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2
[ 내가 만든 기다림을 기다려야 하는 목마름…………….]
吟遊詩人 金 佐煥
80~90년 전에 연락이 끊어진 사람의 경로를 뒤쫓아 드디어 그 사람의 흔적과라도 만나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 같으다.
(김“동”호) (김“동”규) (김익“환”)등의 인물들이 혹시 언양김씨 효자공파의 항렬자를 따라 지어진 이름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컬러 펜으로 표시해 놓은 인물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여관으로 출근 하신 맹고군(孟高君)선생(先生)께 부탁하였다.
확인을 마친 맹(孟)선생(先生)의 대답은 (경주김씨)이거나 (안동김씨) 이거나 또 뭐라 하는 김씨들이라며 (언양김씨)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귀담아 듣지 않고 이내 털어버렸다.
이제 내일이면 돌아가야 한다.
아무런 단서도 붙잡지 못하고 황망하게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에 마음이 급해졌다.
[맹 선생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 더 좋은 방안을 구상해 봅시다.]
(………………..)
조선인의 첫 정착 과정과 밀산의 이러 저러함 들을 파악한 나는 사업적 난관에서 묘수 찾기에 골몰하듯 묘안을 만들어 내려 골몰하였다.
(김 선생이…….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았으니 어떤 묘안이 있겠는지 먼저 말해 보시라요.)
맹(孟)선생(先生)도 답답해 하였다.
[…………………..]
(원래 이런 일은 금방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간을 두고 해야 합니다. 그러다 덜커덩하고 뭔가가 걸려 들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
묘안 찾기의 맹숭함을 정리하고 조선족 마을을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며 맹(孟) 선생에게 부탁하였다.
맹(孟) 선생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해방촌으로 향하며 촌민사무실에 모여 있을 사람들에게 줄 사과 2박스와 귤 2박스를 샀다.
시내에 있는 조선족 여관에서 해방촌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얼마지 않아 조선족 마을 해방촌으로 들어서자 한글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전시용으로 만든 북조선 마을 같은 풍경일 수도 있지만 130여 년 전 조선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을 안고 이곳으로 들어와 (삽)과 (곡괭이)만으로 황량한 벌판을 파 뒤집어 지금의 옥토를 만들고 마을을 만들어 지금에 이르렀음을 생각하며 나는 조용히 되뇌었다.
[이제라도 부자로 살게 되었으니 천만 다행입니다.]
(……………………………….)
[네 동포들………고생 참 많았습니다.]
(………………………)
[두순 할아버지…여기가 아니라면 당신은 만주국 어느 곳에 정착하여 어떤 생각과 어떤 각오로 여기에 남으려 하셨나여?]
(………………………….)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맹(孟) 선생은 멍한 나에게 최초 조선인들의 삶을 부연하여 설명하였다.
(그저…거지 였습니다. 식량꺼리나 싸 짊어지고 동냥밥도 얻어먹으며 밤이면 나뭇가지 몇 도막 엇갈려 세워 밤이슬이나 피하여 잠자며 걸어서 걸어서 옮겨왔습니다.)
[………………..]
(그렇게 정착한 후 한 20년 정도 지나서야 집도 제대로 짓고 마을 꼴이 된 것입니다.)
[………………]
자동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맹(孟) 선생은 그렇게 설명하였다.
100여년 전에 굼벵이처럼 땅바닥에 자신의 몸을 대이고 사방으로 휘었다 폈다를 반복하여 땅바닥을 긁어가며 여기까지 왔을 조선인들…………..
그래도 우리 민족이었기에 살아남았을 것이다.
자동차는 해방촌 마을 중앙에 지어진 큰 건물 앞에 멈추었다.
한국적으로 말하자면 마을회관 일터이지만 규모가 상당히 컸다.
게이트 장은 물론 노인정과 마을 전체의 회의를 할 수 있는 공회당까지 겸해진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마을 촌장과 총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촌장은 자신의 원래 고향은 북조선이라며 자신도 김씨이기는 김씨인데 경주 김씨라고 소개를 하며 어제 맹(孟)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267호 세대 중 김씨를 파악 해 보니 경주. 안동. 전주. 김해 김씨일 뿐 언양김씨(彦陽金氏)는 나타나지 않았다며 나의 눈치를 살폈다.
잠깐의 침묵이 있은 뒤 총무라는 사람은 자신은 김해 김씨인데 언양김씨(彦陽金氏)는 처음 들어본다는 것이었다.
밀산 인근의 조선족 마을 중 제일 큰 해방촌의 사정이 이러하니 마음은 더 답답했다.
잠시간 멈추었던 대화를 이어가며 인식한 것은 고맙게도 래도 맹(孟) 선생이 사발통문을 돌리고 있다는 확인 이었다.
나는 갑자기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중국은 인구 억제 정책으로 1세대는 1명의 자녀만을 낳을 수 있으며 소수민족에 한하여 2명까지 출산을 허용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음을 생각한 나는 두순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동안성으로 오시기 전 해주 오씨라는 여인과 결혼은 하였으나 동행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 여인과 어쩌고 저쩌고 하여 손(孫)을 남긴 흔적도 없는 30대 말이나 40대 초반의 나이가 된 늙다리 남자가 만주 동안성으로 들어와 1945년 해방 당시에 47세 정도가 되었을 테니 고물이나 다름없는 남자가 제대로 가정을 이루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촌장과 주변으로 모여든 나이 많은 노인들을 향해 하나하나 물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30대 말이나 40대 초에 짝 없는 남자로 이곳으로 오셨을 텐데 여자를 만나 제대로 가정은 꾸렸을까요?]
(일 없습니다. 그 정도 남자였으면 한창 왕성할 때인데 100% 가정 꾸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중국 정부의 정책은 소수민족만 1세대에 2명만 낳도록 하였는데 만약 딸만 2명을 낳게 되면 후손(後孫)은 끊어지다는 결론인데 우리 할아버지가 그런 경우였다면 후손을 찾을 길이 없겠지요?]
(아닙니다..아닙니다. 그때 눈 밝은 남자는 마누라 3명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자신의 할아버지 세대에서는 (도피)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도피)란 일종의 산적과 같은 무리들로 오늘날로 치면 (조직폭력배단체)가 있었는데 그놈들이 남자들을 많이 죽였다.
이를테면 쌀을 빼앗아 가려는데 맞선다든가 하면 그대로 죽여 버리는 형국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편을 잃은 조선족 여자들이 많아 눈 밝은 남자들은 마누라 셋도 데리고 살던 시대로 소수민족 2명 정책은 엉망이 되어 어느 집은 7명의 자녀가 있는 집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 차라리 우리 두순 할아버지는 마누라 넷을 데리고 사는 남자였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들을 취합(聚合)하고 자리를 정리하여 일어섰다.
얻은 것이 없어서 인지 몸을 더더욱 나른하게 하였다.
더 이상 다른 곳을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맹(孟) 선생이 언양김씨(彦陽金氏)를 찾는 소문을 여기저기 늘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해방촌을 떠나 조선족 여관으로 돌아오다 맹(孟) 선생은 시내에 있는 밀산시 조선인 연합회 사무실에 들려 회장에게 부탁하여 그 단체도 (언양김씨)를 찾는 일에 합류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바로 여관으로 돌아오지 않고 조선인 연합회 사무실로 향하였다.
얼어붙은 밀산의 시내로 들어서 중심가인 듯 한 한 곳에 차가 멈추었다.
낡고 오래된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나이 많은 남자 3명이 테이블에 둘러 앉아 마작을 하고 있던 것을 정리 시키고
우리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찾으려는 김두순(金斗淳) 할아버지를 설명하며 이 분의 후손을 찾을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이 도와 줄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회장은 족보에서 두순 할아버지의 옆에 쓰인 “해방당시 만주 동안성 조섭 행방불명(解放當時 滿洲 東安省 遭燮 行方不明)”이라는 글은 누가 썼는가를 집중적으로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과거에 족보를 정리하던 분이 쓰지 않았겠습니까?)
[ “조섭(遭燮)”이란 단어를 함부로 쓴 듯합니다.]
(……………..)
{ “조섭(遭燮)”이란 글자를 한국에서는 (조섭) 또는 (조변)이라고 읽을 것입니다.}
(……………..)
[ 이 “조섭(遭燮)”이란 글자의 뜻은 “갑자기 무슨 일을 당하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강도에게 당하다 하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한문인데 참 이상하게 적어 놨습니다. ]
(……………….)
( 해방당시 만주 동안성 조섭 행방불명(解放當時 滿洲 東安省 遭燮 行方不明)을 해방당시 만주 동안성 행방불명(解放當時 滿洲 東安省 行方不明)으로 써야지…왜 행방불명된 사람이 “ 조섭(遭燮) ”당한 걸로 써 놓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회장의 눈은 예리하였으나 혹시 “누군가에 의하여 살해” 된 분의 후손을 왜 찾으려 하느냐 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흐르는 것 같아 나는 내 주장과 같은 추가적인 설명을 이어 붙였다.
[저의 두순 할아버지는 과거에 이곳에 혼자 오셨습니다. 해방으로 인하여 중국은 문이 닫히고 북한은 드나들 수 없는 지역이 되었으니 이 곳에 왔던 조선인들은 모두 갇혀버린 겁니다.]
(……………)
[1992년 중국과 한국은 수교하였고 그때서야 이곳 조선족은 한국을 오갈 수 있었습니다.]
(…………….)
[두순 할아버지는 이곳에 혼자 오셨고 1945년 해방 전 까지는 한국으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만약에 두순 할아버지가 “조섭(遭燮)” 당하였다면 누군가의 칼에 맞아 돌아가신 후에 나 칼 맞아 죽임을 당했다고 죽은 사람이 스스로 연락하여야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
[그렇지 않다면 두순 할아버지의 주변인 누군가가 한국으로 연락을 해주었을까요? 80년 전에 그런 연락을 대신 하여 줄 사람이 있었을까요. 족보를 기록한 누군가의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내 설명은 다 듣고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회장에게 어떤 방법이든 김 두순의 후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회장은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다.
자신이 彦陽金氏(언양김씨)인 사람은 누구든 연락하여 달라는 공문을 만들어 헤이룽강 성내의 전체 지부에 돌려 보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맹(孟) 선생은 조선족 집단 단체를 들쑤시고 조선족 연합회 밀산시 지회장은 흑룡강성 내의 지역별 연합회장과 연대하여 언양김씨(彦陽金氏)는 손들고 나타나라는 방을 붙여 가는 방법의 2중화………
그런 방법을 강구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만든 기다림을 내 스스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나는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며 가방을 챙겼다.
두순() 할아버지의 후손을 찾기 위한 4박 5일의 중국행은 두순 할아버지의 후손이 아닌 언양김씨(彦陽金氏) 누군가를 잡기 위한 덫을 놓고 돌아가야 하니 많이 쓸쓸하다.
쾌속 열차를 타면 목단강 공항까지 가는 시간을 2시간이나 단축 할 수 있을 것 같아 열차를 탈 수 있는 계서역 까지 나를 옮겨줄 택시를 예약 해두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5시에 도착할 택시를 타야 한다.
한국에 돌아가 기다려야 하는 어느 날 희소식이 날아와 한 걸음으로 이 밀산에 다시 올 수 있기를
바라며 이번은 쓸쓸히 돌아가야 한다.
내가 만든 기다림을 기다려야 하는 목마름…………….
NO-13
[ 참 추웠던 곳………………….]
吟遊詩人 金 佐煥
이제 내일 중국을 떠나야 한다.
김성호 사장님!
맹고군 선생님!
나는 아무런 소득없이 한국으로 돌아가지만 중국 땅에서 두 분의 가슴을 만났고 인간의 정을 만났다.
수고료도 드리지 않았는데 그 추운날 왜 이 두 분은 나를 위하여 고생하였을까?
그동안의 여관비를 계산하려 하니 김성호 사장님은 (맨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슴 아프다며 여관비고 뭐고 그만두라 신다.)
그럴 수는 없다.
그냥 내 집에 있는 반찬과 밥으로 식사 하자며 (밥까지 챙겨주신 분……….)
얼마간의 돈을 챙겨 여관비를 드리려 하였으나 그만두라 내던지고 그러면 안된다는 다시 드리기를 반복하여 겨우 겨우 내 인사를 하였다.
행복하셨으면………………
김성호 사장님의 남은 인생이 행복하였으면………………
중저음(中低音)의 목소리 음색(音色)이 참 듣기 좋았으며 그런 말투로 “상대가 들어서 기분 안 좋을 말”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자제력을 갖으신 분이었다.
여러 가지 마음에 복잡함도 있을 것이지만 사모님과 함께 남은 인생 늘 행복했으면…………….
맹고군 선생님!
참 고마웠다.
그는 밀산의 조선족 사회에서 군림(君臨)하는 자가 아니었으며 그냥 세글자의 “이름”만으로도 존중받는 분이었다.
그러한 분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으니 나는 다시 두분의 사람을 얻은 것이다.
새벽4시에 일어나 택시를 타며 (김성호 사장님)을 껴 안았다.
내가 다시 올 때 까지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계서에서 택시를 내려 목단강까지는 쾌속 열차를 탔다.
[워 취 무단장꾸 어쥐 페이쥐 치창]
(하오 하오……)
택시에서 내리니 30Rmb의 요금을 요구하였다.
첫 번째는 4배를 바가지 쓸뻔 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2배를 바가지 쓴 것이었지만 그래 그러면 어떠리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헤이룽장 성 밀산을 출발하여 세종의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였다.
두 분에게 위쳇(We Chat)을 통하여 도착하였음과 고마웠다는 인사문을 보내고 옴팍 뒤집어 쓴 감기와 피곤에 녹아떨어지고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문자가 와 있었다.
来信收阅,获悉你们安全回府很心悦。茫茫人海,异国他乡认识你们是一种缘份。来曰方长尽我最大能力滿足您的寻根宿愿。静情等待!中国,密山金成镐。2024年12月29日
[나는 당신의 편지를 받았고 당신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쁩니다. 광활한 인파 속 낯선 땅에서 당신을 만나는 것은 일종의 운명입니다. 뿌리를 찾고자 하는 당신의 오랜 염원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십시오!
중국, 미산 진청하오(Mishan Jinchenghao). 2024년 12월 29일]
조선족여관 김성호 사장님 이셨다.
과거에 자신도 선대()의 뿌리를 찾았는데 의외로 자신은 참 쉽게 찾았었다고 하였었다.
한국에 들어와 안동김씨() 종친회를 찾아가 자신의 큰 아버지 성함을 넣으니 줄줄이 이어져 나오더라며 한국은 그런 것이 잘 되어 있는데 중국은 그렇지를 못하여 안타깝지만 마음상하지 말고 기다리라 했던 눈빛조차 따뜻했던 김성호 사장님………..
김 성호씨는 그길로 선대들이 살고 있는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삼산리로 달려갔으나 큰 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되시었고 대신 사촌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자신들의 부모 세대는 죽어서라도 고향에 도착하고 싶은 소망을 갖고 살다가 가신 분들로 어느 집이든
[화장을 하여 뼈 가루를 (싱카호)에 뿌리라, 그리하면 강물을 따라 소련을 거쳐 동해로 흘러가 언젠가는 남한 땅에 도착한다.]
이름께나 날린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뼈 가루를 강에 뿌리는 것이 그들의 장례 의식이었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요. 그때 우리 아버지의 유해를 조금만 남겨 놓을 것을……..]
무엇이 정답일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의 고향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안동김씨()라는 성씨와 족보() 덕분일 것임은 분명하였다.
세월이 변하여 족보() 조차 쓰잘떼기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맹고군선생에게서도 문자가 왔다.
그가 준 [밀산 조선족 백년사]에 적혀 있는 이름 중에 가운데 자를 동로 하고 1935~1945년 정도에 태어난 한 사람을 확인해 달라는 내 요청에 대한 회신이었다.
[金佐焕老师,您好?发来的微信收到了。我与星光村金东成老人通过话了。金东成老人是1945出生,曾在密山兴光村任过支部书记和村长。他的籍贯是韩国全州。
明天我能见到虎林县朝鲜族老年协会会长。我向他请求寻彦阳金氏的有关事宜。请您放心我一定尽我所能。 明天我还能见到金东成老人的妹妹金粉善]
[안녕하세요, 김좌환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위쳇 메시지를 잘 받았습니다. 성광촌의 김동천씨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김동천 선생은 1945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한때 밀산 성관촌에서 지부 서기와 촌장을 역임했습니다. 그의 출신지는 대한민국 전주입니다.
내일은 후린현 대한노인회 회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언양김씨 가문을 찾는 것과 관련된 사항을 전부 알아 볼 것입니다. 최선을 다 할 테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회신이었다.
참 고마웠다.
내 지인으로 건강하게 살고 계시기를 늘 바라야 한다.
그리고 기다려 봐야지…
내가 죽는 날 까지 희소식을 받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죽어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면 밀산은 엄청 추웠다고 알려드려야지………………
NO-14
[ 사람의 발길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까………………….]
吟遊詩人 金 佐煥
흑룡강성 만으로 한정해도 조선족 마을은 499개 지역으로 널려져 있다.
이 499개 마을의 어느 곳에 두순() 할아버지의 후손은 존재하고 있을까!
나는 김성호씨와 맹고군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어제 새벽 밀산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장거리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 였습니다.
피곤함에 깊은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불행한 뉴스가 긴급속보로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 2시에 태국 방콕을 출발하여 오전 8시 309분에 한국의 으로 착륙()하려던 비행기가 새 떼와 충돌하여 한쪽 엔진이 불이나 비상착륙을 하려다 폭팔하여 대부분의 승객이 사망한 듯 합니다.
안탑갑습니다.
김성호 사장님. 그리고 맹선생님….
우리는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저의 밀산방문에 시간과 정성을 들여 우리를 저희를 맞아 주신 점 가슴깊이 느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언제까지라도 밀산에서 베풀어 주신 은혜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러한 중에 만났던 다른 분들의 환대에 대하여도 (조선민족)이었기에 그렇게 베풀어 주셨을 것이기에 모두 고맙습니다.
늘 몸 조심 하시고 다시 만날 때 까지 건강 하십시오.
2024년 12월 29일 대한민국 세종시에서 김좌환 드림
.来信收阅,获悉你们安全回府很心悦。茫茫人海,异国他乡认识你们是一种缘份。来曰方长尽我最大能力滿足您的寻根宿愿。静情等待!中国,密山金成镐。2024年12月29日
나는 당신의 편지를 받았고 당신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쁩니다. 광활한 인파 속에서 낯선 땅에서 당신을 만나는 것은 일종의 운명입니다. 뿌리를 찾고자 하는 당신의 오랜 염원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십시오!
중국, 미산 진청하오(Mishan Jinchenghao). 2024년 12월 29일
김성호씨에게 보낸 위쳇문장 대한 회신을 받았다.
참 고마운 사람들……
우리는 같은 민족………..
그러하였기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사람과 사람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사연을 가슴으로 새길 수 있었을 것이다.
NO-15
[ 더 이상의 방법은 없을까?]
음유시인 김좌환
어쩌면 이 헤어짐의 역사를 이어 붙이는 것이 영영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은 초연해졌다.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
분명 중국땅 어디쯤엔가 뿌려진 씨앗을 있을 것이고 그 씨앗은 오늘 하루도 살아가고 있을 터인데 말이다.
나는 바지막 방법으로 중국 대사관의 다이빙 중국대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수신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2길 27(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 주한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
戴兵 대사님
발신 : 세종특별자치시 반곡 9길 16 김좌환
Tel : 010-4531-5865 / mail: k-c-j@hanmail.net
제목 : 어느 한국인의 간절한 염원
중화인민공화국의 발전과 戴兵 대사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저는 한국 세종특별자치시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金佐煥이라는 사람입니다.
저는 과거에 한 18년 동안 중국을 빈번하게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 시기는 1990년대 중반에서부터 2000년대 초까지로 생각되며 저의 사업상에 필요한 물품을 중국에서 OEM 생산하여 한국으로 반입하는 일이라 절강성과 강소성. 산동성을 자주 다녔었던 사람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중국 출입을 자주하는 저에게 이런 부탁을 하셨었습니다.
일본시대 때 만주로 건너가서 행방불명이 되신 아버님의 당숙(할아버지의 사촌동생)의 뿌리들을 찾아 달라는 부탁였습니다.
중국은 한국의 98배나 되는 대국이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더라도 국내선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몇 개의 나라의 영공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시는 저의 아버님은 중국에 들어가서 이리 저리 수소문 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 하신 것입니다.
공장지대가 많은 남방을 자주 다녔을 뿐 동북으로 갈 일은 전혀 없었으니 저는 아버님의 부탁을 이행 할 수 없었으며 그런 아버지는 2020년 1월에 92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도 아버지의 나이를 먹어가며 많이도 후회하였었습니다.
아버님의 부탁 “뿌리찾기” 하지 못하였던 것에 대한 후회 인 것이지요.
만주국 동안성에 살았었으며 1945년 해방 전 까지는 연락이 닿았으나 그 후에 연락이 끊어진 (할아버지의 사촌동생)의 후손들을 찾아보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외면한 것이 가슴에 한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80여 년 전에 연락이 단절된 할아버지의 사촌동생의 흔적과 그 후손들을 이제라도 찾아보려 만주국 동안성은 현재의 중국 어디인가를 찾아가다 만주국 동안성은 흑룡강성 밀산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24년 12월 23일에 한국을 출발하여 목단강으로 건너가 300km 떨어진 흑룡강성 밀산시를 다녀왔습니다.
(밀산 지역의 조선족 마을) (조선족학교) (조선족 노인회사무소)등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1898년생 김두순(金斗淳)의 후손을 찾으려 애를 썼으나 세상은 많이도 변하여 많은 조선족들은 개방도시로 이주하여 20%정도나 자신들의 고향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조선족 마을의 서기들도 만났었으며 조선족 학교에도 찾아가고 노인회 사무소도 찾아갔으나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1898년생 김두순(金斗淳)의 후손]을 찾는 일이 어렵 다면은 자신의 선조가 언양김씨(彦陽金氏)인 사람을 찾으려고도 하였습니다.
한국은 김씨라 하더라도 (경주 김씨)가 있고 (김해 김씨)가 있고 (안동김씨)가 있는 등으로 많은 김씨가 있는데 저는 특이하게도 언양김씨(彦陽金氏)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방법이 확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입니만, 이러한 방법마저도 실패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여러 사람을 알게 되었으며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여러 곳에 소문을 내어 [1898년생 김두순(金斗淳)의 후손], [언양김씨(彦陽金氏) 후손] 찾는 일을 도와주겠다는 분들이 많았으니 아무런 단서를 잡지는 못하였더라도 그러한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만난 것이 보람이었습니다.
1935년경에 만주로 들어갔으니 30대 말경에 만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런 젊은 남자는 분명 그곳에서 후손을 남겼을 것입니다만, 만주 동안성에서 다른 곳으로 또 이주를 하였었을 수도 있을지 모른 다는 생각에 (흑룡강신문)에도 광고를 냈습니다만 광활한 중국 땅 곳곳에 저의 사연을 전파 시킬 방법이 한국인에게는 없었습니다.
한 외국인이 일본의 침략으로 만들어진 과거의 역사 때문에 중국에 남겨진 뿌리를 찾으려는 이 사연을 외면하지 마시고 도와주시기를 간청합니다.
1. [1898년생 김두순(金斗淳)의 후손]
2. [언양김씨(彦陽金氏) 후손]은
중국 어느 곳에서 인가 살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사연을 보내고 좋은 소식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꼭 도와주시기를 간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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收件人:戴兵大使阁下
首尔特别市中区明洞2街27号 (中华人民共和国驻韩国大使馆)
发件人:金佐煥 (世宗特别自治市半谷9街16号
电话:010-4531-5865
主题:韩国人的殷切期望
祝愿中华人民共和国的发展和戴兵大使阁下的事业蒸蒸日上。
我是一名居住在韩国世宗特别自治市的韩国人,名叫金佐煥。
在过去的18年中,我频繁前往中国。这个时期大约是从1990年代中期到2000年代初期,因我的业务需要从中国进行OEM生产并将产品进口到韩国,因此我经常前往浙江省、江苏省和山东省。
我的父亲曾向我提出一个请求,因我频繁往返于中国。他希望我能找到在日本占领时期失踪的父亲的堂兄(我祖父的表弟)的根源。
由于中国的面积是韩国的98倍,即使乘坐国内航班从西向东飞行,实际上也相当于穿越几个国家的领空。我的父亲并没有意识到这一点,他认为只要我进入中国四处打听,就能轻易找到相关信息。
虽然我常常去南方的工厂区域,但从未前往东北,因此未能履行父亲的请求,而我的父亲于2020年1月以92岁高龄去世。
岁月流逝,我也逐渐到了父亲的年纪,心中充满了遗憾。我对未能完成父亲的“寻根”请求感到深深的懊悔。
父亲希望我寻找在满洲国东南省生活的、在1945年解放前仍有联系的(我祖父的表弟)的后代,但在此之后联系便断绝了,这一请求在我心中留下了无法释怀的遗憾。
经过80多年的联系中断,我终于决定寻找我祖父的表弟及其后代,了解到满洲国东南省如今位于中国的黑龙江省密山市。
2024年12月23日,我从韩国出发,前往黑龙江省密山市,行程300公里。
我走访了密山地区的朝鲜族村庄、朝鲜族学校、朝鲜族老年协会等多个地方,努力寻找1898年出生的金斗淳的后代,但世事变迁,许多朝鲜族人已迁移至开放城市,只有约20%的人仍然居住在故乡。
我曾与朝鲜族村的书记会面,也访问了朝鲜族学校和老年协会,但未能获得任何线索。
如果寻找1898年出生的金斗淳的后代太困难,我也尝试寻找自己的先祖——彦阳金氏的人。
尽管在韩国,金姓有很多种类,如庆州金氏、金海金氏和安东金氏,而我独特地属于【彦阳金氏】。我曾希望这种方法能提高找到线索的概率,但即便如此,这一方法也以失败告终。
在这个过程中,我结识了许多人,虽然我回到韩国后未能找到任何线索,但许多人表示愿意帮助我寻找1898年出生的金斗淳的后代和彦阳金氏的后代,这让我感受到他们温暖的心意,倍感欣慰。
我的祖父在1935年左右进入满洲,年约三十多岁。这样年轻的男子,显然在当地留下了后代,但我也考虑到他可能已经迁移到其他地方。因此,我在黑龙江日报上发布了广告,但对于我们这些韩国人来说,传播我故事的方式非常有限。
作为一名外国人,我恳请您不要忽视因日本侵略而遗留下来的历史,帮助我寻找在中国的根源。
1)1898年出生的金斗淳的后代
2)彦阳金氏的后代
他们可能生活在中国的某个地方。
我期待着您的回复,并希望能收到好消息。恳请您给予帮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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