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의 결정, 여정의 닻

모진 세월 속에 흐려진 혈육의 발자취를 이제 와 일일이 찾아낼 길은 없다.


할머니는 평생 당신이 태어나 자란 인천 소래 염전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셨다. 기억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는 늘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고여 있는 듯했다. 일제강점기 수탈이 시작되던 1920년대 초반, 경기도 부천군 남촌면 논현리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이임순(李妊順) 여사. 일제가 아시아 최대 규모의 소래염전을 건설해가던 1930년대 중반, 단발머리 소녀였던 할머니의 유년 시절은 온통 하얀 소금밭과 그 위로 불어오던 바람 속에서 영글어갔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던 천일염전 위로 부서지던 햇살 아래, 어린 이임순에게 고향은 남동생 흥규, 병호, 원순의 손을 잡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뛰놀던 앞마당이자 삶의 뿌리였다.

은빛 소금밭 뒤편에는 비극이 숨어 있었다. 할머니는 첫 번째 시집에서 연이어 얻은 두 아이를 모두 원인 모를 병으로 보냈다. 자식을 품에서 먼저 보낸 어미의 슬픔을 세상은 알아주지 않았다. 시댁에서는 도리어 팔자가 드센 며느리라며 손가락질을 퍼부었고, 할머니는 고향에서 쫓겨났다. 친정집으로도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한 채 운명에 떠밀린 할머니는 부모 형제를 뒤로하고 머나먼 이국땅 간도(間島)까지 흘러 들어가 전주 김씨 집안의 후실(後室)로 들어갔다.

선을 볼 때는 상대가 당연히 총각인 줄 알고 먼 타향까지 시집을 왔던 할머니는, 첫아기를 낳아 행복에 젖어 있던 어느 날 진붉고 화려한 한복을 차려입은 본댁 큰할머니를 마주해야 했다. 자신이 속아서 후실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 할머니의 가슴은 절망감으로 무너져 내렸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평생을 살아야 했던 두 여인의 삶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두 분은 타향의 풍파를 함께 겪어내며 서로의 고독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나라를 잃고 낯선 간도 변방으로 떠밀려온 실향의 땅에서, 두 여인은 서로에게 유일한 고향이자 거울이었을지도 모른다. 본댁이라는 무거운 책임감 속에 자식을 낳지 못해 마음이 마비되어 가던 큰할머니의 숨결과, 고향에서 쫓겨나 속아서 후실로 들어왔다는 배신감에 피눈물을 흘리던 친할머니의 통곡은 만주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서서히 하나의 슬픔으로 섞여 들었으리라. 여인들은 서로의 찢긴 상처를 연민으로 품어 안으며 세월을 견뎌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평생 본댁인 큰할머니만을 아끼고 이뻐했다. 뒤늦게 집안으로 들어온 친할머니는 그에게 그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존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난산으로 첫아이를 잃고 불임이 되어 외롭게 늙어가던 큰할머니는 친할머니가 낳은 어린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그 손주들을 친손주처럼 따뜻하게 아꼈다. 우리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 댁에 갈 때마다 큰할머니는 안방 장롱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과자와 알사탕을 꺼내 손에 쥐여주곤 하셨다. 어린 손주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시던 큰할머니의 눈가에는 항상 소리 없는 눈물이 고여 있곤 했다. 자식을 낳지 못한 여인의 깊은 외로움과 한이 담겨 있었음을 철이 든 후에야 알았다. 두 여인은 역사의 비극과 개인의 불행이라는 파도 속에서 그렇게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가며 삶을 지켜냈다.

간도의 전주 김씨 집안은 거친 만주 땅 위에서 삶을 일궈가던 집안이었다. 본래 증조할아버지가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이주한 뒤 그곳에서 할아버지를 낳으셨으나, 증조할머니가 난산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면서 할아버지는 이웃들의 젖동냥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자라났다고 한다.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남아 가문을 일으킨 증조할아버지는 간도 연길에서 중약방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군자금을 대주었고, 중약방 건물을 독립군의 비밀 연락처로 내어주셨다. 그러나 차츰 독립군 조직의 흔적이 일제의 수색망에 드러나기 시작하자, 가족들은 황급히 왕청현 유수하(柳樹河)라는 외진 농촌 마을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유수하에 정착한 뒤, 증조할아버지는 일제의 의심 가득한 시선을 피해 일부러 낮이면 강과 저수지를 찾아 낚싯대를 드리우며 시간을 보냈다. 수색망을 속이기 위한 철저한 은폐이자 위장이었다. 할아버지 역시 낯선 타향살이의 경계심을 지우기 위해 동네의 한족, 만족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인연을 맺어갔다. 삼대를 지키기 위해 숨죽여 쌓아 올린 그 관계들은, 훗날 할아버지가 미곡 유통(미곡상)을 시작하며 중국 땅에 뿌리를 내리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사업이 제법 번창하여 가세가 풍족해지자, 소래 바닷가에서 쫓겨나 갈 곳 없던 이임순 할머니도 비로소 삶의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비록 후실인 할머니에게 마음을 주지는 않았으나, 상인 가문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인지 인천 처가 쪽에는 아쉬움이 없도록 경제적인 도움을 베풀었다. 장막이 완전히 쳐지기 전, 고향 인천 친정집에서 할머니 앞으로 다정한 서신들이 몇 번이고 오간 것도 이 시절의 기억이었다. 할머니는 고향에서 편지가 당도할 때마다, 유수하 쌀점에서 나온 돈을 고향 친정집으로 부지런히 보내주며 두고 온 형제들의 삶을 보살폈다.

하지만 그 생활이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뱃속에 나의 아버지를 품은 채 배가 서서히 불러오던 1945년 초봄이었다. 패망을 앞둔 일제가 마지막 수탈에 몰두하고, 만주의 철도 노선마다 연합군의 공습이 잦아지던 불안한 시기였다. 고향의 부모님과 남동생들이 그리웠던 할머니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연길에서 인천까지 먼 길을 다녀왔다. 짧고도 꿈같았던 고향에서의 만남을 뒤로한 채 다시 간도로 돌아오던 길, 덜컹거리며 달리던 기차 위로 갑작스러운 폭음이 터져 나왔다. 하늘을 가르며 날아든 비행기들이 만주 철도 일대를 공습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객차 안은 비명과 먼지로 뒤엉킨 아수라장이 되었다. 할머니는 뱃속의 아이를 지키려 만삭의 몸을 웅크린 채, 같이 동행했던 어린 딸의 손을 필사적으로 끌어당겼다. 폭격을 맞은 열차 안에서 적십자 간호병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순간이었다.

피와 먼지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할머니는 그해 5월 7일, 간도의 차가운 땅에서 나의 아버지를 낳으셨고 가을에는 일제가 투항하고 해방이 찾아오면서 세계 지도가 다시 그려졌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념의 장막이 남북과 중국 사이에 내려앉았고 국경은 얼어붙었다. 할머니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고향 인천 땅을 밟을 수 없게 되었고, 소래 염전 마당에서 함께 뛰놀던 남동생들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다.

타향의 하늘 아래서 전주 김씨 가문 역시 시대의 풍파를 피할 수 없었다. 중국 해방 이후, 인민정부가 설립되면서 이어진 토지개혁과 재산 몰수 속에서 집안은 하루아침에 몰락했고, ‘중농’이라는 계급이 매겨진 뒤부터는 감시와 차별 속에 살아야 했다. 할아버지는 생산대 염소농장에서 일하다 누명을 쓰고 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동북 대지에는 홍진(천연두) 역병까지 번졌고, 할머니는 끝내 다섯 살 난 막내아들을 차가운 언 땅에 묻어야 했다. 그 모든 비극 속에서도 할머니를 버티게 한 것은 끝내 잊지 못한 고향과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러던 1950년 초의 잔인한 겨울, 집안이 가장 힘겨운 시절을 지나고 있을 무렵, 얼어붙은 국경을 넘어 기적 같은 편지 한 장이 간도 땅의 할머니 앞으로 당도했다. 전쟁의 불길 속에서 누님의 생사를 애타게 묻던 남동생 흥규의 절박한 서신이었다. 당시 할머니는 어렸을 때 여자라는 이유로 서당에 다니지 못해 우리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셨다. 동생의 이름이 적힌 시커먼 편지를 품에 안은 채 발만 동동 구르던 할머니 대신, 막 옥살이에서 풀려난 할아버지가 등잔불 아래 앉아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할아버지가 무심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타향에서 온 누런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편지 속 고향은 전쟁과 지독한 흉년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 열여섯 어린 나이의 남동생 흥규는 깊은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 팔며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다. 전쟁이 터진 고향에서 어머니는 매일같이 자식들이 굶을까 걱정하며 굶기를 밥 먹듯 하고 계시니, 돌아가시기 전에 누님을 한번 만나보기를 간청한다는 내용이었다. 할머니는 문장 한 구절이 끝날 때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할아버지가 아내의 흐느낌을 뒤로한 채 묵묵히 먹을 갈아 남동생에게 보낼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거친 손끝으로 누런 종이 위에 서글픈 타향의 안부를 눌러 담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소리 죽여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1970년대 중국의 거센 문화대혁명 풍파가 끝났을 때도 굳게 닫힌 국경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시 아버지가 일을 나가시던 생산대대에는 우리 집처럼 이남에 고향을 두고 건너온 실향민 가족들이 꽤 많았다. 특히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남도 출신들이 가정을 꾸리고 살았는데, 주파수가 잘 잡히던 구소련제 라디오는 이 고단한 이주민들이 숨죽여 기댈 수 있는 작고 외로운 숨구멍이었다. 전등처럼 불그스름하게 불이 켜지는 전자관들이 빼곡히 박혀 있던 기계였다. 그 불빛을 바라보며 새벽마다 조심스레 다이얼을 돌렸다. 밖에서는 결코 입 밖에 내지 못할 실향민들만의 애달프고 위험한 비밀이었다.

아버지는 새벽 몰래 고국의 전파를 맞춰 듣던 대한민국 KBS 라디오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인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에 할머니의 사연을 적어 보냈다. 그러고는 새벽마다 침상 옆에 라디오를 두고 소리를 나지막이 죽였다. 원거리 전파 간섭으로 지직거리는 소음 너머, 아버지는 마냥 어머니의 고향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기적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찾아왔다. 사연의 전파가 마침내 장막을 넘은 것이다.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된 고향의 조카가 눈물겨운 소식을 전해왔다.

하지만 기쁨 뒤에 찾아온 소식은 첫 번째 편지보다 더 잔인했다. 그 모진 겨울에 누님을 애타게 찾던 남동생 흥규가 결국 그 직후 6.25 전쟁의 참혹한 난리 통에 목숨을 잃었다는 비보였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남동생 병호 역시 실종되어 소식이 완전히 끊겼으며, 막내동생 원순 씨마저 한국 땅에 생존해 있지 않은 모양이라는 진실이 조카의 편지를 통해 드러났다. 대를 이을 형제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탓에, 하나 남은 조카가 할머니의 가문을 잇기 위해 사후(死後) 양자가 되어 아버님과 삼촌들의 제사를 외롭게 모시고 있다는 서글픈 이야기였다. 이제는 지도 위에서조차 사라져버린 철로변 은봉이라는 곳으로 이주했다는 소식이었다.

편지 봉투에 적힌 주소지는 이미 지도에서 지워져 버렸고, 삼촌들과 조카가 살아가던 그 위치는 지금에 와서 어디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할머니가 평생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던 옛 고향, 고개 너머 넓은 공터에서 마을의 대사를 정했다던 아련한 '논고개' 자락과 소래 염전 주변의 어느 언저리에 가 닿아 있으리라 가늠해 볼 뿐이었다. 비록 지금은 정확한 장소조차 찾을 수 없는 막막한 공간이지만, 그 허허벌판 어디쯤이 바로 할머니의 형제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눈물의 정착지였던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할머니는 몇 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고 우셨다. 본가 친척 단 한 명도 없는 간도 땅에서 언젠가 길이 열리면 기어이 고향에 가 부모 형제들 산소 앞에 술 한 잔 올리겠다던 할머니는, 평생 그리워하던 인천의 소금 바람을 끝내 가슴에 묻은 채 1996년 타향의 흙으로 돌아가셨다. 남북과 중국의 문이 완전히 닫히면서 형제들의 생사조차 모른 채 홀로 외롭게 보내셔야 했던 할머니의 아린 심정, 세월 속에서 쓸쓸하게 삶을 마감해야 했던 그 고달팠던 일생을 되뇔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 천일염이 상처에 닿은 듯 아릿하게 저려온다.

할머니가 떠나신 후, 오랜 세월을 품은 빛바랜 서신들은 우리 집안의 가장 소중한 가업이자 숙제가 되어 나의 손에 쥐여졌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바뀐 2012년, 나는 할머니의 한 맺힌 약속을 대신 지키기 위해 아버지를 모시고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편지 봉투에 적힌 옛 주소는 이미 격변한 지도 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정확한 달동네의 위치 대신, 동사무소 주민센터의 낡은 대장 서류철 속에서만 겨우 확인했던 희미한 기록상의 주소. 옛 흔적은 찾을 길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근 주민센터를 찾아가 애원하듯 매달렸으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개인정보 보호라는 현대 사회의 단호하고도 차가운 행정적 회답뿐이었다. 국경의 장막이 걷히면 고향의 흙이라도 만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삼대(三代)의 염원이, 법률이라는 매끄러운 단어 앞에서 무력하게 멈춰 선 순간이었다. 우리는 끝내 삼촌들의 후손은커녕, 외증조부모님이 누워 계실 유택(幽宅)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가슴속에 시린 아쉬움만을 무겁게 내려놓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평생을 '중국 조선족 4세'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살아왔다. 증조부모님의 간도 이주와 눈물겨운 생존에서 비롯된 이 이름표 아래, 넓은 중국 땅 위에서 자라나면서도 내 핏속에는 늘 정체 모를 소금기가 흐르고 있었고, 그것이 할머니가 물려주신 고향의 유산임을 나이가 들어서야 깨달았다. 어느덧 내 나이 마흔 줄에 접어들었을 무렵인 2014년, 나는 할머니의 나라였던 한국에 직장을 얻어 건너오게 되었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귀화하여 한국 국적으로 바꾸는 일까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렇게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딘 후, 이제는 할머니의 고향이었던 이 땅에서 내가 온전히 살아갈 소중한 자리를 차분하게 찾아가고 있다.

맨몸으로 고국 땅에 취직하여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낯선 시선과 차가운 현실 속에서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고, 매 순간이 시험대였다. 2014년 인천공항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내 손에 쥐어진 것은 방문취업(H-2)이라는 비자 이름표 뿐이었다. 연고도 없는 경남 창원의 한 거친 공장으로 내려가 CNC 선반공으로 고국 생활의 첫새벽을 열었다. 낮에는 시끄러운 기계 소음 속에서 무거운 쇳가루와 냉각수를 뒤집어쓰며 온종일 기계를 돌렸고, 밤에는 피로에 짓눌린 눈을 비벼가며 기술 서적을 파고들었다. 손가락 틈새에 검은 기름때가 가실 날이 없던 주독야경(晝讀夜耕)의 날들이었다. 컴퓨터 기능사 자격증을 손에 쥐고 재외동포(F-4) 비자로 갈아타던 날, 비로소 이 땅에 설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곧장 서울로 올라와 택배회사 물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레일 위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무거운 상자들을 맞닥뜨리며 15개월간 현장을 온몸으로 버텨냈다. 물류 흐름을 밑바닥에서부터 익힌 그 땀방울의 가치를 알아본 한 화장품 무역회사에 스카우트되는 기회가 찾아왔고, 대중국 무역 실무를 총괄하는 책임자 자리까지 오르며 치열하게 성과를 일구었다. 마침내 정착의 안정을 이루었다고 믿었으나, 시대의 급변은 일개 개인의 자리를 그리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사드(THAAD) 사태라는 거센 정치적 풍파로 인해 중국향 수출 물량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결국 4년 6개월간 헌신했던 정든 자리를 내려놓아야 했다. 다른 무역 기업에 취직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이번에는 전 세계를 집어삼킨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았다. 하늘길이 막히며 중국으로 향하던 모든 무역 사업은 속절없이 무산되었고, 나는 다시 한번 맨몸으로 차가운 현실 앞에 서야 했다.

중국에서는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의 꼬리표를 달고 경계인으로 살았고, 할머니의 나라라 믿고 찾아온 이곳 한국에서는 또다시 '외국인' 혹은 '조선족 동포'라는 기묘한 시선 속에 갇혀야 했다. 핏줄의 고향으로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안식을 찾지 못해 서성이던 새벽마다, 내 가슴을 치고 올라오던 것은 다름 아닌 할머니가 물려주신 해묵은 소금기였다. 그것은 차별과 편견의 벽에 부딪혀 상처 입은 내 마음을 따갑게 헤집는 아픔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모진 역사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온 강인한 생명력의 증거이기도 했다. 정착의 여정 속에서 겪은 수많은 우여곡절은, 어쩌면 내 핏속에 흐르는 소금 결정을 더욱 단단하게 벼려내기 위한 통과 의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낯선 한국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지 어느덧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격동의 세월을 거쳐 지금의 나는 중국 수출무역을 하는 한 물류회사의 평범한 직원으로 돌아와 묵묵히 수출 업무를 보고 있다. 화려했던 과거의 높은 직함들은 미련 없이 내려놓았지만, 거친 현장의 실무를 바닥에서부터 하나씩 익히며 흘리는 오늘의 땀방울이 오히려 내 입술에는 더없이 달게 느껴진다. 과거 창원 공장 시절과 택배 현장에서 몸으로 체득한 물류의 생생한 감각, 그리고 독학으로 다져온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력을 이 투박한 현장 시스템에 접목해 가고 있다. 바코드 스캐너와 데이터베이스를 연동하고 출고 효율을 눈에 띄게 높여가는 일련의 과정은 나에게 단순한 노동을 넘어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즐거운 도전이다.

물류 현장의 밑바닥에서 주어진 업무들을 차근차근 완수해 나가며 마주하는 난제들을 내 손으로 하나하나 풀어가는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는 훨씬 더 단단하고 깊은 평온함을 선사한다. 낮에는 살아 숨 쉬는 업무 현장에 온전히 집중하고, 퇴근 후에는 최신 프로그래밍 기술과 글쓰기를 독학하며 내면의 내공을 다진다. 이 밀도 높은 시간은, 타향을 떠돌던 이주민의 역사를 끝내고 마침내 할머니의 고향인 이 땅에 온전한 내 삶의 서사를 단단하게 뿌리내리게 할 가장 소중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

기이한 인연이었을까,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할머니의 영혼이 손주의 발걸음을 이끈 보이지 않는 인도였을까. 내가 머나먼 중국 땅을 돌아 어찌어찌 흘러와 지금 일터와 보금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곳은, 다름 아닌 나의 할머니 이임순 여사가 어릴 적 어린 남동생들과 함께 갯벌을 뛰놀며 자라던 바로 그 고향 땅, 소래습지생태공원과 은봉이라는 곳이 있는 인천 논현동이랑 가까운 곳이다. 내가 매일 출퇴근길에 숨을 쉬고 발을 딛는 이 동네가 바로 할머니가 유년 시절 흥규, 병호 삼촌들과 손을 잡고 뛰놀던 그리운 고향이었다니,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오래된 소금기 같은 먹먹함이 가슴에 깊이 번져간다. 할머니의 유년과 나의 현재가 같은 공간에서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미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지금 곁에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매주 주말마다 아버지의 투박한 손을 잡고, 할머니가 평생을 그리워하던 이곳 소래 갯벌과 염전의 흔적을 찾아 함께 거닐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등잔불 밑에서 메마른 목소리로 읽어 주셨던 그 편지 속,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옛 달동네 자리를 함께 더듬어보며, 할머니의 맺힌 한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렸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주말이면 나는 할머니가 그렇게도 그리워하시던 고향 땅의 논현 근처의 소래포구 수산시장까지 도보로 버릇처럼 들르곤 한다. 옛 폐염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습지공원 너머로 소금기 가득한 바다 바람을 맞을 때마다, 어릴 적 할머니가 말씀하시던 고향의 천일염전 풍경이 눈앞에 아지랑이처럼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모진 세월 속에 흐려진 혈육의 발자취를 이제 와 일일이 찾아낼 길은 없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와 그녀의 형제들이 끝내 다 밟지 못했던 이 인천 논현동의 흙을 매일 밟고 숨을 쉬며, 할머니의 영혼이 마침내 고향의 소금 바람을 타고 안식을 얻었으리라 믿는다. 증조부의 군자금도, 간도 쌀전의 풍요도, 폭격 속에서 살아남은 아버지의 생명과 빛바랜 편지지도 결국은 하나의 바람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중국에서 조선족 4세로 태어나 끈질기게 살아남아 마침내 할머니의 고향 땅에 내린 뿌리. 그것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단단한 소금 결정으로 새겨져 있다. 폐염장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습지공원 너머로 소금기 가득한 바다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오늘도 할머니의 숨결이 머무는 인천 논현동의 소금 바람을 깊이 들이마시며, 대륙을 넘어온 오랜 여정의 닻을 묵묵히 내린다.

제28회 재외동포 문학상 작품 응모 (落选作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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