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날을 맞아 수많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한 글귀들이 오고 간다. 그런 글귀들을 읽다보니 독서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기억 하나가 나를 괴롭힌다. 아이를 금방 낳고 낮과 밤을 지새며 고된 육아의 일상을 보내는 나한테 남편이 넌지지 말을 던져왔다. “여보, 당신 요즘 독서를 너무 안하는것 같아. 나를 봐, 난 아이가 태여 난 반년동안 책을 일곱권이나 읽었어! ” 나도 독서를 좋아하지만 남편은 거의 광인이라고 불릴수 있을 정도로 더 독서를 좋아한다. 하지만 갓난쟁이 아이를 보느라 밤잠을 못자며 고생하는 가련한 마누라와 밤낮없이 울어대는 아이를 멀리한채 책 일곱권이 머리속에 들어가다니! 이런 인정머리 없는 양반을 봤나! 그 섭섭한 감정을 무엇으로 표현할가! 그런데 그래서 부부일가, 참으로 얄미우면서도 이런 남편이 한편으로는 참 잘 리해되기도 하는게 웃기는 일이다. 동갑내기인 우리는 이런 구석조차 너무나도 서로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나와 남편은 교과서를 비롯하여 책을 읽을때면 뭔가 맞는 일을 한다는 안전감이 들군 하는 약간 비겁하고 얄미운 모범생 스타일이라고 서로를 비웃고 또 자신을 비웃군 한다. 책을 읽는것은 무조건 잘하는 일이라는 생각, 엄격한 부모밑에서 수없이 공부를 강요받아오면서 오직 교과서를 손에 쥐고 있으면 어른들의 잔소리에서부터 자유를 얻을수 있었다. 그렇게 몸에 밴 자동적 사고로 인하여 남편은 아마 당당하게 육아에 지친 안해의 모습을 외면하며 책을 일곱권이나 읽어왔을것이다. 참 눈물나는 유치함이다! 

    독서를 정말로 이렇게 해도 괜찮은 것일가? 독서에 대한 이런 꽁한 내 마음을 부여잡고 나는 꼭 독서의 해독성에 대해 얘기를 해보고 싶다. 

책을 쫌 본답시고 그 책의 내용을 떠벌이고 다니며 아는척 하는 얄미운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서 제일 얄미운 사람이라면 바로 또 나같은 사람이였을것이다. 책을 보다가도 “아! 요 글을 내가 쫌만 빨리 봤어도 며칠전 고 자식이 나한테 한 말을 보기 좋게 반박할수 있었을텐데 말이야, 한번만 더 나한테 그런 말을 해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 글귀에 밑줄을 쫙 긋는 이런 아쉬움과 쾌감이 동반한 느낌이 독서의 즐거움이 되기도 했다. 책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참으로 누군가를 반박하기를 즐기는 나였었다. 꼭 그 누군가가 사람은 아니여도 그 누군가의 맞갖지 않는 관점을 은근하게 반박해보는 쾌감, 그래서 점점 잘 돌아가는 내 머리라고 자부를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얄팍한 지식들은 마치 벽돌처럼 나를 에워쌓고 누군가 나한테 말을 걸어오면 나는 어느 벽돌부터 그한테 뿌릴까부터 생각하며 든든한 안전감에 매달렸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가두어 넣는 길이였던것을 나는 그 당시에 모르고 있었다. 책이 나한테 지식을 주었지만 그 지식을 떠벌이고 싶은 마음은 이미 내가 이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막아버린 것이였다.

    도대체 왜 그렇게 남을 반박하기에 급했고 내 주장을 펴기에 급했던것일가? 나는 알수가 없었다. 

가난한 류학생 시절, 이국땅에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해주시고 도와주시는 교수님 부부가 계셨다. 그 교수님 부부가 필리핀 봉사를 가신다하기에 아주 당연하게 “그럼 필리핀에 가서 미국의 선진적인 학문이라도 가르쳐주려 가시는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교수님은 아주 너그럽게 웃으시며 “항상 뭔가를 가르치려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지요. 우리는 그곳에 가서 그 사람들이 사는것,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것 그것들을 배우러 갑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 한마디가 나한테 준 파문은 내 삶을 흔들어 놓았다. 그 꾸미지 않는 겸손함에 감동되여서도 있지만 더 많이는 항상 아는척 하며 상대방의 형편과 입장과는 상관이 없이 내 주장만 펴기에 급급했던 나의 교만한 마음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였다. 

교만함, 그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나의 교만함은 내가 많은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맞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였다. 그것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에 남의 입장이야 어떻든 그것을 급급히 부정해버리고야 마는 이 얄팍한 흉금까지 곁들여 나는 얼마나 얄미운 사람이였던것일가? 

교만함의 핵심에는 “확신”이 있었다. 고집이나 아집을 참으로 닮은 이 “확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인듯한 그 확신, 확신은 나의 탐구정신을 녹쓸게 만들었고 또한 내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서 책에서 배운 지식으로 쉽게 꼬리표를 붙이고 판단을 내리게 만들었던것 같다. 그 잘 알고 있다는 확신때문에 나는 얼마나 많은 배움의 기회를 놓치게 되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깊이 교제할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였는지 모른다. 

그 “확신”을 내려놓으면서 신영복 선생의 잠언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확신이 없는 불안한 떨림, 방향을 잃을가봐 두려운 그 떨림… 독서를 하고 그 지식으로 주장을 펼때 그런 떨림이 나한테는 너무나 필요했다. 무엇인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강화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한 독서가 아닌, 내 입장을 더욱 잘 입증해주는 증거를 찾기 위한 독서가 아닌,  어쩌면 내가 지금 알고 살아온게 틀릴수도 있지 않을가, 어쩌면 내가 약간은 빗나가며 생각한것은 아닐가, 어쩌면 내가 리해를 잘못하고 있는것은 아닐가, 이런 떨리는 마음이 나한테는 제일 필요한것이였다. 나는 이런 떨림을 조심스러움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조심스러움은 부드러움과도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은 인간을 향해 있다. 

인간에게서 시작하여 인간한테 가는 학문을 담은 것이 책인데 나는 책에만 매달려 정작 인간자체는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아둔함을 범하고 있었던것이다.

어느 책 하나가 어느 한 사람을 완벽하게 풀어 헤칠수 있을가? 사람이 쓴 책중에는 한권도 없을것이다. 매 사람마다 한권의 책이라는 그 비유가 눈물나게 맞는 리유도 여기에 있는것이다! 그 사람의 한 마디 , 어느 행동, 그가 하는 이야기, 그 한 사람을 주목하여 전체적으로 리해하면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이 세상의 유일한 책 한권이 되여지는것이다. 그 어느 책보다도 더 풍부하고 아름다운것이 진실한 인간 자체인데 말이다. 사람한테서 그런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을 기르지 않고 반대로 책속의 지식에 파묻혀 이것도 아니네, 저것도 안되네, 너는 참 못났어, 책을 봐, 이렇게 해야 돼, 이러면서 인간의 아름다움보다 인간의 못난 점에만 초점을 맞추어 모든 인간관계를 뒤틀리게 해놓는 작업, 그 배후에는 독서가 있을수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 나는 이 모든것을 내 몸으로 겪고나서야 깨달은듯 하다. 

그래서 고대 희랍에는 “사람들이 책에 대한 숭배를 시작할때 그들의 무지도 시작된다.”라는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속담이 있다. 지식에 대한 추구가 지식자체로만 끝나면 세상에서 가장 무지한 사람으로 될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지식에 대한 숭배가 책에 대한 숭배로 이어지고 지성은 날카로워지고 머리는 커가지만 가슴이 빈약해져가고 정작 인간을 향한 따뜻한 가슴은 메말라갈때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것이다. 즉 인간을 읽을줄 모르면 책을 읽는 모든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인간을 제대로 읽을줄 알때 책을 비로서 잘 읽을수 있는듯 하다.

확신을 버리고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을 시작해본다. 사람을 읽는 작업, 사람을 제대로 읽기 위해 책을 읽는 일… 그렇게 나는 독이 되는 독서에서 벗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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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남철의 떨림이 또 큰 깨달음을 주네요. 책보다 먼저 인간 읽기, 배우고 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어느쪽에 치우치는 자신의 생각과 몸가짐을 조절하며 그 어렵다는 평형을 이루려고 노력해야하는 존재인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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