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어떤 색이 다른 색을 삼킬것만 같았다.


나는 색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노란색. 

노란색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고, 초록색이 많은 길을 걸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푸른 하늘과 붉은 노을을 오래 바라보는 것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색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책을 읽다가 문득 멈췄다.

‘나는 색 물감을 살 때, 그 이름만 보고 산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그랬다. 

 인디언 옐로우는 햇빛이 오래 머문 부엌 같았고, 셀라돈 그린은 오래된 도자기에서만 느껴지는 고요함을 품고 있었다. 페르시안 레드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도시의 골목을 떠올리게 했다.

색은 눈으로 먼저 들어왔지만,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늘 그 이름이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늘 그랬다. 

불꽃놀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여름 밤’이라는 말을 더 사랑했다. 산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좋아한 것은 운동이 아니라 ‘저녁 공기’라는 단어가 가진 감촉이었다. 노란 조명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유도 밝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불빛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따뜻함이 있었기때문이다. 

내가 좋아한 것은 언제나 사물보다 그 사물을 둘러싼 언어였다.

색은 언어를 부르고 언어는 장면을 만들고 장면은 감정을 폭발시킨다. 

그래서 단어 하나를 만나면 그 뒤를 따라 수많은 풍경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한다. 단어는 설명이 아니라 초대장이었다. 아직 경험하지 않은 계절을 먼저 보여주고,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을 미리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단어 하나가 시간과 냄새와 떨림과 온도까지 함께 데려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색은 하나의 빛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였다.

그래서 나는 예쁜 색을 보면 그 색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색을 좀 느끼고 싶었다. 

같은 노란색이어도 레몬 옐로우와 버터 옐로우가 전혀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같은 초록이라도 셀라돈과 포레스트 그린이 서로 다른 계절을 건네는 것처럼.

그러네…

영화를 좋아한 것도 이야기 때문이었고, 산책을 좋아한 것도 풍경이 들려주는 침묵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순간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기억을 붙잡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글을 쓰는 이유 역시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름 붙이지 못했던 마음을 단어 하나에 조용히 기대어 놓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색도 좋아하고 색이 품고 있는 언어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색은 내게 하나의 명사가 아니었다. 하나의 계절이었고, 하나의 기억이었고, 책속에서 말했듯이 아직 살아보지 못한 미래였다.

끌리는 색을 보면 단어를 생각하기 시작하고 적당한 색의 이름을 갖다붙이고 나면 괜히 마음이 설렌다.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내 머릿속에 이미 또 하나의 세계가 시작되고 있으니까.

이 글을 공유하기: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