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책처럼, 좋아하는 영화는 대개 여러 번 보게 되어 있다. 삼십 대가 되니 좋아했던 영화들이 좀 씩 바뀌긴 해도 여전히 좋아하고 시간 나면 초콜릿 꺼내 먹듯이 돌려보는 영화들이 있다. 손꼽아 보라고 하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비포 선라이즈>,<东邪西毒>같은 것들이다. 그 외에도 <重庆森林>,<花样年华>,<시카고>,<如果爱>등 많지만 Top3는 불변할 것 같다.
요즘 세계를 뒤흔든 건 코로나 뿐만 아니었으니 거기에는 봉준호 감독도 있었다. 봉준호 장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거작을 만들어낸 영화가 바로 <기생충>이다. 이 영화는 나에게 한마디로 요약을 해보자면 첨엔 웃다가, 웃으면서 울다가 나중에는 울게 되는 영화였다. 그래서 좋아는 하지만 두 번 보기 겁이 나는 영화다. 처음 볼 때는 멋모르고 웃을 수 있지만 다시 볼 때는 차마 웃을 수가 없다. 나중에 펼쳐질 그 묵직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건 장치와도 같아서, <기생충>을 보기 전의 나와 본 후의 나가 있듯이,한번 터뜨리면 되돌아갈 수 없는 폭탄 같은 것이라고 할까.
내가 <기생충>을 본건 작년 어느 토요일이었다. 딸아이는 깬지 한참 됐는데 주말에 늦잠을 자는 남편한테 잔소리를 좀 했더니 티켓을 끊어주며 영화 보러 다녀오라고 했다. 그러니까… 잔소리는 해야 하는걸로? 암튼 남편 덕에 오전 9시에 혼자 기대에 부풀어 영화관으로 갔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기생충>이 세계의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이유가 있었다. 인간의 빈부격차에 관한 이야기었으니 말이다. 인종에 상관없이, 인간들이 모여살면 존재할 법한 기득권과 밑바닥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거기에 봉준호스러운 반전과 블랙 유머에 삶의 묵짐함까지 섞였으니 상을 싹쓸이 한건 이례적이었지만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기생충>은 처음에 코미디인 듯 반지하에 사는 일가족이 사기 치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나는 치밀하고 철저한 그들의 준비에 마냥 감탄을 하면서 영화에 점점 빨려들어간다. 그러다가 그 코미디는 비 오는 어느 저녁, 문득 불안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장르가 바뀌고 모든 것이 악몽처럼 꼬이고 바뀐다. 그 벨 소리를 계기로 앞의 전개의 모든 반전이 무색해지고 관객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럴 수가! 봉감독의 묵직한 한방이다. 맞고 나면 뒤통수가 뗑해진다. 봉감독이 인터뷰를 할 때 이야기를 모르고 봐야 재미있다고 했던 게 그런 이유가…뒤통수 치려고…
봉감독의 시선으로 본 <기생충>속의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그리고 계급이 있었다. 그 선이 수평으로 되어있다면 그 선 위에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 선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 두 세상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공간이었지만 평행이론에나 존재하는 두 세상처럼 만날 일이 없다. 친구덕에 어떨결에 과외 선생님으로 면접보러 가는 기택이는 그 집을 찾아 하염없이 위로 올라가야 한다. 자본주의 큰 틀 아래 서비스를 주고받는 관계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선 어디쯤인가에서 그렇게 서로를 만나게 된다. 김기사로, 아줌마로, 과외 선생님으로…
영화에서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은 선을 넘는 사람이 제일 싫다고 여러 번 말한다. 그가 김기사에 대한 평가는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절대 넘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결국 박사장은 김기사 손에 죽고 만다. 김기사가 박사장을 죽인 건 결코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다. 우연하게 폭우가 왔고, 우연하게 박사장 아들 생일이었고, 김기사의 딸 기정이가 칼에 찔린 순간에도 김기사는 그냥 자식걱정 뿐이었다. 그러다가 차 키를 던지라는 박사장의 외침에 고개를 들어보니 코를 찌르는 냄새를 못 참겠다는 듯한 박사장의 숨길수 없는 표정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순간, 김기사는 느꼈다. 그들한테 자기들은 눈 앞에서 피 흘리면서 죽어가도, 같은 인간이기보다는 그냥 피하고 싶은 냄새였음을. 사기는 그럴듯하게 쳐도 결코 숨길수 없는 그 냄새였음을. 그런 "이질감"때문에 김기사는 옆에 보이는 칼로 박사장을 찌르고 만다. 반지하에 숨어서 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는 말한다. 그날 발생한 일이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고, 박사장한테는 정말 미안하다고.
"이질감"이 무엇이길래? 장난감에 불과한 박사장 아들의 미제 텐트는 폭우가 와도 끄떡없지만, 김기사네 반지하 집은 폭우에 작살이 나고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난민 신세가 된다. 갑작스레 온 폭우는 박사장 와이프에게는 덕분에 미세먼지가 없어져서 기분 좋은 비에 불과하지만, 반지하 어딘가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인 자연재해였다.그런 것 들이 숨길 수 없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같은 하늘 아래 달라도 너무 다른 그것이 이질감이었다.
김기사는 무엇을 원했을까? 가난하고 없는 신세지만 박사장 같은 사람들에게서 적어도 인간 대 인간으로 평등할 수 있는 인간의 마지막 존엄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걸 넘어서 나라고 평생 밑바닥에서 살라는 법은 없으니 나도 쨍하고 해 뜰 날이 있으면 위로 치솟고 솟아서 얻고 싶은 박 사장의 지위와 재산이었을까? 글쎄다.처음에는 인간의 마지막 존엄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문득 떠오른다. 박사장의 딸이 대학을 가면 정식으로 사귀자는 말을 할 거라는 아들 기택의 말을 들으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게 던진 김기사의 한마디 "그러면 이 집이 우리 집이 되는거야?"
서로 달라도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사는 그들은 서로를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알아간다. 김기사 눈에 사모님은 심플하고 착하다. 돈이 많아 그런지 꼬인 게 없다고 한다. 김기사 와이프는 자기도 이 집이 자기 집이고 이 재산이 다 자기 것이면 자기는 누구보다 더 착할 것이라고 한다. 사모님 눈에 김기사는 기우의 소개로 알게 된 기정의 소개로 왔으니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일군이다. 박사장 와이프는 과외비도 넉넉히 쳐주는 인심도 있지만 입 끝에 사람을 쉽게 못 믿는다는 말을 달고 산다. 웃기게도 그러면서 생각보다 아주 쉽게 속아넘어 간다. 심플한 게 맞긴 맞나 보다.
그렇다면 누가 기생충인가? 캠핑 간 틈을 타서 주인집에 기어들어온 김기사 일가족이 기생충인가? 아니면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는 박사장 일가족이 기생충인가? 어쩌면 서로의 눈에는 서로가 기생충일지도 모른다.
봉감독의 눈으로 본 그들과 저들은 각자 다른 세상에 살지만 공통점이 있긴 하다. 그들 모두 인간적이다. 그들이라고 딱히 우아하지도 않고 저들이라고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다. 그들 모두 내 가족은 끔찍이 챙긴다. 누구든 내가 저 입장이었으면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와 동기가 있다. 봉감독은 두 가족을 통하여 누가 기생인가를 변론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공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앤딩은 끝까지 절망적이다.기우가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저택을 사서, 반지하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그 "근본적인" 계획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는 걸 우리는 모두 잘 안다. 봉감독은 마지막까지 자비롭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는 봉준호스러웠다.
후기:작년 6월에 보고 나서 뭔가라도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오늘에야 써본다. 괴물 감독의 거작앞에서 어떤 평도 무색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들긴 하지만, 역사적인 수상기록을 남긴 영화를 나도 봤고, 웃었고 울었고 함을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몇자 적어본다.
저도 작년에 우연히 퇴근하고 집에서 맥주한캔이랑 즐기면서 보다가 ,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에 영화가 끝나서도 그 후유증이 오래 간 작품이었습니다. 당연, 올해 오스카상을 휩쓸리라곤 생각도 못했지만,그 또한 영화처럼 후유증이 며칠 간 사라지지 않는 건 사실입니다. 어쩌면 공생에 관한 계층과 사회풍자적 소소한 이야기를 이렇게. 세계 모든 사람, 모든계급, 모든 가족이 공감할만하게 딱히 선과 악을 구분않고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게 만들엇을가 쭈앙님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봉감독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몇년전 살인의 추억도 매 필름이 전달하는 의미에 빠져 여러번 돌려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쭈앙님 말처럼 끝가지 절망적인 마지막 앤딩에서 영화지만 또 현실적인 리얼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花样年华 重庆森林에 빠져 OST도 따라부르고 했는뎅 ㅋㅋㅋㅋ쭈앙님 영화리뷰 항상 잘 보고 있고 생각도 비슷한거 같아서 글 읽는 향수가 적잖습니다. 그리고 갯아웃에도 댓글 달앗으니 시간되시면 읽어주세용~ 잘 보고 갑니다^^
요즘은 여니님 평 읽는 재미에 우리나무 자주 들리는 것 같습니다~ ㅋ 감사합니다~ 좋아했던 영화들이 비슷했군요~ 갯 아웃 평도 잘 읽었고 답했습니다^^ 좋아하는 영화들 평을 다 써보고 싶긴 한데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