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하나를 또 깨뜨렸다. 몸도 맘도 별일없이 평온했는데 어쩌다보니 깨뜨리게 되였다. 좀은 오래전에 산 그릇 세트중의 하나였다. 밥공기 5개, 국그릇 5개, 접시 5개중에서 이제 국그릇 한개와 접시 3개만 남아버렸다. 이렇게 많이 깨뜨리며 살았어? 어디 이뿐인가? 여태 깨온 그릇들을 순간적으로 떠올려보며 자신을 향해 갸우뚱해진다. 이렇게 헤덤벼치며 살았던가? 참 많은 그릇들과 만나고 갈라졌구나 하고 생각한다. 어떤 그릇들은 아까웠고 어떤 그릇들은 버리기에는 머뭇거렸는데 잘 깨졌구나 하는 감정마저도 들었던 것같다. 다시 그릇가계를 돌아보는 일은 무척 행복했고 마음에 꼭 드는 그릇을 사고 돌아올 때면 괜히 설레이기도 했다.

어찌 쉬이 깨지는 것이 이뿐이겠는가. 나 역시 언제나 깨여지며 살아왔다. 말랑말랑하고 깨끗했던 피부는 주름지고 거칠어지고 이런저런 상처로 허물이 생겼다. 열정과 기쁨으로 싱싱했던 가슴은 힘들고 지치고 좌절하며 앓는다. 높고 빛남을 지향했던 정신 역시 얼마나 자주 마사지는가. 더는 순수하고 아름답지 않다. 어지럽혀지고 찢어져 너덜거린다. 자의로 깨버렸거나 타의에 의해 깨여졌을 것이다. 나는 그 끔찍한 모습들을 마주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닌척 하며 환상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여태 내 ‘밥통’ 하나만은 감히 깨버리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정성을 들여 세심하게 돌보며 비굴할만큼 받들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지금도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고 내 아이도 키웠을가? 세상은 내게 다른 밥그릇 하나 쉬이 내주지 않으리라 믿었을가? 아니 그보다는 치열한 경쟁의 세상에서 밥그릇 하나 챙기기에는 내가 부족했음을 더 믿었을 것이다.

깨지 말아야 할 것도 있고 깨고 싶지 않은 것도 있기 마련이다.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과 사소하고 시시한 일들이 때론 그러하다. 어떤 인습적인 사고와 가치안에서 안전함과 평화를 느끼며 그것을 지키고저 악을 써왔다. 새로 맞닥뜨리게 될 세상에 불안해서 이미 가진 확실함과 익숙함에 길들고 싶어했다. 어느 순간 일상에 작은 금이 가거나 깨여지면 안정되지 못한채 고통스러워했다. 참아내고 있다는 지루함이 나더러 살아가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평화로움이 깃든 표정에는 기실 평화가 없었을 것이다. 하찮은 안녕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지키려고 하는 것이 되려 나를 가두고 겁주고 울리고 파괴하는 경우도 수시로 있었다. 그 때면 내가 담긴 이 그릇을 깨버려야 한다고 여겼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그 마음은 언제나 모순되고 무참했다.

날마다 내가 하는 짓들이 나를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는 것을 몰랐거나 알면서도 무심했거나 모르려고 했을 것이다. 한줌의 재물, 시시한 시비, 나른한 잠, 막막한 걸음, 비굴한 웃음, 거짓된 눈물, 눈앞의 리익… 그 안에서 나는 더 작아지고 무기력해지고 비겁해졌다. 자기의 그림자에 숨어들었다. 제 숨결만 목구멍으로 다시 불어넣
었다. 내 시야는 막히고 팔다리는 움츠러들고 가슴은 짓눌렸다. 나는 나를 담그는 그릇을  깨야 했다. 내 속에서 울부짖는 갈망을 들어주고 열망의 숨결을 소나기로 뿜어내여 나를 시원히 씻어내야 했다. 가슴에 출렁이는 바다도 들여야 하고 찬란한 태양도 걸고 자유롭게 내달리는 짐승의 근육질의 기운과 환희를 느껴야 했다. 그렇게 나
개인이 되여야 했다.

마음의 그릇이든 우리가 살아가야 할 무대든 더 넓고 커야 한다. 공간의 크기가 삶의 크기는 아니며 공간의 크기가 사유의 크기는 아님을 알지만 가끔 그 크기가 우리의 몸을 결박하고 우리의 사유나  상상의  날개를 부러뜨리기도 한다. 깨뜨리지 않고 믿고 안주한다고 그 그릇이 나를 안아 지켜주고 보듬어 키워주기만 하지는 않는다. 돌담을 쌓듯이 울타리를 만들어 내 것을 만든다고 여긴 것은 내 오산일지도 모른다. 기실 내가 그 안의 것들에 속해버리고 그것들에 좌우지될 뿐이다. 내 육신과 내 정신을 거느리고 밖을 기웃거리고 뛰쳐나가고 탐험해야 했다. 나를 둘러친 경계를 허물 때 나를 더 멀리 바라볼 수 있고 새로운 길의 시작이 있고 새로운 하늘아래의 내 몸짓이 생겨날 것이다. 새가 알을 깨야 날개를 펼치고 푸른 하늘을 자유롭고 힘차게 날아예듯이 예술가들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인습적인 주제와 형식을 벗어날 때 그 자리에서 신선하고 아름다운 창조가 가능했을 것이다. 누군들 자기 삶의 의미나 가치를 창조해내는 예술가가 아닐가. 어떤 론리는 어떤 질서는 어떤 한계는 어떤 안정은 어떤 규칙은 어떤 환상은 깨져야 했다.

지금의 나 역시 고유의 나는 아니다. 그릇을 깨뜨리며 살듯 깨여지며 또 깨뜨리며 살아왔다. 깨여진 그릇은 더 좋고 이쁜 그릇으로 바뀌여갔지만 나는 깨여진 자리마다에서 리상적인 내가 되지 못했다. 덧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막상 깨고 깨져도 기막히거나 굉장한 뭐가 없을 수도 있다. 조금 다른 내가 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릇을 깨고 다시 사들이고 그 그릇들에 밥을 먹어 위장을 채우고 내 몸이 변해가듯이  깨여진 내 가슴과 정신은 그 자리에서 조금씩 변했을가? 어느만큼으로 변했을가? 어디까지 가고 싶었을가?

인간은 제 몸 다해 지켜내고 있는 것이 있는가하면 제 몸 다해 깨뜨리는 것이 있다. 또 제 몸 다해도 결코 깨뜨릴 수 없으면서도 부딪치는 것이 있고 제 몸 다해 새로 세우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지켜가는 것, 깨뜨리는 것, 깨뜨릴 수 없는 것, 새로 세우는 것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깨여지는 것이다. 결국 수없이 깨지기 위해 열정을 다하는 것이다. 그게 자연의 법칙일가?순수하고 도덕적인 세상을,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세상을 창조하려는 것은 돈키호테적 천진한 환상이며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일가? 인간은 이미 그것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하고 깨닫고 받아들이기를 반복하면서 짐짓 모르는 것처럼 언제나 죽어라고 뜨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된 자의 소임이고 용기이고 행복인가 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차례로 깨여지고 그 안에 담긴 인간이며 자연이 깨여진다.그  자리에서 새로이 꽃은 피고 강은 흐르고 동물들은 서식한다. 그것과 더불어 인간도 새로이 태여나고 성장하고 또다른 세상을 구축한다. 영원불변하는 것은 없다. 그게 이 세상의 흐름이다. 그 흐름은 아무도 거스르지 말아야 하며 또 거스를 수 없다.

세상은 깨여져야 하고 깨뜨려야 하는 것과 깨지지 말아야 하고 지켜내야 하는 것들이 공존한다. 이 몸에도 공존한다. 그 세상 속을 이 몸으로 흔들리고 뒤척이며 살아있다. 그게 삶이다. 무수한 깨여짐에 의해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어서 또 무수히 깨뜨리게될 것이다.

죽음은 최종의 깨여짐이다. 육체나 정신이나 령혼이, 언어나 체온이나 행동이, 속도나 넓이나 깊이가 깨여진다. 부서져 무가 된다. 원래 없었던 한 인간이 잠시 세상에 존재하다가 다시 없어지는 것이다. 수많은 인간은 세상에 여운을 남기기 어렵다. 흔적도 없는 개끗한 사라짐이다. 시간의 먼지는 그 없음마저도 덮어버린다. 그 완벽한 깨여짐은 고요하고 서늘하며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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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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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화가들의 작업실을 보면 보통 천장이 높은 구조를 선호합니다. 그만큼 물리적 공간이 실제로 창작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죠. 제한된 생활 영역 속에서 사유의 확장을 시도한다는 것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무수한 투명한 벽들과의 싸움이죠. 깨질 수 있는 것과 깨질 수 없는 것은 상호의존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뭔가 그릇된 것이 있어야 깨지는 것도 가능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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