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뭔가 덜컹거리는 느낌에 서은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눈앞 어디선가 붉은 빛이 새여들어온다. 간신히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흔들거리는 수레위에 누워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레에 자그마하게 나있는 창문밖으로 느리게 저무는 가을해가 붉은 잔상을 던지는 저녁 시간이었다. 그 붉은 노을이 헤투알라성쪽으로 향하고 있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문득 슬픔이 괴여올랐다. 그 슬픔의 이유를 찾기 위해 잠깐 사색을 더듬어보니 흐릿한 기억속에서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약조 같은 건 없어.”

“…꼭 무사해야 한다.”

느닷없이 돋는 소름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왜 헤어지기전 그런 말을 했을까. 그리고 그런 말을 한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봉선…나치야…”

초조하지만 모기소리만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밖으로 새어나왔다. 수레문에 달린 휘장을 젖히면서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검은 망사로 얼굴을 가린, 봉선의 고운 눈이 그녀를 들여다본다.

“부르셨습니까…부인.”
“지금…저희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녀의 질문에 봉선은 흘낏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제밤부터 꼬박 하루를 달렸습니다. 지금 사르후를 지나 철령이남쪽을 지나고있습니다.”
“서방님은…”
“저희를 먼저 가라 하고 뒤를 막으시는가 봅니다. 저희와 약속하기를 숲속 동굴에서 만나자 하였습니다.”

그녀의 바싹 마른 입술사이로 탄식 비슷한 한숨이 새여나왔다. 봉선이 얼른 그녀를 위로했다.

“이도련님의 무예로 결코 위험한 일은 없으리다. 하오니 과도히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녀는 알릴락말락 머리를 끄덕였다. 봉선이 차잔에 물을 따라 그녀에게 권해왔다. 한모금 입에 대다 말고 다시 그녀가 말했다.

“나치야는…”
“성밖을 빠져나오자 따로 준비한 수레를 타고 저들을 유인해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별 탈이 없으면 총병부에 와서 저희와 합류할 것입니다.”

그제야 그녀의 시선이 수레문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말을 향해 연신 채찍을 날리고있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언뜰 보였다. 그렇게 한참 말을 달려 드디어 수레가 멈추는듯 싶더니, 수레밖에서 낮게 깐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내리셔도 됩니다.”

봉선의 부축을 받아 수레에서 내린 그녀는, 자신을 주시하는 사내의 시선을 향해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지휘사님.”

우사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있었다. 석양이 그의 굳어진 얼굴을 다홍빛으로 물들였다. 그래서 꼭 마치 그가 화를 내어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이 여의치 않으면, 봉선각 행수를 통해 제게 소식을 전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우사의 노기띈 목소리를 들어서야, 그녀는 그가 진짜로 화를 내고있다는 걸 알수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우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어찌 봉선이 아닌 그녀석에게 소식을 듣게 한답니까.”
“그건 다 저의 잘못입니다.”

봉선이 옆에서 끼어들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속에서 떨리고 있었다.

“그만 제가 미처 생각이 돌지 못하여…나치야가 봉선각에 찾아왔을때 눈치챘어야 하는데…”

봉선은 한숨을 내쉰 후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행이 이도련님께서 줄곧 사람을 붙여 은밀히 신변을 보호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다만 나치야를 따라 절에 간 일은 갑작스러운 변수라 그 사람들도…”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다 제가 빚어낸 일들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회한에 차있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 보았다.

“다만 어찌 이리도 소식이 감감하신 겁니까.”
“저희 손에 맹고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사의 말에 그녀는 머리를 돌렸다. 아까부터 뒤에 따라오던 수레에서 해쓱한 얼굴로 맹고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복면을 한 두 사내가 바싹  붙어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맹고는 서글프게 웃었다.

“부인…추장님에게 저는, 인질로 될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인질이건 아니건 도련님이 오시지 않으면 총병부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봉선이 그녀대신 대답했다. 바로 그때 맹고가 소매에서 재빨리 뭔가를 꺼내들었다. 공기를 가르며 흰 빛이 번쩍했지만, 옆에 서있던 사내들이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맹고의 얼굴에 참담한 미소가 굳어졌다.

서은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헤투알라성에서 누르하치와 맹고에게 빼앗겼던 단검이었다.

“단검은, 생사의 약조입니다.”

맹고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담담하게 웃었다. 뒤이어 물끄러미 검날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다시 말했다.

“하오니 진정 생사를 기약할만한 사람에게만, 이 단검의 의미를 알려줄 필요가 있겠지요.”

……

동굴안, 호수옆.

허탈한 시선으로 서은이 호수를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언젠가 명교에게 추격당할 때 이여백과 몸을 피하던 그 동굴이었다. 한때는 그 사람만의 은신처였던 이곳, 하지만 지금 이곳엔 그 사람이 없다.

“날씨가 제법 쌀쌀하니 냉기가 많은 곳에 오래 앉아있지 마십시오.”

호숫가에 오롯이 담겨있는 그녀의 그림자 뒤로, 봉선의 낭창한 그림자가 비추어졌다.

“이틀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 오지 않는 것입니까. 지휘사님께서 헤투알라성으로 사람을 보내셨는지요.”

그녀의 중얼거리는 말을 이어, 봉선이 걱정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명교의 사람이 헤투알라성을 들어가는 건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한번은 있을수 있지만 지금은 경계가 더욱 삼엄하여…”
“그래서 저더러 마냥 기다리고 있으라는 겁니까.”

느닷없이 화를 내는 그녀를 뒤로 하고, 봉선이 한숨을 쉬면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다시 멀거니 호수안을 들여다 보았다. 다시 그를 볼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하고 막힐 것만 같았다.

왜 이런 사람을 두고 떠나려고 했던 것일까. 그를 멀리 떠나서 얼마나 살수 있다고. 그녀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함께 있고싶어도 있을수 없다. 그렇다고 잊고싶어도 잊혀지지 않는다. 도무지 보이지 않는 적들과, 이길수 없는 강대한 힘을 상대해서 싸워야 하는 운명이 괴롭다. 괴로워서 미칠것만 같았다. 그래서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도 같다.

이젠 이런 기다림도, 인내도 지쳤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용암처럼 부글거리며 분출하려고 한다. 이젠 피하지 않을 거라고, 밀어내지도 떠나지도 않고 끝까지 놓지 않으리라. 입술을 옥물며 그리 다짐해본다. 그가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그에게 알려주리라.

“천기를 누설하면…당신이 화를 입는 건가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명부는 그녀를 처벌할 것이다. 역사에 그녀가 남아있더라도 명부는 그녀를 잔인하게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전에 하던 것처럼, 또 다른 영혼을 불러 서안공주에게 빙의시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젠 진저리가 나려고 한다. 명부의 그 잔혹함에, 인간의 의지를 짓밟는 그 비정한 행위에.

다시 눈을 뜬 그녀의 시선안으로 한 그림자가 비쳐졌다. 봉선이 되돌아 온 것인가. 그녀는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았다는 듯 말했다.

“헤투알라성에 가지도 못하게 하면서 왜 또 왔습니까.”
“거긴 왜 가려고 하는 것이냐.”

그녀는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전혀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또한 분노로 몸을 떨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거짓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눌러담고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그녀 스스로 느끼기에도 서늘한 웃음이었다. 이러한 웃음이라면, 제아무리 지옥 깊숙히 살고있는 염라대왕이라도 주춤하고 말 것이다.그래…이제부턴 맞서 싸우는거야.

“그동안 구경거리가 많아 재미 있으셨습니까.”

그녀의 얼음처럼 싸늘한 말에, 등뒤의 그림자가 소리없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재미가 아주 없진 않다.”

역시 냉혹한 어조로 맞받아치는 염라대왕…그녀의 파리한 입술이 가만히 호선을 긋는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기어이 네멋대로 할 셈이냐.”

염라대왕이 신음 비슷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결 냉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맺지 못할 인연이다.”
“…”
“길게 고통스러울 필요 없이, 빨리 정리하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느냐.”
“…”
“그 사람을 위해서나, 너를 위해서나 다 좋은 일이다.”
“진정 저희를 위한 일이셨습니까.”

그녀가 비아냥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물기어린 투명한 눈망울로 염라대왕을 돌아보았다.

“인연이 없다면 왜 만나게 하셨습니까.”
“…”
“만나게 했다면 책임을 지십시오. 사람의 감정이 그리 우습게 보이십니까.”
“욕심을 부리지 말거라.”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염라대왕이 침묵했다. 그녀는 다시 호수를 바라보았다. 명부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서 사탕을 빼앗는 것만큼 쉽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항상 그 사람의 마음을 밀어내고, 역사에 변화를 주려 하고, 지어 그 사람을 떠나려고까지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명부에 대항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제게 인간이 가지고있는 이기심이 있는 한, 저는 명부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염라대왕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뭔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래서 이젠 버리렵니다. 돌아갈 기회를…돌아가려는 욕심때문에…이생에서 바르지 못한 일을 보고도 침묵해야 하며, 역사 그대로를 완성시키기 위해 내가 알고있는것들을 이용해야 하는…이제는 이런 꼭두각시 놀이에 더이상 이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옳다고 판단되는 대로 행동할 것이며, 제가 원하는대로 만들어 갈것입니다. 운명도, 사랑도, 그리고 기정된 역사까지도.”
“사랑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거냐.”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설사 명부에서 천기를 누설했다는 죄명을 씌워, 저의 목숨을 빼앗아가더라도, 저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
“그 사람의 운명을 이용해 저를 겁주게 되면, 저를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낼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천만에요…명부에서 이왕 저를 이곳으로 오게 하였으면, 이젠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셔야지요. 명부에 이용당하는 사람으로, 제가 마지막이 되었으면 합니다.”

문득 조용해진 염라대왕이 이상해서 그녀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호수가에 비껴있는 또 하나의 완연한 그림자를.

그녀는 석상처럼 굳어 그 사람을 보았다. 그저 한 사람이 늘었을 뿐인데 주위의 모든 공기가 바뀐 것 같았다.

소리없이 감은 두눈 사이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다시 눈을 뜬 그녀는 정지해버린 시간속에서 흐르는 바람을 보듯 하염없이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담담히 한마디를 말했을 때, 그녀는 숨을 들이키며 눈을 크게 떴다.

“부부사이 회포를 풀려 하는데 불청객이 와있군.”
"아…"

그녀는 염라대왕을 보다가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보이십니까."
"뭘 말인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와서 당신을 괴롭히는 저 노인네를 말하는 건가?"
“아주 제대로 간덩이가 부었구나. 자고로 명부에 불경스러운 영혼 치고, 영원히 윤회의 기회마저 빼앗겨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너희가 아느냐.”

염라대왕이 크게 호통을 쳤다. 그의 얼굴에 당황함이 역력했다. 화가 치밀었는지 부르르 수염까지 떨었다.

그런 염라대왕을 흘낏 바라보며 이여백이 조용히 웃었다.

"아, 명부였군요."

웃다니…저런 상황에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웃다니…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크게 놀라거나 넋을 놓고 있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었던가. 대체 그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그가 머리를 돌려 의연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항상 담정하던 그의 눈빛에 한결 성숙하고 단단한 의지가 비쳐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래 기다렸느냐. 힘들었겠구나.”

아아…드디어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그녀에게 그가 나직히 한마디 덧붙였다.

"허니 이제 그만 내게 맡기거라."

……

그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염라대왕의 눈길이 한결 서늘해졌다. 하지만 서은은 두렵지 않았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그의 차분한 눈빛이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들고 그들 주위를 날아다니는 반딧벌레에 시선을 주었다. 어느새 모여드는 반딧불들이 동굴속을 현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호수에 비낀 그 모습이 하도 황홀하여 그녀는 잠시 눈앞의 상황을 잊고 싶었다.

염라대왕이 입을 연 것은 한시경이 지난 후였다.

“너희가 정녕 명부의 적이 되겠다면…”

염라대왕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을 놓고 이여백이 검을 단단히 틀어쥐는 것도 눈에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때를 같이하여 염라대왕의 손에서 뭔가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번개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덮쳐왔다.

휘익…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뭔가에 부딪쳐 크게 휘청거렸다. 다행이 이여백이 그녀의 몸을 부축해주어서 넘어지지는 않았다. 동굴안에는 숨막힐듯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후 눈부실듯한 섬광이 거두어지고, 백지장처럼 해쓱한 얼굴을 한 염라대왕이 그들을 보았다.

“이럴수가…”

염라대왕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서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동안 착잡한 눈길로 그녀를 주시하던 염라대왕이 드디어 말없이 몸을 돌렸다. 서은의 얼굴에 잠깐 의아함이 스쳤다. 그녀의 눈빛에서 의혹을 읽어낸 그가 염라대왕을 불렀다.

“이대로 가는 겁니까.”
“때가 되면 다시 오마.”

알쏭달쏭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염라대왕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제야 그녀의 입밖으로 긴 한숨이 터져나왔다. 온몸의 힘이 깡그리 빠져나간 듯, 그녀는 곁에 있는 그에게 몸을 의지했다. 한동안 시간이 멈춘 듯, 동굴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

“어떻게…아셨습니까.”

뱉은 말에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게 아닌데, 그와 하고싶은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에게 털어놓고싶은 많은 비밀이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상봉한 지금, 그녀는 알수 있었다. 그가 언녕부터 명부와의 일을 알고 있었음을.

그녀는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일찍 그녀가 여인이라는 정체를 들킨 것처럼, 그녀가 지니고 있던 비밀 역시 이미 그가 알고있다는 사실이 허무했다. 지난 시간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되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지어는 다시 그를 마주보고 있는 지금도, 그와 시간을 같이할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차라리 만나지 말것을…만나서 사랑하지 말것을…

그도 같은 느낌일까. 그녀를 만난것을 후회하고 있을까.

“제 비밀을 아셨으니…명부에서 저를 정리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도 이젠 아시겠지요…그리고 제가 왜 당신을 떠나려 했는지를…”

그가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의 그런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당신은 절 믿고 계셨는데…실망을 드려 송구합니다…하지만 이리 하지 않으면…어쩌면 우린 원치 않은 이별을 해야 할지도…준비없는 이별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대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른 채, 그녀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엉망이었다. 오열을 참느라 가슴이 아파왔다. 가슴이 아픈만큼 어깨도 떨렸다.

그런 그녀의 작은 어깨를, 그가 가만히 끌어당겼다. 뒤이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말없는 손길이 느껴지자, 그녀의 눈에서 끝내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느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그의 손길에 의해 사라지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오롯이 담겼다.

“미안하다.”

그의 눈길이 그토록 슬픈 빛을 띈 것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차마 그를 응시할수조차 없었다. 어쩌면 슬픔에 가려진 그의 분노를 느껴서일지도 몰랐다. 그는 물처럼, 얼음처럼 조용히 화를 내고있었다. 그녀를 향한 분노인지, 지금 상황에 대한 분노인지 알길 없었지만.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긴장되어서 굳은 듯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날, 총병부 정자에서…말이다.”

조용히 내뱉는 그의 말에, 그녀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잠시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총병부 정자에서 염라대왕과 설전을 벌렸던 그때, 그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단 말인가.

“정자에서 찬바람을 쐬이고 있을 네가 염려되어, 겉옷을 가지고 되돌아왔었지.”

이여백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기억을 되살렸다.

……

한달전. 총병부 정자밑.

이여백은 망연한 표정으로 정자위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팔에는 겉도포가 걸쳐져있었고 바람은 싸늘하게 연못을 스치며 그를 에돌아 정자를 에워쌌다. 하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발견하고 주춤하며 묵례를 했다.

“둘째도련님.”

이여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하인을 보았다.

“혹, 저 정자위의 두사람이 보이느냐.”
“두사람이라니요. 제 눈엔 별당에 거처하시는 아씨님만 혼자 계시는게 보입니다만, 아씨님께 내려오시라 기별을  해드릴까요.”
“아니, 그럴것 없다. 네 할일을 하거라.”

이여백은 손을 저은후 다시 정자위를 올려다 보았다.

“왜 사자(使者)가 바뀌었을까.”

이여백은 미간을 구기며 앞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정자위의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어찌 과거의 변화는 두려워 하시면서 미래에 주는 영향은 생각지 않으시는 겁니까. 제가 살던 그 시대 또한  미래로 놓고 말하면 또 하나의 과거가 아니겠습니까. 어찌하여 명부는 과거의 기록에만 집착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은 전혀 념두에 두지 않으십니까."

그가 듣고있는 이 말은 대체 이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건 명부의 소관이 아니고 대왕님의 능력범위밖의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즉 대왕님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있는 분께서 이 모든 것을 좌우지 하는 것이겠죠."
"…"
"어쩌면 제가 두려워하는 것보다, 대왕님께서 두려워하는것이 바로 제가 선택해야 할 길인듯 합니다. 명부는 명부대로 기존의 역사를 완성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십시오. 저는 저대로 역사를 바꾸어 대체 어떤 평행우주가 열리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네 정녕…"
"네, 그렇습니다. 정녕 제가 정해진 팔자를 거스르겠습니다. 이젠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새로운 운명을 열어가겠습니다."

이여백은 깊게 미간을 구겼다. 만일 그가 헛 것을 듣지 않았다면…그동안 그녀의 예지능력, 그것은 이미 발생한 일에 대한 기억이거나 과거를 통한 경험이었을지도.

"마음대로 하거라. 영영 돌아가지 못할수도 있다. 아니 언제라도 죽을수도 있다. 정녕 그래도 후회하지 말거라."
"…"
"천리를 거스르고 명부를 능멸한 죄, 내 따로 기회를 타 네게 톡톡히 물을 것이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여백은 저도 모르게 나직히 탄식을 내뱉었다. 몇걸음 앞으로 다가가려다가 그는 주춤하고 말았다. 그동안 그녀의 말과 행동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만일 그가 알게 되면, 그녀는 당장 떠나거나 위험에 처하는 것이 아닐지…일단 그녀가 말할때까지 기다려주기로 그는 마음먹었다.

다시 돌아서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할머니, 이젠 어떡합니까…지금 제게 저런 것이 보인 다는건, 아마 시간이 얼마 남자 않았나 봅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는 그의 눈빛이 한결 차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일단은 기다리죠. 제게 현신을 한다면, 이 또한 주신의 뜻이겠지요. 그 뜻이 무엇인지 기다리겠습니다.”

……

“귀문이 열렸다.”

이여백은 간단히 한마디로 자신의 말을 정리했다. 서은은 눈을 크게 떴다. 뭐라 더 말을 하고싶은데,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그가 담담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초연한 행동과 선연한 눈빛은 언녕 속세를 벗어나 있는 사람의 것임을.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전에도 그러셨습니까…”
“그랬다면 살수를 했을까.”
“아…”
“어릴때 몸이 허약했었다. 어쩌면 무예를 닦기 시작한것도 그때문이지. 하지만 철령 할머니께서 말씀하신적 있다. 귀문이 열리면 사자(저승사자)를 볼수 있다고.”
“…”
“귀문이 열리는 건 귀찮은 일이라 하셨다. 만일 전부터 그랬더라면 명교에서 살인도 일삼지 못하였을터. 내 검날에 베어진 망령들이 찾아온다면 그게 얼마나 시끄러운 일이겠느냐.”

그녀는 풋 웃었다.

“그것도 그러네요.”
“다만 그 사자가 염라대왕인 것은 의외었다.”
“그러고보니 염라대왕은…왜 우리를 처벌하지 못했을까요. 어쩌면 오늘은 제가 죽거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그녀의 이어지려는 말을 그가 급히 손으로 막았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반달처럼 접어 웃었다. 그리 의연한척 했어도, 그는 역시 마음속 깊이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
“약조하마.”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쉬이 약조를 입에 담는단 말인가.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았다.

“약조…같은 건 없다면서요.”
“그건.”
“알아요. 그러면 지금 다시 약조하세요.”
“그래…”
“제가 어디로 가든 절 찾아오신다고 말이에요.”

그가 그건 무슨 말이냐는듯 의문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며 담담히 웃었다.

“제가 죽으면, 다음생에 절 찾아오실 거라고…”

이번에는 그가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가 그러하듯이, 그 역시 그녀에게 하고픈 말이 있을 거라고…항상 무심한 듯 공허했던 그의 눈빛이, 그리고 모든것에 담백했던 이 남자의 얼굴이 왜 지금 이 순간만은 길 잃은 어린 아이 같았던지를 그녀는 알수 있었다.

“제가 당신을 잊어도…꼭 찾아오실 거라고…약조…하세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려, 그녀의 옷자락을 적셨다. 대답대신 옷자락들이 흘러내렸고, 무언의 탐닉이 그 뒤를 이었다. 더이상 아무 말도 필요치 않았다. 태초의 인연으로 돌아가, 빈틈없이 몸을 겹쳤다. 그가 그녀의 몸으로 파고 들어왔고,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크게 몸을 뒤틀었다. 부드러운 몸짓이 서로의 고백을 대신했고, 강한 포식이 서로의 불안감을 잠식했다. 그들은 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듯 오래도록 숨막힐 듯한 사랑을 나누었다.

반딧불들이 조용히 그들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

서은 일행이 총병부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튿날 정오가 될 무렵이었다. 문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우르르 마중나오는 사람들로 인해 총병부 대청 마당은 한동안 떠들썩했다.

대청안에서 령이가 선참으로 달려나왔고 평복차림의 만력과 이성량이 그 뒤를 따라나왔다. 서은을 부축해 수레에서 내린 이여백이 만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디 소인의 죄를 중하게 다스려 주시옵소서.”

만력은 한참 서은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별 탈 없어보이자 그제야 싸늘하게 굳어진 얼굴로 이여백을 보았다.

“저 아이가 소식이 없다면 바로 헤투알라성을 바라고 갔어야 하는 것을!”
“소인의 죄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습니다…”

서은은 령이에게 몸을 기댄 채 미약하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고정하시옵소서…이건 서방님 탓이 아닙니다.”
“언제라고 아직도 역성을 들고있냐.”

만력은 그와중에도 억이 막히다는 듯 고개를 들며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이여백을 노려보았다.

“내 기필히 네 죄를 엄하게 다스리겠노라.”
“…”
“당장 저 아이를 후원으로 데려가지 못하겠느냐.”
“오라버니…!!!”

그녀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만력은 이여백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여백과 령이의 부축을 받아 후원의 처소에 들어서자 시비들이 얼른 이부자리를 내려서 펴놓았다. 그녀를 자리에 눕히고 이불깃을 여며주며 이여백이 말했다.

“누워있어.”
“어디 가려구요…”

그녀가 그의 옷깃을 잡자, 그가 그녀의 귀밑머리를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따라갔던 사람들을 보내고 바로 오마.”
“지휘사님께 부탁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금주의 사람들은 내가 보내줘야 하지 않겠느냐.”
“빨리 오세요…”

그녀의 연연한 표정에 그가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

“걱정하지 말아. 이젠 네가 질릴만큼 이 방에 붙어있을 테니까.”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옷을 놓았다. 이여백이 나간 후 그녀는 령이의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령이는 아까부터 눈물이 글썽해 있다가, 그녀가 자리에 누워 자신을 쳐다보자 그제야 울먹거렸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공주님께서 만일이 있게 된다면 저는…전…”
“쓸데없는 소릴.”

그녀가 혀를 차며 가볍게 면박을 주자 령이는 드디어 설음이 터졌는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전…저는…절대 구차히 살지 않겠습니다.”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말아.”

그녀는 령이를 나무라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이란 본래 무상한 것을…왜 사람들은 그녀가 오고 가는것에 이토록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그녀는 울컥 치미는 눈물을 참고 시선을 들어 령이를 보았다.

“나치야아가씨는 소식이 있느냐.”
“공주님은 왜 아직 그분을 찾으십니까. 저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나서 견딜수 없는데 말이죠. 차라리 안오는게 더 좋습니다. 제가 그분이라도 더이상 공주님을 뵐 면목이 없을것입니다.”
“무엄하구나.”

그녀의 가벼운 꾸지람에 령이는 이해 안간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제가 무엄한것이 아니라 공주님의 심성이 너무 착하십니다. 그날 봉선각에서 울리는 거문고소리를 듣고 나치야 아가씨가 뭐라 하셨는데요. 도련님은 한밤중에 기방출입이 불편하니 자기가 가보고 오겠다고 해놓고…결국 공주님이 봉선각에 계신다는걸 속이셨지 뭡니까. 후에 봉선각의 시비들에게 들어서 알았습니다. 애초부터 나치야아가씨가 아니었더라면 공주님의 이번 봉변도 없었을것입니다.”
“이건 다…명이다.”
“저는 공주님처럼 너그럽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걸 명에 맡기지도 못하겠구요.”

령이의 볼부은 말에 그녀는 흐릿한 웃음을 지었다.

“네가…변화가 크구나.”
“이건 다 공주님의 가르침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전에는 조실부모하고 궁에 팔려간 제 신세한탄만 했었는데 이젠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제 운명을 좌지우지 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운명이란 본디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것입니다.”
“그렇겠구나…”

허공을 보며 그녀가 느릿하게 말했다. 령이는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종알거렸다.

“그렇구말구요…제 생에 공주님을 내놓고는 누구도 저를 강요하지 못할것입니다. 그러니 공주님…다음번에 출타하실땐 꼭 저를 데리고 가주신다고 약속하십시오. 하늘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절대로 저를 버려두지 말아주십시오…”
“그래…”

그녀의 허약한 한마디에 령이는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챈 듯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공주님…어찌 안색이 그리도 창백하십니까?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일단…물을 좀…주거라.”

그녀는 천천히 숨을 불어쉬었다. 이제 그만 마음의 탕개를 풀어서인지 온몸이 땅으로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령이가 물을 따라오자 그녀는 느리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이 심하게 떨리는것을 보았다. 겨우 잔을 받아들었지만 힘이 없는바람에 방바닥 가득 물을 쏟고야 말았다. 령이가 눈을 크게 떠는 모습조차, 그녀가 보기에는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공주님…기운 차리십시오…공주님…공주님…”

령이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지는감을 느끼며, 그녀는 그만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누군가가 그녀의 팔소매를 가볍게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방안에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오는듯 했고, 뒤이어 이여백의 무거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전해졌다.

“어떻습니까, 장의원님…”
“흐음…앞채로 가서 얘기 드리겠습니다.”

전에 니칸외란의 임종때 들은적 있는 장의원의 목소리였다. 령이의 울먹이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어서 말씀해주세요. 의원님…저도 알고싶습니다.앞채로 가실 것 없이 이 자리에서 말씀해주십시오.”

장의원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인께선…그동안 조리를 하지 않아 원기를 많이 상하셨는데…불행이도 지금 약을 쓰실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약을 쓸수 없다니요?”

이여백의 반문에 장의원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원기를 북돋우는데는 인삼이 최고지만, 진맥결과 척맥이 강하고 활맥(滑脈)이 잡혔습니다. 이렇게 되면…”

장의원은 말을 잇지 못했고 방안은 물뿌린 듯 조용해졌다. 다들 의아해하는 가운데 이여백의 목소리가 울렸다.

“활맥이라면…”
“네, 바로 태기입니다.”

이불위에 놓어진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1개월이 넘은 듯 합니다. 경하드리옵니다. 도련님…”

이게…경하할만한 일인가…경하할만한 일이였던가…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배어나왔다. 어쩌면 동굴에서 염라대왕이 자신을 끌어가지 못한 이유를,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알것 같았다. 살생을 금하는 것은, 생사부를 장악한 명부에서도 어쩔수없이 지켜야 하는 룰일지도 몰랐다. 행운일까, 불행일까…

“의원님…”

문득 울린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에 다들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이여백의 걱정어린 시선이 조용히 그녀를 마주했다. 그런 그에게 안심하라는 눈길을 준 후, 그녀는 령이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약을 쓰지 못한다면…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송구하오나 소인의 재주가 얕아…이미 원기를 상하셨는데 극약을 쓸수 없으니…”

장의원은 말끝을 흐렸고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다만 천명에 맡기셔야 할 듯 합니다…”

장의원은 깊숙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허구픈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염라대왕…이제는 이런 방법으로 그녀를 대처한다는 것인가. 그녀의 미소가 불안했는지 이여백이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 요동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의원과 강호의 낭중들을 죄다 불러서라도, 당신 건강 회복시켜 줄테니까.”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비록 헝클어진 귀밑머리로 인해 그 모습이 처연했지만, 가랑가랑 맺힌 눈물로 인해 그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그녀의 그 올곧은 눈빛은 정교한 옥으로 만든 아름다운 관음상도 미치지 못할 듯 했다. 그리고 그런 예지의 눈빛으로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지금 제 건강을 회복시켜줄 사람은, 단 한사람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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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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