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가끔 자신이 밥먹듯 숨쉬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던 사고의 틀을 나도 모르게 벗어나게 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요즘들어 한데 묶여 생각나는 두 이야기가 있다.
1. 지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지구의 역사를 일주일이라는 시간으로 환치하면, 하루는 대략 6억 6천만 년에 해당한다.
우리의 역사가 월요일 0시에 지구가 단단한 구체로 출현하면서 시작된다고 가정해 보자. 월요일과 화요일과 수요일 오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수요일 정오가 되면 생명이 박테리아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목요일에서 일요일 오전까지 박테리아가 증식하고 새로운 생명 형태로 발전한다.
일요일 오전 4시쯤에는 공룡이 나타났다가 다섯 시간 뒤에 사라진다. 더 작고 연약한 생명 형태들은 무질서한 방식으로 퍼져 나가다가 사라진다. 약간의 종만이 우연히 자연재해에서 살아 남는다.
일요일 자정 3분 전에 인류가 출현하고, 자정 15 초 전에 최초의 도시들이 생겨난다. 자정 40분의 1초 전, 인류는 최초의 핵폭탄을 투하하고 달에 첫 발을 내디딘다.
우리는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우리가 <의식을 가진 새로운 동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한 순간 전의 일을 뿐이다.
– 베르나르 <상상력사전> 중에서
2.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
한 대학교수가 타국의 타 대학에서 청년들의 향한 어떤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막힘없이 술술 나오는 지라 아마 그의 베스트셀러에도 나오는 얘기일 것 같았다(그 책을 읽어 본 적은 없다). 기억속에서 대략 이런 이야기였던 같다.
"우리가 80살까지 산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하루 24시간에 비유한다면, 1년은 18분에 해당합니다. 여기 있는 젊은이들 중 19살에 대학에 입학한다면 그 인생은 아직 5시 42분이고 20대는 이제 막 6시에 들어선 셈이며 30대라 해도 아침 9시가 땡하고 흘러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힘들고 아프고 좌절한다고 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의 시침은 아직 아침 해가 뜨는 시간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고 많은 이야기들이 뒤에 남아 있으니까요."
– 김난도 2014년 북경에서의 강연 중
둘 모두 괜찮은 생각이다. 진짜 자신으로서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전혀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손 내밀어 끌어내 줄 수도 있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일상을 살아가면서 매일 되새기거나 남에게 "강추"한다면 어떨까. 그건 나에게 또 남에게 일종의 "강요"가 되지는 않을까.
자세히 생각해보면 두 이야기 모두 통찰을 가진 동시에 함정 또한 지니고 있다. 둘 다 시간이라는 척도가 질적으로 균일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지구의 발전에서 인류의 역사는 순간일뿐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 속에서도 부동한 기술수준과 부동한 인구와 부동한 사상으로 구성되는 수많은 '찰나'들이 있고 그 '찰나'들은 서로 사뭇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아직 해뜨는 아침이라 할지라도 20대와 30대와 50, 60대의 정력과 기억력과 누릴 수 있는 자원과 환경이 다르니 이 역시 완전히 같은 결의 시간으로 치부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우기 하루는 8시, 9시에서 시작된다고 봐야 하니 사실 20대, 30대는 오후 한시, 두시를 넘기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는가.
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역사의 순간을 살고, 힘든 인생에 아직 역전의 기회가 많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속에는 수많은 '지금'을 살고있는 개개인들의 희노애락의 '진행형'이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생이여 깨어나라"는 식의 얘기는 한 번의 깨우침을 반짝여 주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것을 진리마냥 매일 염불처럼 중얼거리는 것은 또다른 식의 닭도리탕(鸡汤, chicken soup for soul)으로 되어 버리는 일이 아닐까. 반짝임이 번다해지면 일상에 플래쉬 세례를 갖다대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우리 주위의 언론기사나 모멘트나 모든 조바심 때문에 일어나는 몸부림들을 이 시각으로 한번 반짝여 줘보면 어떨까. 물론 이 글도 말이다.
인간은 미래를 꿈 꾸는 사람들인것 같습니다. 행위자는 ‘미래를 끌어온다’라는 말도 있지요. 그 ‘미래’에 사는 것은 다소 만족스럽지 않은 ‘과거’가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인간은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의 중첩점에서 사는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이 같은 생각은 인생을, 역사를, 세상을 직선으로 발전한다는 식의 사고에서 출발한것 같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재’일테니까 말이죠. 현재를 뜨겁게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온갖 사물이 뒤섞여 집합체로 나타나는 삶을 풍요롭게 경험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carpe diem!
역사를 보는 시각에는 크게 선(線)적인 것과 환(環)적인 것이 있지요, 그에 따라 삶을 대하는 기본철학이나 태도도 크게 나뉘어지고. 선에도 직선, 곡선, 포물선 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현재를 즐기자’는 것도 기본적으로 역사를 선적으로 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상의 모든 점은 한번 밖에 없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존재니까요.
아! 그렇기도 하겠네요.
영화 “인테스텔라”의 결말 부분에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4차원’의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동시대에 사는 여러 국가나 부족들을 각각의 다른 문명양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떤 나라의 모습은 과거 다른 나라가 이미 겪어온 과정이고(거시적인 관점에서 유추해 볼 때), 어떤 나라는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니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속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좀 엉뚱하지만 상상은 나름 즐겁게 해보았습니다. ㅎㅎ
상상은 엉뚱하게 할수록 재미있어요 ㅎㅎ 어디 나라나 부족뿐이겠어요. 개개인도 삶의 부동한 영역에서는 경험이나 축적이 다르니… 다른 사람이 먼가를 하고거 아떤 얘기를 할 때 “나도 전에 저랬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네” 하는 경험 역시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다만 그걸로 좋다 나쁘다, 낫다 아니다란 가치를 판단하는건 다른 얘긴거 같구요.
한번의 깨우침으로 되지 않으니 자꾸 되풀이 되는게 아닐가요 ㅋㅋㅋㅋ 그리고 동기를 부여하는 연설이 동기를 없애는 연설보다 나으니 여기저기서 반짝이는것이고. 😂
저도 요즘 인문학과 고전에 관한 서적들을 많이 보고 발전력사 당시체계 사람들의 생각 등 많은것을 하나라도 더 요해해볼려고 하는중이였는데 이글은 참 제 맘을 적은것 같네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