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우리 애들은 늦잠이라는거 자는 법이 없소,,,"
"너네 어릴때는 사춘기라는거 모르고 자랐다…"
여동생이랑 내가 비록 부모님 속을 안썩이고 알아서 잘 커줬지만, 엄마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바르지는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늦잠을 자는 법을 모르는게 아니라, 주말에도 이른 아침 7시부터 "어서 일어나서 밥 먹어야지" 하는 소리와 함께, 이불안에서 기지개 펼 사이도 없이, 아빠는 나와 동생의 이불을 전부 치우셨기에, 거기에 반항할줄 몰랐던 나와 동생이기에 어릴때 늦잠을 못 잤던거고…
엄마가 생각하는 반항하는 사춘기에 나는 생각이 엄청 많았고, 책보고 노트에 먼가 적고, 수학 같은거 왜 배우는지, 이 세상을 살아갈려면 여러가지 언어를 배우는것만이 길이다 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중학교 2학년때부터 갑자기 성적이 떨어지고 머리가 아파서 학교를 좀 쉬겠다고 했던거고…
그나마 모든걸 다 들어 주셨던 부모님들이 셨기에, 학교 다니기 싫으면 안가도 됐다는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한 일이다.
머리에 큰 꽃을 꼽고 80년대 우리 모두가 익숙한 포즈를 취한 엄마의 "착한 딸"—이건 엄마가 입혀준 한복에 달아준 꽃에 엄마를 위한 나의 룩이고…
이 사진이야말로 6-7세 나이에 소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걸 신경 쓴 나 자신의 모습이다.
머리는 꼭 살짝 옆으로 묶어야 하고 앞머리도 몇카락 남겨져야 하며, 목걸이는 내가 손수 만든 home-made 이고, 원피스 어깨는 핏이 서야 하며, 팔목에는 "부"의 상징인 금팔찌를 해야 했고, 빨간 스타킹의 하얀줄과 파란줄은 섰을때 두다리에 줄이 일치해야 한다. 스타킹 그 두줄에 신경을 엄청 썼던 기억이 난다. 걷다가 한쪽이 내려오면 무조건 서서 다시 올리고 줄 맞추고 했던것 같다.
어릴때 전혀 말썽을 일으키지 않은 "나" 였지만, 내면에는 은근 내가 원하는 모습이라것이 일찍 자리를 잡았고, 소소한 나쁜일들도 적지 않게 저질렀던것 같다.
사진에 나온 금팔찌부터 얘기를 해보자.
친가에서는 내가 말을 제일 잘 듣는 아이였기에, 너나 없이 이뻐했고, 특히 작은 삼촌은 금이야 옥이야 했다. 삼촌은 친딸이 있은 후에도 늘 딸한테 언니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해서, 사촌동생이 "나와 언니중에 아빠는 누가 더 이쁨까?" 하고 따질 정도였으니…
여섯살 정도였던것 같다.
삼촌은 장춘에 부대에 계셨다. 한번은 아빠가 삼촌 보러 가자고 나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어쩌다 연변을 떠나 기차를 타고 큰 시내에 가니 모든게 너무 신기하고 잼있고 맛있고,
그때 처음으로 cone icecream을 먹어봤는데, 5전짜리 삥골 먹던 시기라, 너무 너무 맛있었다.
하루는 아빠가 나를 데리고 큰 백화점에 갔다. 백화점 2층인가 금은 악세서리를 파는 곳이 있었다.
어릴때 멋따개였던 내가 그냥 지나칠리가 있으랴..,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직원이 다가와서 어린이 금팔찌가 너무 이쁜거 새로 들어왔다고 하면서 팔찌를 꺼내 보인다. 괜찮다고 하는데 막 팔에 끼워주면서… 아니 근데 그게 팔목에 사이즈가 딱 들어맞고 너무 맘에 들었다. 케이스도 기억에 새록새록 하다. 핑크에 금실로 된 꽃무늬였다.
아빠가 가격을 듣더니 지금은 필요없다고 하면서 가자고 하신다.
그렇게 백화점을 나섰는데 팔찌가 욕심나서 발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뒹굴면서 울어본 경험이 부족한 탓에 그렇게는 갑자기 연기를 못하겠고, 그냥 가지 않고 백화점 문앞에 서있었다. 아빠가 이젠 삼촌한테 가자고 해도 "여기 좀 있을래요" 하면서… 한참이 지나서야 아빠가 금팔찌 살려고 그러냐고, 그러니 머리를 끄덕끄덕… 사실 별로 기대를 안했다. 아이가 무슨 금이냐고…
허나, 아빠는 사주셨다! 그때 그 기쁨은 아마 지금 불가리 목걸이를 선물 받는다 해도 느끼지 못할 기쁨이었을 것이다. 실크로 된 핑크색 케이스에 소중히 들어있는 나의 팔찌. 드라마에서 본건 있어가지고 하루종일 팔찌를 하고 다니다가 자기전에는 베개밑에다 벗어 두었다. 그날 저녁 너무 흥분돼서 팔찌를 열번도 넘게 베개밑에 넣었다 꺼냈다 했었던것 같다. 그렇게 잠이 들었고, 이튿날 아빠는 얼른 나가자면서 서둘렀다. 아빠따라 삼촌한테 가서 밥먹고 갑자기 팔목이 휑해서 봤더니 앗차 나의 팔찌!
베개밑 나의 팔찌!
삼촌이랑 아빠랑 같이 부랴부랴 숙소에 가서 봤는데 없다. 청소 하는 아줌마한테 물어봐도 못봤다고 한다. 그럴리가, 분명히 베개 밑에 뒀고, 우리가 떠난후 숙소에 아직 다른 사람 안들었는데.
삼촌이, 이 방 청소 누가 했냐고 물었고, 이 숙소는 부대소속이고, 만약 팔찌를 우리 조카한테 돌려안주면 지금 당장 관리인 찾아서 말할꺼고 그러면 넌 이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될꺼라고.
그러니 그 아줌마가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의 팔찌를 돌려주셨다. 다시 나의 품으로 돌아온 귀한 팔찌… 그뒤로 아마 일년은 거의 매일 하고 다녔던 같다.
어릴때 내가 애지중지 했던 보물들이 많았는데 7살 어린 동생이 태어나면서 이런 보물들은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나의 보물들은 어디에, 나의 보물들은 무엇이였지 하면서 기억도 못하게 되었다. 어느순간부터 나의 금팔찌도 행방불명이 되었고 나도 그 존재자체를 잊고 살았다.
어릴때 사진을 보고 금팔찌가 보이니 팔찌 찾던 기억이 어제 일인듯 너무 생생히 떠오른다.
큰아버지네 집에는 나보다 열살 많은 오빠 한명과, 한살 이상인 오빠 이렇게 두명이 있었다.
형제가 있는 집안은 늘 전쟁터 이듯이, 큰아버지네 집 오빠네 둘도 자주 싸웠다.
한번은 큰아버지네 집에 놀러 갔는데 큰오빠는 어딘가 나가고, 작은오빠도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나만 엄마랑 큰어머니랑 같이 집에 있었다.
심심해서 이방 저방 구경하다가, 큰 오빠 방에 들어가보니 녹음기가 있었고, 궁금해서 눌러보니 카세트가 돌아가면서 노래가 나왔다. 이리 눌렀다 저리 눌렀다 빨리도 해봤다 느리게도 해봤다 하면서 너무 신나게 놀았다. 그렇게 놀다가 다시 play 버튼을 눌렀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테이프가 감겨들어간다. 너무 놀라서 stop하니 카세트테이프가 마구 감겨져 있다. 잡아 당기니 점점 더 풀리면서 완전 엉망 진창이 되어갔다. 감을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풀려가고, 엄마와 큰어머니는 거실에 계시고, 오빠네는 아직 집에 안돌아왔고, 혼자서 땀을 빠질빠질 흘리면서 이걸 어찌 수습하지… 시계를 보니 큰오빠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부랴부랴 카세트를 억지로 녹음기에 밀어넣고 뚜껑을 덮고 아무일 없듯이 거실에 나와서 엄마 옆에 붙어앉았다. 얼마나 두근거리는지 엄마와 큰어머니가 주고 받는 이야기는 일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한참 지나니 큰오빠와 작은오빠가 모두 돌아왔고, 사춘기였던 큰 오빠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5분도 안지나서 작은 오빠를 들어오라고 호령하였고, 그 뒤로는 내가 예상했던바와 같이 큰 전쟁이 벌어졌고, 작은 오빠는 울면서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큰오빠는 니가 아니면 누구냐고…더우기 한족학교를 다녔던 큰오빠가 중국말로 혼내니 엄청 무서웠다.
큰어머니는 엄마보고 " 아들 둘인 집은 일상이 전쟁이요…" 하셨고…
엄마 옆에 앚아 있는 나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것 같았다. 그날 저녁도 무슨 정신에 먹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40대가 된 오늘에야 비로소 50대가 된 큰오빠한테 그때 그 일을 사과 한다.
나의 외가에는 엄마랑 이모 자매가 둘뿐이라, 이모는 어릴때 나를 친딸처럼 아끼셨다.
그래서 가끔은 "이모는 왜 나를 이렇게 이뻐하시는가"라고 물으니, 이모는 "너라면 니동생이 낳은 딸이 이쁘지 않겠냐"고 하셨다. 몇십년이 지나서 동생이 딸을 낳으니 진짜 자기 딸 같고, 무엇이든 동생한테 해주는건 하나도 아깝지가 않다.
어릴때 외가집에는 대형 항아리가 있었고, 수돗물이 없어서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채워놓고 하루종일 사용했었다. 당연히 물을 긷는 일은 그 당시 시집을 가지 않은 이모 몫이고.
내가 세살적이라고 한다. 한번은 이모가 이른 아침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어서 겨우겨우 항아리를 다 채워놓고 잠깐 나갔다가 돌아와보니 내가 항아리옆에 까치발을 하고 서서, 나의 고무신을 항아리안에 동동 띄우면서 놀고 있었다고 한다. 머하냐고 물어보니 " 고무신이 더러워져서 씼고 있어요." 물 긷는 일이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였을텐데, 고무신을 씼고 있다고 하니 머라 하지도 못하고 그 항아리 물을 전부 퍼서 버리고 다시 길어왔다는 썰이…
초등학교 들어가기전 어느하루, 이모가 나한테 호피무늬 스웨터를 사준적이 있었다. 그 스웨터가 너무 맘에 들어서 어디가서 자랑하고 싶은데, 딱히 만날 사람도 없던 시기라, 나혼자 갈수 있었던 곳은 옆집 할머니네집. 옷을 차려입고 머리도 빗고 옆집에 갔다. 할머니가 청소중여서 지금 놀아줄 시간이 없다고 하시니, 괜찮다고 앉아 있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나는 한참을 앉아 있었고 할머니는 바닦을 닦고 계셨다. 여러번 말을 건넸는데 나의 호피무늬 스웨터를 눈치 못채셨다.
옷 자랑 하러 온것이 목적이었는데, 그걸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성취감이 없었고…
그래서 슬그머니 목뒤에 있는 스웨터지퍼를 살짝 내리웠다.
그리고 옆집 할머니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 할머니, 옷 지퍼 좀 올려주실수 있어요? 손이 안닿아서요…" 그제서야 할머니는 "그래그래" 하시면서 지퍼를 올려주시더니… " 이 옷 새옷이네… 이쁘다" 고 하셨다. "네에, 어제 이모가 새로 사주셨어요, 할머니 그럼 집으로 갈께요, 내일 또 놀러올께요, 잘 지내세요." 하고 깎듯이 인사를 하고 즐겁게 외가집으로 돌아간적이 있었다.
1987년 소중한 가족사진이다.
우리집에는 새 생명이 탄생했고, 아빠는 그 기념으로 카메라를 구매하셨고,
그래서 내 동생 어릴때 사진이 그나마 많았던 같다.
카메라 지지대도 있어서 그걸 setup 해놓고 가족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있다.
동생이랑 나이 차이가 있으니, 애기가 세살 좀 넘은후부터 엄마는 거의 방학에 동생을 나한테 맡기고 출근하셨다. 어릴때부터 집에 붙어 있지 않는 성격인지라 너무 나가 놀고 싶은데 애기는 돌봐야 하고, 그래서 늘 어린 동생을 옷을 입혀 가지고 같이 친구집에 갔다.
특히 겨울이면 옷을 한층한층 입히고 친구네 집가서 옷을 다시 벗기고 하는 일이 진짜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친구집에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 노고를 마다하고 동생을 데리고 친구집으로 늘 향했다.
엄마가 점심에는 동생을 재워야 한다고 하셔서 12시면 가마목에 이불을 펴놓고 같이 잤다.
근데 놀러 나갈 시간이 되었는데 애기가 일어날 생각이 없다. 아무리 흔들어 깨우고 해도 계속 자고 있음. 시간은 점점 지나가고 아이는 자고 있고… 에라 모르겠다…
동생을 누가 훔쳐 갈까바 문을 밖으로 꽁꽁 잠궈놓고 룰루랄라 친구네 집으로 고고고..
아주 신나게 몇시간 놀고 있었는데, 순간 갑자기 제정신이 들면서, 집에 두고 온 동생 생각이 났다.
애기가 죽었을까바 속은 덜컹하고, 눈물이 나고, 그래서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왔다.
멀리서부터 울음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려고 보니 너무 울어서 두눈이 팅팅 부은 동생이 문고리를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계속 울고 있었다.
너무 미안해서 들어가서 안아주고, 언니 미안해를 연발하면서, "엄마한테 절대 말하면 안돼 알았지!" 를 머리에 새기게끔 말해주었다.
다행히 애기였던 동생은 엄마한테 이 일을 말하지 않았고, 그뒤로 나도 동생을 집에 혼자두고 나가는 일이 없었다.
유난히 고기를 좋아했던 동생은 끼니마다 고기를 찾았다. 그러면 나는 된장국에 잘 풀리지 않은 된장을 가리키면서 "고기, 고기가 여기 있네, 얼른 먹어." 그러면 동생은 신이나서 집어 먹다가 또 잉잉잉 … "고기가 아니 잖아…"
동생이랑 유년시절을 참 신나게 보냈던것 같다.
지금 어른이 되어서 동생이 하는 얘기가 "나의 동년은 온통 언니였다." 라고…
동생이랑 즐거운 추억이 많았기에 아이는 꼭 둘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둘을 낳았고,
아빠가 사준 금팔찌 기억이 있었기에, 애들이 크게 바라지 않던 일도 혼신을 다하여 이루어주면 진짜 감격해 한다.
우리 아이들도 현재 사춘기를 겪으면서 말썽도 가끔은 부리고 매일매일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소싯적 "만행"들을 공유하고 싶지만, 아이들을 픽업 할 시간이라 오늘은 이만…
幸福的童年治愈一生,不幸的童年用一生去治愈
어릴때 받은 사랑은 성인이 되어서도 무궁무진한 힘을 지닌다고 한다. 내가 어릴때 나를 사랑해 주었던 모든 사람들한테 늘 감사하고, 나도 우리 아이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키울려고 노력하고 있다. 딸아이의 사춘기는 유난히 심하고, 대인관계를 너무 힘들어 하고 극 내성적이지만, 충분히 인내하고 기다려주면 언젠가는 상큼발랄한 아이로 거듭 날수 있을줄로 믿는다.
역시 제절로 코디한 두번째 룩이 곱네요 어린 보라님. 동생도 귀엽고,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네요.
평범함이 가장 행복한 일상인거 같슴다
소싯적 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저의 소싯적도 생각나고… 우린 언제 이렇게 빨리도 성인이 되어 있었을까요… 소싯적 일들이 아직도 어제와 같은데… 벌써 새끼들한테 소싯적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ㅜㅜ
애기 어릴때 하루하루를 아끼쇼… 우리가 성인이 된것도 그렇지만 우리 애들은 언제 벌써 저렇게 컸는지 몰겠어요…
추억 돋는 이야기들이군요 저번에 보고 기막힌 댓글이 생각나 달려고 했는데 비번 까먹어서 못 달고 . 오늘 다시 들어와 글을 읽네요 .
하하하 기막힌 댓글이 궁금함다… 항상 즐겁고, 잼있는 우리 몽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