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나, 가끔 나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 일들이 발생한다. 애써 다잡아 놓은 멘탈이 으스러질 것 같다든지, 어제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들이 오늘은 너무 크고 흉측한 것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런 찰나의 순간들을, 혹은 더 길어질 수 있는 무력의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나는 일상 곳곳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사소한 것들이, 종국엔 나를 잡아주기를 기대하면서. 그중 하나가 커피다.
살면서 처음 마신 커피는 레쓰비이다. 중학교 때 매일 점심 학교 매점에서 레쓰비를 사 마셨다. 하루 중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레쓰비는 캔 커피답게 단 맛밖에 없었는데, 에스프레소 맛을 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 정도 카페인도 충분했다. 레쓰비 한 캔이면 졸린 오후 수업도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었다. 하루의 낙이었다.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나서 난생처음 제대로 된 카페에 가봤다. 처음 가 본 카페는 핸즈커피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老客运站옆에 있었던 핸즈커피였다. 거기서 처음 카페모카를 마셨다. 쌉싸름한 맛의 에스프레소에 초콜릿 시럽이 섞이고 그 위에 달달한 휘핑크림이 섞이는 모카를 좋아했다. 핸즈커피에서 커피도 마시고 종종 시험공부도 했다. 거기 앉아있노라면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사를 들을 수 있었다. 결혼을 앞둔 커플이 결혼 준비 때문에 각 잡고 싸우는 걸 목격한 적이 있는데, 비록 날 선 목소리들 때문에 수학 공식 따위가 눈에 안 들어왔지만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그 커플은 결혼했을까? 아니면 거기서 끝났을까? 카페는 가끔 인간에 대한 쓸데없는 소소한 궁금증들이 생기는 곳이다.
핸즈커피, 카페 뉴욕, 망고식스, 카페베네, 카카오, 로띠번, 나쟈커피, 연길에 있었던 혹은 있는 카페들이다. 어떤 곳은 없어졌고 어떤 곳은 건재하다. 이와 더불어 이름마저 기억나지 않는 곳까지, 모두 나에게 커피에 대한 기억을 심어주기 시작했던 공간들이다. 어떤 맛의 커피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시절, 여윳돈으로 모카 한 잔을 마시면서 기분 좋아했던 순간들이 머물러있는 공간들이다. 커피가 익숙하지 않아 맛있다, 맛없다 정도로만 맛을 가늠했던 그때, 친구와 함께 이스터(依斯特影城)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근처 망고식스에 가서 영화 얘기를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커피앤시가렛 시청점작은 도시에 살면서 스타벅스를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스타벅스의 말차프라푸치노(抹茶星冰乐)를 너무 먹어보고 싶었다. 처음 가 본 스타벅스는 대련의 백화점 안에 있는 스타벅스였다. 공간은 멋있었지만, 말차 프라푸치노는 그렇게 맛있지 않았다. 그때는 내 손에 스타벅스 로고가 새겨진 컵이 들려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또 신기했던 것 같다. 스타벅스가 더 이상 신기하지 않아진 지금도 종종 스타벅스에 간다. 집 근처만 해도 스타벅스가 세 개나 있는데 누가 제조하든지 맛이 일정해서 좋다. 스타벅스의 맛 유지 비결은 강한 로스팅으로 원두의 탄 맛을 끌어올려 누가 제조하던지 맛을 일정하게 만든다고 했다. 근데 그 탄 맛 때문에 에스프레소 기반의 메뉴는 잘 마시지 않게 된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스타벅스는 콜드브루가 맛있다. 스타벅스에서 커피 제외 제일 애정하는 메뉴는 자몽허니블랙티이다. 클래식 시럽을 빼고 마시면 고급스러운 冰红茶맛이 나는데, 가끔 이런 걸 왜 이 돈 주고 먹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冰红茶를 쉽사리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위안 삼는다. 사실, 중국에 있을 때도 비슷한 메뉴인 冰摇柠檬茶를 자주 마셨다. 스타벅스 알바를 했던 친구는 돈 주고 사 먹지 말아야 하는 메뉴 1위로 그걸 꼽기도 했다. 아무렴 어떠한가, 맛있으면 다다.
tom n toms 现代4s店밀크티 가게가 넘쳐나는 북경에서는 취향에 맞는 커피숍을 찾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너무 비쌌다. 그래서 대안책으로 학교 안에 있는 카페를 많이 갔다. 일단 밖에 카페보다 가격이 저렴했고, 5잔을 마시면 그다음 잔은 공짜로 마실 수 있었고, 무엇보다 직원이 너무 친절했다. 아이스만 마시는 나한테 겨울이면 한 번씩은 따뜻한 걸 마시면 어떻겠냐고 권유하기도 했다. 엄청나게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 값에 이 맛이면 감지덕지라는 생각으로 마셨다. 나는 주로 라떼류를 좋아하는데, 라떼는 우유 맛을 엄청나게 타는 편이다. 에스프레소 자체가 맛이 좋아도 맛이 없는 우유와 합쳐지면 맛이 별로다. 중국 우유가 밍밍한지는 몰라도, 중국 카페에서 판매하는 라떼는 어딘가 모르게 물맛이 강한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모카를 마시기 시작했다. 中关村에 있는 骑士咖啡에는 휘핑크림을 얹지 않은 모카를 판매한다. 크림의 느끼한 맛이 없어서 더욱 깔끔한 모카를 즐길 수 있다. 前门에 있는 스타벅스, 知春路에 있는 tom n toms, 望京에 있는 cup one, 8KM, 三里屯에 있는 our bakery, 王府井에 있는 see saw 등등 대학교 시절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거리를 생각하지 않고 지하철, 버스를 몇번씩 갈아타면서 다니던 카페들이다. 기억의 한 조각이다. 카페와 커피를 너무 좋아해서인지 몰라도, 가끔 기억 속 한순간을 추억할 때조차 그날 마셨던 커피, 그날 갔던 카페의 분위기부터 생각난다.
오츠커피 아인슈페너
커피를 어느 정도 마신 다음에는 커피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자연스레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몇 분 만에 나오는 커피지만, 같은 카페에 가도 다른 직원이 만들어 주면 다른 맛이 나기도 하는 것이 커피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커피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맛이 날 수 있는지,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커피를 배워보기로 했다. 커피의 역사부터 시작해 커핑, 로스팅, 브루잉, 에스프레소 추출, 라떼 아트까지 다양한 부분을 얕게나마 배웠다. 그리고 알았다. 커피 한 잔이 만족스러운 맛을 가지려면 많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함을. 원두의 로스팅 정도, 그라인더와 에스프레소 머신의 청결함, 원두의 분쇄도, 추출 시간, 균일한 힘이 들어간 탬핑 등등이 알맞게 어우러져야 맛있는 커피 한 잔이 탄생한다. 앞으로는 한 잔에 들어있는 노고에 감사하면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연남동 매뉴팩트
나는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다. 서울의 좋은 점은 카페가 여기저기 널렸다는 것이다. 스타벅스 같은 프렌차이즈 카페도 많고, 작은 개인 카페들도 많다. 10여년 전에 한국에는 직접 원두를 로스팅하는 로스터스형 카페 붐이 일어나, 지금은 집 근처 작은 개인 카페에서도 색다르고 맛있는 커피를 어렵지 않게 마실 수 있다. 성수나 용산, 연희동 같은 핫플레이스에는 맛 좋은 카페들이 밀집되어 있다. 면적이 작고 입소문이 나 있다 보니 웨이팅은 필수다. 커피 한 잔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은 이제 익숙해졌다.
커피를 마시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저 마시고 싶어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졸림을 깨부수기 위해, 발바닥까지 떨어진 텐션을 머리 꼭대기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어디 카페 커피가 맛있나 궁금해서, 혹은 카페라는 공간을 내 카메라에 담기 위해. 가끔 독한 커피를 마시고 위 쓰림을 견뎌야 할 때도 있지만, 매일 커피를 마시는 그 순간은 행복하다.
뜨거운 물은 강하다. 그릇에 오래 들러붙어 있던 찌꺼기들조차 뜨거운 물에 담가놓거나 뜨거운 물을 만나면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간다. 커피는 나한테 뜨거운 물 같은 존재다. 더러운 감정도 커피를 만나면 더러운 데서 벗어나 다른 감정이 된다. 그래서인지, 힘들면 술보다도 커피 생각이 먼저 난다. 에스프레소와 우유, 시럽이 잘 섞인 바닐라라떼를 마시면 모든 것을 리셋할 수 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 그 자체로도 커피는 나에게 소중하다.
연길 카페붐이 일기 전에 뜬 사람이라 글에 나오는덴 로띠번에 어쩌다 가본 정도네요. 知春路 tom n toms, 望京 cup one는 가끔 갔었고… 아, 서울시청 별관에 카페 다락, 맛은 쑤쑬한데 덕수궁 뷰가 끝내줬습니다.
저기 매뉴팩트가 연희동 사러가마트 쪽에 있었던거 같은데 앉을 자리도 없는 가게에 사람들이 줄서서 드시더군요. 커피를 자주 마시지 않은 일인이지만 연희동 카페거리에서 살았을때 매일 동네 산책만 해도 기분이 좋아서 저만의 카페가 있었으면 하는 소소한 꿈도 꿔봤답니다 ㅎㅎ
핸즈는 연길에 커피숍을 보급시킨 고마운 브랜드죠. 아직 건재합니다.심지어 오핸즈라는 유사브랜드도 출범.
잼있게 읽었어요 제가 아는 커피숍들이 많이 나와서 반가웠네요 . 고향인 훈춘에 가면 로띠번과 핸즈는 꼭 가보지요. 청담동이란느 으리으리한 새 커피숍이 서서 다들 그리로 간다지만 저 혼자 핸즈에 대한 의리를 지키느라 핸즈만 가요 . 핸즈는 아는지 모르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