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밖에서


나는 지금 혼자다. 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나온듯이 혼자가 되였다. 곁에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냥 느낌이 그렇다. 괜히 시무룩해져 전화를 열어 여러 사람들이 위챗 모멘트에 올린 내용들을 대충 훑어본다. 사람이나 고장을 투표해달라는 내용이 여럿 있다. 요즘은 이런 투표가 류행이다. 무엇을 알려고 하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증명하려는지 알 수 없다. 또 사람마다 장사군이 되여있다. 별의별 물품들이 다 게재되여있다. 정말 없는 것이 없다. 모두 어느 만큼 잘 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극정성이다. 똑같은 게시물이 잇달아 열몇번씩 올라와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과 색채 선명하고 맛갈스러운 음식들과 거기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가장 행복한 표정의 사진들이 올라와있다. 모두 잘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열심히 만들어가고 누리느라 이 어둑한 외로움에 갇힌 나를 누구도 들여다보아줄 겨를이 없다. 

접속한 공식계정의 몇개 메시지 뿐 그 어떤 문자도 들어온 것이 없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의 화면을 손가락으로 련속 밀어올리며 위챗 통신록에 등록된 이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신기하게도 등록되여있는 이름들이 참 많다. 내가 알고 있고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어진다. 나는 쉽게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한다. 내가 속한 단체방만 해도 40여개가 된다는 게 좀은 놀라웠다. 어디에 이렇게 많이 속해있는지 자신도 기억하지 못했다. 크게는 몇백명이 모인 그룹도 있었고 작게는 세명이 모인 그룹도 있었다. 몇십명이 모인 그룹에서 일여덟명이 다시 그룹을 만들고 그 속의 서너명이 다시 그룹을 만들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어딘가에 간신히 속해있다는 것에 안도했지만 다시 또 배제되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감상에 젖기도 했고 야릇한 배신감에 가슴이 긁히기도 했다. 

사람들은 참 이상했다. 기어이 그렇게 무리를 만들려고 억지를 부렸다. 또 기어이 그렇게 누군가를 배제하려고 안깐힘을 썼다. 내가 추방한 사람들이 결국 나에게 추방당한 사람들이 아니고 어쩌면 자신이 되려 그들에게 버려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속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또 자꾸 누군가를 우리라는 말 속에서 제외시켜버렸다. 마치 배제 자체에 의해 살아가듯이 집착했다. 그러면서 곁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은 느끼지 못하고 그 때문에 아쉬워하거나 후회 같은 걸 할 수도 없게 되여버렸다. 결국 늘 혼자로 남을 수 밖에 없었고 그 허전함을 견디려고 또 그룹을 만들 수 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래서 어디에도 제대로 섞여들지 못했고 또 속하여있다고 하더라도 함께라는 안전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참 야속하고 한편 안스러운 무리들이다. 

기어이 그룹을 만드는 것을 말하고저 함이 아니다. 가끔 퍽 유리한 면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가는 그룹이 결코 이런 효률적인 일을 위한 것만이 아니였다. 그 속에는 은밀한 관계들이 배타적인 성격을 띠며 존재해있다. 서로를 배제하는 일이 우리의 존재의 일부가 되여버렸다. 외로움은 늘 같은 냄새를 풍기기에 서로 인차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그 외로움을 알리고 싶지 않아했으며 자기도 모르게 혹 드러날가봐 조심했다. 그래서 서로 어떤 그룹에 속해있음을 은근히 암시했고 그로써 위안을 얻으려고 했다. 또 더러는 어떤 그룹에 속하지 못했음에 드러내놓고 아쉬워하지 못했다. 결국 암시였으므로 그것에 반응한다는 것이 무척 옹졸해보이고 궁색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되도록 상처를 덜 받으려 노력하지만 불가피하게 상처를 받는다. 될수록이면 그걸 모른 척하고 넘어가려는 마음 자체가 이미 잘 보여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암시’는 사실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며 그걸 은근히 과시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시하는 순간에조차 그 역시 무던히도 외롭다는 것이다. 아직 외로움과 함께 사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우리는 표정이나 몸짓이나 쉽게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런 장면을 곧잘 만들며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누군가의 살갗이나 입김이 자신에게 닿을가봐 겁내듯이 혼자가 되여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누군가의 시구처럼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그래서 자꾸 새로이 ‘우리’를 만들어가지만 갈증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화합이 아닌 배제에 의해서 만남을 갈망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나 한편 내가 배제한 인간에 대한 혹은 나를 배제한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앓는다는 것은 슬픔이면서 다행한 일이다. 서로의 언저리에 가닿기 위해 안깐힘을 쓰며 시간을 더듬고 있기 때문이다.

배제하고 배제당하여 자신 하나로 졸아든 세상 속에서 나는 나에게 문자를 보낸다. 

– 안녕?

대답이 없다. 누군가 응답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안녕이라는 인사말을 받아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립다.

– 나는 외롭다.

– 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 나는 좀 슬프다.

–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 …

나는 쓸쓸하게 혼자서 자신이 띄운 문자들을 바라본다. 그 속으로 바람도 불어들지 않는다. 구름도 기웃거리지 않는다. 꽃들의 미소도 없다. 강아지가 짖는 소리도 없다… 밀페되여 적막한 시공 속으로 말라버린 ‘나’라는 한 생물체가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 배제하는 사이로 벽은 단단하게 쌓여가고 우리는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 벽은 얇은듯하나 그에 의해 서로의 외로움이 가려지고 서로에 향한 마음속 갈구도 들려지지 않는다. 또한 그 벽은 두터운듯하나 우리가 참된 가슴을 열어 손을 내밀기만 하면 손끝의 온도에 의해 금방 녹아내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습관처럼 서로를 배제하고 있다. 

누군가는 혼자서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혼자서 찬밥을 먹고 누군가는 빈방에서 혼자 죽어가기도 한다. 끔찍하다. 한기가 몸을 관통한다. 방문 하나 닫듯이 가볍게 서로를 밀어내고 또 서로에 의해 철저히 내몰린 채 우리는 사라져간다. 그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다. 이 서늘하고 날카로운 인간이라는 한덩이의 얼음.

한 육체는 다른 한 육체로 체온이 흘러야 한다. 한 가슴은 다른 한 가슴에로 사랑이 흘러야 한다. 한 령혼은 다른 한 령혼에로 갈망이 흘러야 한다. 그렇게 지닌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로 흘러서 외로움을 끝장내야 한다. 그 흐름이 멈추지 말아야 우리는 결국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이다. 흐름을 멈춘 것들을 보라. 그것은 이미 시들어가고 죽어가는 것들이다. 섬뜩하다. 우리의 따스하고 촉촉한 숨결을 서로에게로 불어넣어야 한다. 차단되고 고립된 채 메말라가는 가슴에 흘러들어서 서로의 생명을 적셔야 한다. 

공기가 흐름을 멈추고 강물이 흐름을 멈추고 바람이 흐름을 멈춘다면 어떻게 될가 상상해보면 우리의 이 흐름을 멈춘 관계에 대해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다. 별과 별은 그 먼거리에서도 서로를 빛으로 밝히고 바람과 나무는 서로를 불러들여 함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산과 강은 서로 어우러져 서로를 키우며 오랜 세월 살아왔다. 

나는 외롭다. 너도 외롭다. 우리의 외로움은 우리가 서로 넘겨준 것이다. 나는 너의 밖에서 너는 나의 밖에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더 망설여야 할가? 너무 늦지 말아야겠다. 시간이 벌써 저만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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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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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친구로 등록된 리스트를 아래로 훑어보는”, 혹은 “모멘트를 보면서 드는 감정이나 느낌”, – 누구나 한번씩은 해봤을 행동과 느꼈을 생각들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잘 정리하신거 같습니다. 가끔씩 외로움이 찾아 올때도 있지만 모두 그런거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사회가 그런거니까, 아무일도 없다는듯이 또 그렇게 긍정적으로 살아가야겠죠. 그러다보면 또 진짜 좋은일도 생기고. ㅋㅋ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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