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고장 난 핸드폰을 고쳐주다가 우연하게 아버지가 삼촌한테 보낸 문자 내용을 보게 되였다.
“천국에 가서 부디 잘 지내라! 아버지 어머니한테도 너무 보고 싶어서 먼저 왔다고 잘 말씀드려라! 네가 너무 일찍 가서 너를 보고 참 놀라우실거다!” 젊은 동생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그 아쉬움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아버지의 삼촌을 향한 작별인사였다.
철저한 무신론자 형제였던 아버지와 삼촌, 천국을 얘기하는 이 작별인사는 마치 귀속말과 같은 작별인사였다. 무신론을 신앙하는 공산당원이였던 삼촌이였기에 더우기 귀속말이여야 했다.
정말 삼촌은 천국으로 가셨을가? 남은 자에게나 떠난자에게나 가장 큰 위안이 되는 천국, 그는 과연 거기에 가셨을가?
“누나, 난 이제 천국이 있다는걸 믿을려고…” 눈물을 한껏 머금은 사촌동생의 표정에는 애처로움이 가득했다. 아마 이런 믿음만이 그의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위로해주리라…
삼촌은 8년동안 암투병을 하셨다. 초기 암진단을 받은 투병 초기에 어느 한번 수술중에 위험 고비가 왔었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혼미하신 삼촌한테 천국이 있다고 복음을 전한적이 있었다. 체신이고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이 없었고 오직 삼촌한테는 복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당장은 아닐지라도 천국이라는 존재자체가 위로를 줄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복음에 대해서 말했다.
과연 그때 삼촌은 복음을 받아들이셨을가? 그때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마치 죽음을 앞둔 삼촌한테 천국이 있으니 목숨을 포기해도 된다는 얘기로 들려서 섭섭했던것은 아닐가? 아님 그냥 부질없는 일을 하는 어리석은 조카라고나 생각을 하셨을가? 나는 알수가 없었다. 삼촌은 깨여난후에도 나한테 아무말도 하지 않으셨다. 삼촌과 나는 사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결코 아니였던것이다. 아니,사실 아주 아주 불편한 관계였다.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삼촌의 이마가 정말 아버지를 닮았다는데서 나는 끈끈한 혈연의 정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나와 삼촌사이에는 누구도 모르는 큰 골짜기가 있었다.
성격이 유난히 불과 같았던 삼촌, 나의 미운 일곱살의 어느날 저녁때, 무엇인가 알수 없는 잘못을 지른 나, 엄마와 아버지는 그날 안계셨고 많이 찡찡거리며 울보였던 나는 그 젊은 삼촌한테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채 죽게 두들겨 맞았다. 나는 그 두려움과 분노를 고스란히 안고 살고 있었고 그후부터 나는 삼촌의 얼굴이 참 싫었고 항상 멀찌감치 피해 있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함께 지내왔던것 같다. 정말로 피하고 싶은 명절과 피하고 싶은 삼촌과 사촌동생, 하지만 마음이 나약했고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나는 그런 상황을 처리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삼촌에게는 재미있는것 유희가 많았지만 삼촌이 데리고 노는 유희는 그의 아들이 참 잘하는것이였다. 그의 얄밉게 총명한 아들은 항상 이겼고 그럴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나한테 실망을 하면 어쩔가하는 걱정을 하며 아버지 눈치를 살폈고 아버지한테 미안해했다. 나는 80년대 산아제한 정책하에서 아들을 낳을려고 거액의 벌금을 해가며 낳은 둘째 딸, 맏아들이였던 아버지한테는 크나큰 유감이였고 친척들은 나를 보며 아버지의 신세를 아쉬워하며 혀를 끌끌 차군했다.
잘못된 출생에 대한 자책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생과 사에 대해 그리고 이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에 대해 그리고 우주에 대해 그토록 집요한 고민을 하기 좋아했던 나였다. 그런 나에 대한 신의 연민이였을가… 어린시절 우연하게 들린 교회당에서 눈을 감고 잠간 기도하는 흉내를 내는 순간 나는 어두움중에서 빛을 발하는 금빛의 십자가를 보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또 다시 눈을 떳다 감았을때 나는 또 한번 찬연한 빛을 뿌리는 금빛의 십자가를 보았다. 어린시절의 이런 경험때문이였을가. 기독교의 신앙은 나한테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였다. 물론 학교에서 배워주는 진화론이나 무신론이 나를 무척 헷갈리게 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내 인식중에서 가려내는 작업을 꽤 흥미롭게 진행했고 기독교에 대한 믿음은 신이 창조한 세상을 향한 탐색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가문에서는 나의 기독교 신앙은 약자들의 종교라는것을 더 확인을 하는 계기로 되였다. 총명한 사촌동생은 절때로 믿지 않았던것이다.
삼촌이 암말기로 진단을 받으면서 모든 항암치료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쌀쌀한 바람이 부는 을씨년스러운 가을날 다시 한번 복음을 전하려고 금방 낳은 둘째 딸을 둘쳐업고 큰 딸의 손목을 잡고 꽤 수고스런 걸음으로 삼촌이 계신 병원을 방문했다.
삼촌은 사촌동생이 미국에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는 아들이 맡은 "NASA"의 어느 프로젝트를 설명하며 문병 온 아버지와 나한테 힘겨운 기침을 섞어가면서 자랑을 하고 계셨다. 삼촌을 향한 위로였을가? 삼촌을 기쁘게 하려는 맏형의 심산이였을가? 아버지는 항상 그러셨듯이 나의 감정을 무자비하게 짓밟으시며 나의 딸 앞에서 나를 까내리고 있었다.
“너는 아들 하나를 참 잘 두었으니 유감이 없구나… 나를 봐라! 저 애는 딸 둘을 줄줄이 낳고 이젠 취직준비도 못하고 지금 아무것도 못하고 있지 않니? 여자는 공부를 해도 참…" 아버지가 나를 넌짓이 보면서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복음을 전할 힘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육아에 지쳐가며 내 앞날과 내 직업에 대한 불안감으로 모대기는 힘겨운 나날들이였는데…네가 바로 그 아들이 아닌 딸이여서 그렇다는 식의 아버지의 힘있는 해석이였고 두 아이를 키우는 수고를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상태로 해석하고 있었다. 나는 분노에 휩싸인 자신을 힘껏 누르며 겉인사 치례만 전하고 귤 하나를 발라서 삼촌의 머리맡에 두고 결연히 거기를 빠져나왔다.
삼촌이 내내 임종을 헤매일동안, 천국이 있다는 나의 믿음에 대해서,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그의 믿음에 대해서 더는 아무말도 꺼내지 않았다. 삼촌은 눈을 잠간 감았다가 그 눈을 영영 뜨지 못할것 같은 그 두려움으로 진통제를 거부한채 그 숨막히는 고통을 감당하며 생명을 지탱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삼촌의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두려움이 유독 컸던 나였기때문이다.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부터였을가? 아버지가 금방 태여난 내가 딸이라는것을 알고 맥없이 침대위에 놓고 나가더라는 엄마의 푸념을 들으면서 일상화된 나의 죽음에 대한 사고였을가 아니면 일곱살때 삼촌의 무정한 귀쌈에 눈앞이 까매지며 정신이 까무러칠듯했던 그때였을가? 그 두려움과 공포, 그 암흑속의 절망적인 모지름…나는 그게 죽음이라는것을 순간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촌은 세상을 뜨셨다. 춥디 추운 겨울날이였다. 집의 문패번호와 삼촌의 세상 뜨신 날자가 같은 숫자로 겹쳐지면서 고모는 어느 무당이 집이 흉가여서 주인이 제명을 못산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고 나도 저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삼촌이 돌아가신 며칠후 나는 꿈속에서 삼촌이 휘몰아치는 폭풍우속에서 하늘로 드디어 떠올리는것을 보았고 누군가가 “오직 은혜!”를 외치고 있었다.
정말 삼촌은 천국으로 가셨을가?내 마음속의 바램이 꿈으로 나타난것일가, 아니면 신의 연민이 삼촌에게 정말로 임한것일가… 나는 아직도 알수가 없다.
후기:
이 글은 “나”와 사이가 정말로 껄끄러웠던 삼촌을 향한 용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끊임없이 용서하려고 몸부림치는 “나”는 끝끝내 삼촌이 돌아갈때까지 용서하기를 실패한듯 합니다. 하지만 “나”의 바램과 신의 연민은 이것을 완성하려는 진행형에 있는게 아닐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아…읽으면서 솟아오르는 분노를 여러번 느꼈는데 소설이라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우리 같은 세대인것 같은데 그때 둘째나면 벌금 했나? 조선족은 벌금이 없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84년 도문에서 태어났는데 저의 엄마가 돈을 냈다고 저한테 알려주셨습니다…
삶의 모순성에 모대기는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는 글이었습니다
랜덤글로 처음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이 듭니다. 화해나 용서가 어려운 것은, 말을 꺼냈을 때 상대방은 그걸 잘못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가봐, 아예 마음을 접게 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