗친 겁니까."
“나치야…그건 오해였소.”
“오해? 도륜성의 초토화가 오해란 말씀입니까? 당신의 칼에 묻은 저 수많은 피들이 다 오해란 말씀입니까?”

나치야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그녀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듯, 누르하치가 그녀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바로 그때다 싶었다. 서은은 손안의 촛대를 단단히 잡았다. 하지만 그녀가 앞으로 덮치려는 순간, 난데없는 검이 나치야와 누르하치의 사이를 막아나섰다. 그리고 멈칫하는 누르하치와 의연한 나치야의 중간에, 삭풍처럼 싸늘한 냉기가 서린 어조로 누군가 말했다.

“꼼짝 말아.”

……

“이여백…”

누르하치가 간신히 이 한마디를 뱉어냈다. 방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은은 그린듯이 멍해 있었다. 아니, 믿기 어려워 머리를 흔들어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두손으로 눈을 비빈 후 다시 그들쪽을 바라보았다.

몇번 다시 보았지만 영낙없는 그 사람이었다. 다만 그가 하도 담담한 얼굴이어서 왠지 전보다는 훨씬 낯설고 생경한 느낌을 줄뿐이였다. 그런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로 그가 누르하치에게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입니다. 이여백도련님…”

누르하치도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이여백의 검앞에 있는 나치야를 흘낏 바라본 후, 다시 서은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알릴락말락 옅은 미소가 스쳤다.

“생각보다 하루 빨리 오셨군요. 다만 이런 방식은 뭐…혹시 인질을 맞바꾸자는 겁니까.”
“맞바꿀 생각이라면 오지도 않았다.”

이여백이 냉소를 머금고 조용히 말했다. 차분하지만 섬뜩한 그 표정에 누르하치가 움찔하는게 보였다. 하지만 이내 진정한 듯 그가 머리를 들고 크게 웃었다.

“저는 이도련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희가 작은 성새이긴 해도 너무 그렇게 얕잡아보진 마십시오.”

이여백은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고요한 시선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의지가 보여, 서은은 이유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설마…

그녀는 가만히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누르하치가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이도련님은 나치야를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치야를 인질로 저를 협박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뭔가 흰 섬광이 번뜩했다. 전혀 무방비 상태였던 누르하치는 두손으로 배를 잡으며 풀썩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런 누르하치의 앞에서, 피묻은 칼을 뽑아든 채 나치야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 말대로, 이도련님은 나치야를 해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치야는 당신에게 죄를 물을수 있겠지요.”

……

“나치야…당신이…어찌…”

누르하치는 천천히 한손을 내밀었다. 붉은 피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비수를 든 나치야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런 나치야에게 힘을 북돋아 주려는듯, 이여백이 누르하치의 앞을 검으로 막았다. 다시 흔들리는 비수를 똑바로 겨눈채 나치야가 말했다.

“내 마음을 저버린 죄…도륜성을 초토화 한 죄…내 아버지를 죽게 한 죄…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께 묻겠습니다.”
"나치야…사실을 알면 당신은 후회할지도…"
"후회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 되돌이켜지진 않겠지요."

나치야의 목소리가 차분해지자 이여백은 검을 거두었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두 사람을 넘어 서은의 몸에 와 닿았다. 그녀는 넋을 놓은 채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와 시선이 부딪치자 이여백의 눈빛에는 뭔가 복잡한 느낌이 스쳤다. 그 느낌에는 이유 모를 회한도 섞어있었다. 그가 그녀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저…”

그녀가 입을 열자 그는 아무 말 말라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그를 향해 한발자국 내디뎠다. 뒤에서 나는 인기척에 누르하치가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다시 이여백을 돌아보는 그의 입가에 한가닥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도련님이 이겼습니다.”

그의 미소가 하도 괴이하여 다들 미간을 찌푸렸다. 누르하치는 허리를 굽힌 채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한팔을 뻗어 서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어떡하겠습니까…도련님은 이겨서 여기를 벗어날수 있겠지만, 이분까지 데려가는 건 어려우실 겁니다.”
“누르하치, 그래서 내가 그분대신 남겠습니다. 우리 사이엔 아직 청산해야 할 것이 많으니까요.”

나치야의 말에 누르하치는 싸늘하게 웃었다.

“오늘 내 죄를 묻겠다 하지 않았소? 나치야, 난 당신을 저버린적이 없소. 당신이 우리 사이의 약조를 저버렸을뿐.”
“그게 무슨…”
"당신이 나를 따라 헤투알라성에 왔을 때, 그것이 바로 이 누르하치의 여인이 되겠다는 약조라고 나는 받아들였소."
"…"
"하지만 당신도 알다싶이 이 누르하치의 여인이 된다는 것은, 수많은 다른 여인들과 같이 부족간의 단합을 아우르는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약조이기도 하오."
“…”
“당신이 그것을 견디지 못하여 헤투알라성을 떠났을 때, 내가 일언반구라도 당신을 원망하는 말을 했소?"
"…"
"그리고 난, 그후 내 계획대로 도륜성을 초토화 하였지만 당신의 식솔들은 건드리지 않았소. 믿지 못하겠다면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이 추장부 뒤쪽에 가보시오. 당신의 일가 친척들이 모두 거기에 살고있소.”
“…”
“당신의 아버지의 죽음은,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당신 아버지의 욕심으로 인한 것이요. 어쩌면 내 손에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하늘이 당신 아버지와 우리사이가 그렇게까지 버성기지 말라고 가긍히 여긴 것이 아니겠소. 이 모든것은 하늘의 뜻이요.”
“…”
“하여…나는 오늘 그대들을 절대 놓아보낼수 없소. 나를 상하게 한 것으로 당신의 원한이 어느정도 가라앉았다면 당신은 여기 남으시오. 넷째 푸진의 자리는 언제든지 당신을 위해 비워두고 있으니.”
“제가 부인대신 인질로 남겠습니다. 그러니 누르하치, 우리 옛정을 생각해서라도…부인은 놓아주시지요.”

나치야의 눈빛이 사뭇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수를 내리고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그녀의 눈길은 누르하치를 스쳐, 그뒤에 위태롭게 서있는 서은에게 머물렀다.

“방울을 풀려면 방울을 매단자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으로 부인을 해친 제 죄가 조금이라도 덜어진다면, 저는 더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나치야…그럴 필요 없습니다.”

서은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잘 알고있었다.나치야는 여기 남을 것이나,누르하치의 푸진은 되지 않을 것이다. 나치야의 단호한 눈빛에서 그녀는 그것을 알수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찟기듯 아파왔다. 그래서 누르하치의 부인 반열에 네 이름은 없는 것이었구나. 윤아…너의 전생은 고작 이렇게 고단하게 지내려고 태어났던 걸까…이것이 너의 숙명이었을까…그녀의 안타까운 시선을 마주한 채, 나치야가 또렷하게 말했다.

“저를 향한 부인의 선한 마음은…저를 부끄럽게 할뿐입니다. 나치야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입니다. 애초에 제가 여길 떠나서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졌으니,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말은 담담하게 하고있지만 나치야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고였다. 차마 그녀의 눈길을 마주하지 못하고 서은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누르하치와 이여백이 들어왔다. 애초엔 총병부에서 죽마고우로 자랐을 두 사람…하지만 지금은 원수가 되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지금 그들의 상황도 단지 역사의 흐름에 따른 일이였을까.

그녀는 눈을 감았다. 긴 호흡을 하고 다시 눈을 뜬 그녀가 말했다.

“아닙니다…나치야…당신의 잘못이 아니라…제 존재가…제가 여기에 왔기 때문에 모든 일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천기를 누설하면 죽을수 있다는 염라대왕의 협박 따위가 마음에 걸려서가 아니었다. 이여백의 단호한 시선이 그녀의 말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처음 보았다. 그의 그런 눈빛을…온 세상을 다 맞서 싸우기라도 할 것처럼 결의에 찬 그의 비장한 얼굴을.

지금껏 봐왔던 것보다 한결 단단한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면서 이여백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 그 누구도…다른 사람에게는 영향을 주는 존재인 것을."
"…"
"그러니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이건 우리 서로의 운명일테니.”

뭔가 실낱같은것이 그녀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뭔가 더 말하기도 전에 이여백이 누르하치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맞바꿀 생각이라면 오지 않았을 것이라 했었지.”
“…”
“맹고가 우리 손에 있다.”

누르하치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는 차마 못믿겠다는 듯 그가 물었다.

“맹고…가?”
“설마 우리가 그정도 준비도 없이 왔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이여백의 말에 누르하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서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은은 반사적으로 촛대를 꺼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동작으로 이여백이 움직였다.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이여백의 그림자가 허공에 완연한 곡선을 그리며 여러개로 흩어졌다가 눈깜짝할새에 하나로 합쳐졌다. 누르하치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검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건곤…대나이."
"이젠 네쪽에서 맞바꿀 생각이 들겠지."

깊게 울리는 이여백의 목소리가 공기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심한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 어떤 체념이 보이기도 했다. 누르하치의 눈빛이 떨렸다. 뒤이어 증오와 원한이 가득찬 목소리로, 그가 이사이로 한마디 내뱉었다.

“명교…”

이여백은 잠자코 있었고, 누르하치는 그를 노려보았다.

“명교였군요.”

거의 씹어삼킬듯 이를 갈며 누르하치가 다시 말했다. 이여백은 여전히 침묵한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여백을 바라보는 나치야의 얼굴에도 당혹한 표정이 어렸다. 뒤이어 그녀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공기속에 흩어졌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움직일수 있었군요.”

나치야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문가에 언뜰하고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을 하였지만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그윽한 사향 향기는…봉선이 틀림없었다.

이여백이 머리를 끄덕이자, 봉선이 앞으로 다가와서 서은을 부축했다. 뒤이어 눈앞의 상황에 타협을 했는지 누르하치가 머리를 떨구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든 그는 이를 앙다물고 말했다.

“…명교였습니까.”
“그게 중요한가.”

이여백의 담담한 말투도, 그의 분노를 눅잦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누르하치의 눈에 벌겋게 피발이 섰다. 하지만 미간을 구기고 생각하다가 그가 다시 이여백을 보았다.

"믿을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이여백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집요한 눈빛이였다. 잠깐 사색을 더듬던 그의 눈빛이 삽시에 짙은 색을 띄었다. 그는 그런 눈빛으로 한참 이여백을 보다가, 문득 허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 중요하지 않기도 하지요. 어차피 우린 이젠 원수 지간이니 아비 죽인 원한 하나 더 보탠들.”
“고륵성 일은, 명교 지시가 아니다.”

이여백의 말에 누르하치는 피씩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뭐 어쨌든, 명교 사람이라면…오늘 더욱더 여기를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맹고는 상관하지 않겠느냐.”

이여백의 말에 누르하치는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탄식 비슷한 휘파람 소리가 그 음산한 웃음과 함께 번졌다. 때를 같이하여 언제 왔는지 여진 군사들이 마당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그리고 보기에도 섬뜩하고 싸늘한 눈빛으로, 누르하치가 그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 아비의 원수를 갚는 것이라면, 맹고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깟 군사들로, 명교를 막을수 있다 생각하느냐.”

이여백의 목소리가 짙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반전을 거듭하는 눈앞의 상황이 흥미있다는 듯 그가 한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내 아버지의 원수만 갚을수 있다면, 헤투알라성의 군사들은 최후의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당신들을 막을테지요. 어디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의 말이 채 끝나기 바쁘게 허공을 가르며 흰 빛이 번뜩했다. 언제 다가들었는지 뒤로 달려든 군사를 단합에 벤후, 이여백은 검으로 누르하치를 막으며 서은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

“먼저 가거라.”
“도련님…같이 가야 합니다.”

긴장으로 아무 말도 할수 없는 서은을 대신해, 봉선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단 한번의 시선도 주지 않은채, 이여백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예서 다같이 죽고싶지 않거든 빨리 가거라.”
“빨리 가세요. 길은 저희가 뚫겠습니다.”

한켠에서 나치야가 이여백의 말을 받았다. 그녀 역시 언제 뽑아들었는지 서리발치는 검으로 마당의 군사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서은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혼자 갈순…없습니다.”

이여백이 그녀쪽으로 홱 머리를 돌렸다.

“빨리 가거라. 여기 있어봤자 도움이 되질 않아.”

그의 말이 날카롭게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단지 눈앞의 상황때문이라 생각하기엔, 지금까지 그녀가 저지른 일이 생생하게 가로놓였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새삼스레 서글퍼졌다. 그의 말이 옳았다. 자신이 있어봤자 그에겐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민폐만 끼치고 있는 것을.

“다치지 마십시오.”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그녀가 말했다. 눈앞의 사람에게 진실을 얘기하고 싶은 충동이,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필사적으로 그녀의 몸을 갈랐다. 그의 눈빛에서 각오가 느껴지자 그녀는 불안했다.

다시 만날때 서로 투명해지자고 약속했던 사람…비록 상황이 그리 안되었지만 자신으로 인한 희생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두려움으로 온 몸이 떨려왔지만 그녀는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자신을 부축했던 봉선의 팔을 놓고, 그녀는 슬픔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같이 가겠습니다. 당신이 절 살리세요. 다치거나 여기 인질로 남을 생각 말고, 당신이 절 구해주세요.”

그의 검이 잠시 멈췄다. 그 서슬에 누르하치가 공격을 가해왔다. 마당의 군사들도 벌떼처럼 달려들었고, 나치야와 봉선이 몸을 날려 필사적으로 군사들을 막았다.

검을 휘둘러 검기로 누르하치를 한마장 뒤로 물리친 후, 이여백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갈수 있겠느냐?”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 그녀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팔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대문밖에서 우사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가 그녀를 안은 채 몸을 날려 군사들의 머리위를 넘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건곤대나이 보법의 위력을 몸소 체험할수 있게 되었다. 귓가에 바람이 쌩쌩 일고 눈앞의 모든 사물이 흐릿한 그림자로만 보였다. 얼핏 뒤를 돌아보니 나치야와 봉선도 그들 뒤를 따라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먼저 나가시오.”

이여백의 지시에 따라 나치야와 봉선은 몸을 날려 추장부 담장을 넘었다. 뒤이어 그녀의 몸도 가볍게 담장위에 세워졌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재빨리 상황파악을 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팔을 단단히 감았다.

“같이 가요.”
“추장부는 벗어날수 있어도 헤투알라성은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먼저 성밖으로 나가 기다려.”
“절 살리려면, 절 구하려면 같이 가요.”

그가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움켜잡았다.

“아직도 고집을 부릴테냐. 빨리 가.”
"약조…"

그녀의 말에 그가 그녀를 깊이 응시했다. 그녀는 다급히 말했다.

"약조가 있었잖아요. 다시 만나면 서로 투명해지기로…그러니 꼭…"

참았던 눈물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겨우 말을 끝맺었다.

"무사히 오세요. 제가 모든 것을 알려드릴테니."

등뒤에서 군사들이 뒤쫓아 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머리를 돌려 뒤를 한번 돌아본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에 뭔가 익숙한 느낌이 보였다. 더이상 무연한 공허가 아닌, 하지만 그녀가 느낄수 있는 절실한 연정 그것이었다. 그런 눈빛으로,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담장밖으로 힘껏 떠밀었다.

"약조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
"그러니 빨리 가. 그리고, 꼭 무사해야 한다…"

담장을 넘어간 그녀가 들을수 있는 건 여기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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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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