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학전반에 처음 들어가던 해부터 2005년 고중을 졸업하던 해까지. 내 어린 시절은 거의 전부 이 도시에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속한 작은 도시, 룡정. 코로나가 끝나고 처음으로, 이제 세 살이 된 아이를 데리고 처음으로, 다시 돌아갔다.

간간이 돌아가보기는 했지만 2023년은 무언가 달랐다. 코로나 이후 처음이기도 하고,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고향에는 그래도 아직 맞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더 가고 싶고, 가면 또 특별하다. 애를 써서라도 가려는 이유 — 그런 뉘앙스로, 폰에 찍힌 사진의 순서대로, 이 여름을 기록해둔다.


2023년 8월 16일 오후 1:58 — 도착후 첫 사진

오후 1:58 · 파란 유리창이 가득한 오래된 건물오후 1:58 · 파란 유리창이 가득한 오래된 건물

처음 찍은 사진이 이것이다. 파란 유리창이 인상적인 건물 — 해란강 영화관. 천천히 로라장으로 변신, 그리고 초중인 룡정중학을 다닐때 12.9예술절 절목을 위해서 자주 드나들던 곳이다. 안에서 춤 연습도 하고 놀기도 하고, 그때문인지 결국 우리반은 두팀이나 모두 12.9 무대에 올랐었다. 그 무대는 아래에서도 나오지만 바로 룡정영화관에서.


2023년 8월 17일 새벽 4:45–4:59 — 새벽에 혼자 걷다

새벽 4:45 · 아직 어두운 하늘, 조용한 운동장새벽 4:45 · 아직 어두운 하늘, 조용한 룡정중학 운동장

새벽 네 시 사십오 분. 시차 때문인지, 오래간만에 온 고향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혼자 나왔다. 하늘은 낮게 깔려 있었고, 소나무들이 어둠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기와 지붕이 있는 건물이 바로 대성중학. 초중 다닐시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뻐스로 드나들었었다.

새벽 4:46 · 룡정중학교 정문새벽 4:46 · 룡정중학교 정문

룡정중학교 정문 앞에 섰다. 한국어와 중국어가 나란히 쓰인 교문 — 길림성 연변 자치주 룡정시 룡정중학, 吉林省 龙井市 龙井中学. 초중 시절을 여기서 보냈다. 새벽에 이 앞에 혼자 서 있자니 감정이 이상하게 뒤섞였다.

새벽 4:46 · 새벽 4:46 · "별빛 찬란한 민족학교"

교문 옆 벽에 금빛으로 새겨진 문구: 星光璀璨的民族学校 / 별빛 찬란한 민족학교. 한참 바라보았다. 조선족 학교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담긴 한마디였다. 어릴 때는 그냥 지나쳤을 이 문구가, 지금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새벽 4:59 · 해란강새벽 4:59 · 해란강

해란강. 새벽 다섯 시 가까이, 강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로 아파트들이 이른 빛을 받기 시작했다. 이 강을 몇 번이나 건넜는지 모른다. 학교 가는 길에, 친구 집 가는 길에, 새벽에 운동대 연습을 하느라 달려서, 또 특별한 이유 없이. 강과 이 "새 다리"는 그대로이다.


2023년 8월 17일 오후 1:13 — 낮에 찾은 소학교

오후 1:13 · 룡정중학교 운동장과 본관오후 1:13 · 룡정실험소학교/중심학교 운동장과 본관

낮에 내가 다녔던 소학교 앞을 지났다. 환한 햇살 아래 보니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본관 건물은 새로 빌드되었는지 더 깔끔했고, 전통 기와 지붕이 올라가 있었다. 예전 기억 속 건물과는 많이 달랐다. 운동장은 인조잔디와 빨간 트랙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6년동안 축구써클, 학교 축구팀에서 공을 찰때의 모래 운동장도 갑자기 그리워진다.

오후 1:13 · 운동장 한켠, 행사 준비 중오후 1:13 · 운동장 한켠, 행사 준비 중, 아마 운동대

운동장 한켠에 빨간 천막이 쳐져 있고, 파란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아마 운동대회가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때보다는 조금 앞당겨진거 같다. 학교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2023년 8월 24일 오후 6:08–6:15 — 저녁 시내

오후 6:08 · 저녁이 시작되는 시내 거리오후 6:08 · 저녁이 시작되는 시내 거리

저녁이 되어 시내로 나갔다. 가게들이 하나둘 불을 켜기 시작하는 시간. 한국어와 중국어가 섞인 간판들, 전동 오토바이, 익숙한 얼굴들. 이 거리를 어릴 때도 자주 걸었겠지. 기억은 흐릿해도 발이 기억하는 길이 있다.

오후 6:15 · 老号川 마라탕·쌀국수 가게오후 6:15 · 老号川 마라탕 가게

老号川 — 로호천 마라탕 쌀국수. 고중 다닐때에 생겨난 가게, 아직도 여기 그대로. 저녁은 이걸로 해결했다.


2023년 8월 25일 오전 6:33 — 이른 아침의 市标

오전 6:33 · 용 조형물 로터리, 비 온 뒤오전 6:33 · 비 온 뒤 市标

이른 아침, 비가 막 지나간 뒤였다. 도로가 젖어 있었고, 하늘은 낮고 흐렸다. 市标 한가운데 새로운 룡 조형물이 서 있었다. 룡정(龙井) — 룡의 우물. 도시 이름이 담긴 상징. 어릴 때는 이 조형물이 엄청 커보였었는데.


2023년 8월 30일 오전 11:27 — 영화관

오전 11:27 · 룡정영화관오전 11:27 · 룡정영화관

룡정영화관(龙井电影院). 지금은 많이 낡았다.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어린 시절, 이 앞을 지날 때면 무언가 특별한 날 오는 곳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영화보러는 학교에서 강제로 나누어주는 영화표를 사용하려고 온것외에는 온 기억이 없다. 대신 초중, 고중, 두번의 12.9 무대를 친구들과 함께 여기에서. 市标만큼이나 나에겐 참 특별한 상징적인 곳.


2023년 9월 13일 오전 7:11 — 상가 건물

오전 7:11 · 층마다 간판이 빼곡한 상가 건물오전 7:11 · 층마다 간판이 빼곡한 상가 건물

룡정시의 网红墙인가? 한국어와 중국어가 층마다 번갈아 가며 붙어 있었다. 중경훠궈, 당구장, 가로수커피, 노래방, 양꼬치. 익숙하면서도 낯선 조합이었다. 연변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2023년 9월 15일 오전 10:19 — 운동대회

오전 10:19 · 학교 운동회오전 10:19 · 룡정중학 운동대회

우연하게 운동회 날에 룡정중학을 지나쳤다. 아이들이 빨간 유니폼을 입고 트랙을 뛰고 있었고, 빨간 천막 아래 팀이 모여 응원하고 있었다. 이런 광경과 상황들이 아마 고향으로 돌아오게 만들고, 돌아가서 가끔씩 되새기면서 즐기는 그런 이유인거 같다. 아이를 데려온 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3년 10월 5일 오후 7:35 — 마지막 밤

오후 7:35 · 해란상업가 야경오후 7:35 · 步行街

해란상업가(海兰商业街).  황금빛 조명이 양쪽 건물을 환하게 물들이고, 무궁화 문양이 그려진 표지판이 입구에 서 있었다. 룡정에 이런 거리가 생겼구나. 낮에는 몰랐는데 밤에 보니 꽤 화려했다. (步行街라고 들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시점에는 없어진. )

이 도시를 마지막으로 걷던 밤이었다. 불빛 속을 걸으면서, 이번에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빛이, 이 거리가, 내가 어릴 때 살던 곳이라는 것을.

고향은 늘 조금 낯설고, 조금 익숙하다. 바뀐 것들은 놀랍고, 그대로인 것들은 이상하게 반갑다. 그래도 아직 맞아주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나는 또 돌아갈 것이다. 아이가 더 자라서 더 많은것을 인지하고 느낄수 있을때, 함께 다시 오고 싶다.


* 글은 나의 사진첩속 일부를 꺼내서 기록한 것. 기회가 되면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도 다녔던 곳들을 아이의 시점에서도 한번 작성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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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범이

UX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느끼는 생각과 경험을 글로 적습니다. 때로는 주제를 벗어나는 글을 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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