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원의 노트
꽃사슴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게 편집교정일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무척 재미 있고 흥미로운 게 이 직종입니다.
원고를 보다 보면 가끔 가다 말도 안되는 표현에 어처구니없어 입을 벌린 채 눈만 끔벅끔벅할 때도 있지만 웃기고 재미 있어서 끅끅거릴 때도 많습니다.
이 큰 비밀(!)을 저만 혼자 알고 있기 아까워서 조금씩 공유할가 합니다.
용례는 원고 편집교정, 완제품 품질검사, 일상적인 독서 과정에 발견한 오유들중에서 가려뽑았습니다.
잘가라—동생아 니가 형님의 절을 받고 싶어서
'형님'은 '나'를 가리킵니다. 화자인 '내'가 본인을 '형님'이라고 높여 이르는 것은 적절치 않아보입니다.^^
'니'는 '너'의 방언입니다. 시어의 방언적 특색을 강조하고 싶다면 '니'를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표준어 '너'를 쓰는 게 바람직해 보입니다.
고침: 잘가라—네가 형의 절을 받고 싶어서
마지막 남은 찐빵 한쪼각을 입안에 털어넣고
찐빵쪼각에 묻은 먼지 따위를 털어서 입안에 넣는다는 뜻인가요?
고침: 마지막 남은 찐빵 한쪼각을 입에 집어넣고
실제로 '간만'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지만 표준어로서의 지위는 아직 갖추지 못했습니다. '간만에', '간만이다' 대신 '오래간만에/오랜만에', '오래간만이다/오랜만이다'를 쓰는 게 정확하다고 봅니다.
두 불청객 두 사람(둘인 건 확실히 알겠습니다. ㅎㅎ)
고침: 두 불청객/불청객 두 사람
한국 규범을 따르면 '냄비', 중국조선어규범을 따르면 '남비'입니다.
두볼을 타고 눈물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원고를 처음 볼 때  어떤 생리적 현상을 묘사한 것인지 전혀 리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줄기 눈물이 량다리를 걸친 줄 알았습니다.
보통 눈물이 두눈에서 동시에 분비되여 두줄기가 되여 흘러내리지 어떻게 한줄기만 흘러나오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곱씹어 분석해보니 눈물이 한쪽 눈에서만 흐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다음에는 한줄기가 어떻게 두볼을 적시며 흐르냐에 꽂혀서 옴짝달싹 못하다가 이렇게 그림을 그려보니 이것 또한 가능하네요.
'한줄기'를 빼버리고 "두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고 고친 데 대해 심심히 사과드립니다.
나는 한짝 눈에서 흐르는 한줄기 눈물로도 두볼을 적실 수 있단 말이에용, 냐옹~!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떤 빈집에 남몰래 숨어들어 살고 있다가 집문서를 발견합니다. 그 집문서에 적혀있는 면적을 보니 '실제'보다 더 컸다는 내용인데요, '실제'가 뭘 뜻하는가에 방점이 찍힙니다.
자로 정확하게 측량해보지 않은 이상 확실한 정보를 뜻하는 '실제 (면적)'라는 단어 사용은 썩 적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모호하게 '짐작했던 것보다', '어림짐작보다', '보기보다'를 쓰는 게 훨씬 무난해보입니다.
인민의 마음속에서 우러러나오는 소리
자주 틀리는 단어입니다.
'우러러보'는 것이지 '우러러나오'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우러러보'게 되지 말입니다.
고침: 인민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
우러러보다, 우러러보이다(맞음)
우러나다, 우러나오다(맞음)
우러러나오다(틀림)
중국조선어 표기는 '외곡', 한국어 표기는 '왜곡'입니다.
정치사업의 위신을 세우려면 우선 먼저 솔선수범해야 하고
아무리 '앞서서'의 뜻을 강조하고 싶어도 '우선'과 '먼저'중 하나만 쓰는 게 좋겠지요?
이 경우에는 다다익선이 아니라 과유불급입니다. ^^*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보다'가 능동에서 갑자기 피동으로 바뀌였네요. 변덕 부리지 말고 능동사로 가만있어욧~!
고침: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맑고 흐림은 하늘의 일상적인 날씨행위지만
'날씨'를 의인화해서 '행위'를 덧붙인 것 같은데요, 그보다는 '현상'이라는 말을 써서 '날씨현상'이라고 하는 게 더 좋아보입니다.
제사 때마다 기름떡을 굽었는데
정확한 활용형은 '구웠는데'입니다.
여기서는 '굽다'보다 '지지다', '부치다'를 쓰는 게 좋아보입니다.
기름떡을 부치다/지지다, 전을 부치다/지지다
고구마를 굽다, 밤을 굽다, 고기를 굽다
기름떡을 굽다(안 친한 사이)
밤을 굽다, 고기를 굽다(친한 사이)
기름떡을 부치다, 기름떡을 지지다(친한 사이)
모난 돌이 맞게 되여있다.
모난 돌이 뭘 맞는지요? 서리를/비를/눈을? 매를? 주사를?
고침: 모난 돌이 정 맞게 되여있다.
이 순간만큼은 남편의 일가견이 지구는 둥글다고 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정의만큼 위대하게 느껴졌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는 둥글다고 정의했던가요??

이렇게 고쳐야겠지요?
남편의 일가견이 지구는 둥글다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리론만큼 위대하게 느껴졌다.
남편의 일가견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 위대하게 느껴졌다.
한결같은 염려와 도움을 주고 계시는 부모님…
부모님이 자식에게 도움을 주시는 건 알겠는데 왜 굳이 '염려'까지 주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도 걱정거리가 없어보여서 "옛다, 이 념려 너 가져라!"(한국식 표기: 옜다, 이 염려 너 가져라!) 이렇게 주시는 건가요?
고침: 한결같이 염려해 주시고 (늘?) 도움을 주고 계시는 부모님…

***  ***  ***
저자와 독자 여러분께 편집실 편집원은 대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보여드리고 용례로부터 접근하여 바른 표현과 맞춤법은 바로 이것이다,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모두들 '말이 되는 말'을 많이 하시고 '글이 되는 글'을 많이 써내시길 바랍니다.

원문 주소: https://mp.weixin.qq.com/s/mDS3yMtXinKbP3fiwx9i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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