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는 뭔가가 내 주의를 불러일으킨다. 그건 선명했고 강렬했다. 뒤이어 시야속에 들어온 건, 별 볼일 없는 그냥 분홍색 꽃이다.
꽃밭속에 있었다면 분명 스쳤을, 같은 푸르름을 하고 있었다면 눈여겨 보지도 않았을, 저 평범한 분홍색 꽃은 왜 이토록 내 발길을 멈추게 하는지… 거의 지각을 앞둔 출근길에 나는 한참이나 저걸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낯설었다.
그는 뭔가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세상에서 이방인마냥 외로이 또 눈부시게 정착한 자리에서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아름다웠다. 적어서 지금 내 시선이 멈춘 이 풍경속에선, 난 이미 반했다. 저 이름모를 꽃에게.
더 이상 이대로 무작정 바라보다가 회사 도착시간이 늦춰질 거 같아서, 후다닥 차에 올라탔다. 백미러로 멀어지는 저 분홍꽃을 보면서 나는 저게 어디서 왔을까 궁금했다. 분명, 집앞에 잡초만 정리했지 꽃씨를 심은적이 없는 데 말이다. 그리고 더 궁금한 건, 작년에 장미가 저 자리에 혼자 덩그러니 피어있었는데 그 장미는 그럼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장미도 분홍꽃도 인위적으로 심은 적이 없고 고의적으로 치워낸 적도 없는 데, 그들은 언제 저렇게 알아서 하필이면 우리 집 앞에 나타나줬을까? 그렇게 나는 그들의 충실한 감상자가 된다.
반복되는 업무와 지루한 루틴이 일상화 된 직장에 도착하고, 어제와 같이 하루 일정을 시작하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내고… 그렇게, 나는 또 불현듯 그 분홍꽃이 생각났다. 아침길 짧게 본 조각난 기억을 맞춰가며 꽃의 잎모양을 상상해본다. 향기를 되뇌어본다.
네이버에서 여러가지 꽃들을 검색했다. 동백꽃 같기도 하고 작약꽃 같기도 하다. 하여간 약간씩 차이는 나는데 둘 다 비슷하다.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그냥, 소리 없이 찾아와 조용히 만발한 그들이 고마울뿐이다.
그들은 자진신고해서 낯선 세상에 온 이방인을 닮은 같다. 소음이 없는 곳에 조용히 있으면서도 누군가 봐주길 원하고, 외롭지만 혼자만의 매력을 발산하며 거침없이 서있다. 그렇게, 주변의 모든 것과 어우러가며 살아낸다, 또 살아간다.
이방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진실을 찾아 헤매는 방랑자 같기도 하다. 세상의 초짜처럼 모든 게 엉성하고 서툴다. 이 예측불허한 세상에는 한없이 위축되는 순간도 있고 무한 호기심으로 뭉쳐진 신선함도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융합할 수 없는 문화의 차이와 언어의 한계, 속해 있는 거 같지만 단 한번도 온전히 자기것이 되어보지 못한 언저리의 애매함, 같은 정체성이라 판단되는 교집합속에서도 고독은 여전한 외딴 섬, 길들임과 구속 그리고 세뇌만이 존재하는 사회시스템 구조속에서 자아기만을 병행하며 열심히 달린 가짜들의 흔적, 편견으로 찬 막말들이 심장을 향해 구멍낸 자리가 아물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불편한 진실, 미쳐날뛰는 집단속에 속해있는 게 맘 편해서 조용히 같이 연기하며 대충 살아가는 게 되려 익숙한 자들… 세상은 그들에게 선명한 딱지를 붙이는 동시에 무관심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낯섬 그 자체다.
하지만, 이방인은 또 무관심이 편하다고 타협한 사람들이다. 결국 이러한 깨달음에서 카뮈도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라고 했을까?
김광기 사회학 교수는 내편이 없는 자에서 "이방인은, 아웃 오브 안중인 듯 보이면서 동시에 오히려 관심의 화살을 집중해서 받고 있는 자" 라고 정의내리기도 했다.
이방인은 그렇게 이 사회에 제외되면서도 또 한편으론 요주의 인물이 되기 쉽상이다.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들에게만 선사된 특권처럼.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을 접할수 있고, 복잡한 관계속에서 거추장스러운 표면상을 파헤치고 본질을 잘 파악하는 능력을 얻을 수 도 있다.
이건 축복받은 일이다.
퇴근 시간만을 고이 기다렸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느긋이 그 분홍꽃과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곧 오기 때문이다. 아예 풀밭에 들어가서 그 꽃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서 가까이에서 유심히 봤다. 널리고 널린 꽃이다. 널리고 널린 이방인처럼.
집 근처 들 고양이 두마리도 어느새 내 주변에서 요리조리 경계가 섞인 눈빛으로 얼쩡댄다. 그리고 나랑 같은 자세를 취한다. 저 인간은 왜 저 꽃을 저리도 쳐다볼가 의아했을수도 있다.
의지할데 없는, 간신히 이 사람저사람 던져주는 식량으로 매일을 이어가는 들고양이나, 초대한 적 한번 없지만 알아서 꽃 피워준 이 싱그러운 식물이나, 고향을 떠나 익숙치 않은 이 땅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이민자나, 쭉 살아온 편한 곳이지만 늘 낯섦을 발견하며 여전히 외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이나, 결국 우린 모두 이방인이다.
다른 가운데서 낯선 비슷함을 발견하고, 낯선 가운데서 정겨운 무관심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사회 초짜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이란 지옥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쇼생크 수감자이고, 트루먼쇼에서 하늘모양의 천장에 숨겨진 문을 찾아 열려하는 트루먼이다.
고향을 떠남과 동시에 어쩔수 없이 이방인이 될 때엔 좀 두려움이란 게 있었다. 고향을 떠난 북경에서의 생활이나, 미국 온 뒤의 외국생활이나 초반엔 늘 두려웠다. 하지만, 이방인이 몸소 되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 지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다.
인간은 영혼이 있는 자율적 존재라면 , 정면으로 고독에 직면할줄 안다. 그때 비로소 얼룩진 부분들이 세탁되는 것이다. 이방인의 고독은 정화이다.
외로이 홀로 설 때,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홀로 서있을 용기가 있을 때, 우린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당신은 다수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언제나 잠시 멈추어서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을 이해했을 때이다.
영화 "그린 북" 의 대사 한구절이 떠오른다.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다면 그럼 난 뭐죠?
돈 많은 백인들이 셜리에게 피아노 연주 요청을 돈을 주며 한다. 문화인처럼 보일려고. 하지만 셜리가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들한테는 그냥 깜둥이일뿐이다. 그게 그들의 진짜 문화니까. 그런데 셜리는 하소연 할 곳이 없다. 흑인들도 그를 자기들이랑 다르다며 거부하니까.
황당하고 허무한 이게 바로 이방인의 삶이다. 처음도 끝도 알수 없는, 그렇다고 물어볼 곳 조차 없는 처지의 인간들…중국에 있을때나 한국에 있을때나 심지어 미국에 있을때나 늘 주류사회의 중심에 설 수 없었던 조선족의 정체성도 이방인 같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간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 역시, 왜 내 고장에 왔건 만 나는 여전히 이방인 같지..라는 것.
대신 우리는 한곳에서 한곳을 떠남으로써 그 어떤 자각을 얻게 된다. 더 이상 허상을 쫓아서는 안되겠다는 깊은 반성이다.
그속에서 우린 진짜와 대면하는 법을 배우고 삶의 일반성과 융통성을 익혀간다.
그래서, 어쩌면 두려움보단 더 많이는 들뜬 기대로 새롭고 완전히 다른 세상에 용기내 온몸을 던져보는 긴장함이 더 단단해질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몸이 부서지는 아픔과 성장이 어디가도 잘 살아낼수있는 밑거름이 되어 진실과 마주하는 담대함을 키워야 겠다는 생각을 심어주기도 한다.
고향은 오직 "추방"속에서만 빛난다. 추방과 낯선 타지 없이 고향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속에서 진실과 마주한다는 것은 늘 쉽지 않는 선택이다. 무작정 날아온 집앞 분홍꽃처럼. 같은 종속들을 떠나 홀연히 처음 본 자리에 꽃 피울때.
약간의 낯섦이 있는 이 곳에서 제대로 된 진실과 마주하고 싶다. 그렇게 하나씩 거듭되는 만남을 반복하며 이방인으로 살고 싶다. 작년에 꽃 피웠던 장미처럼 언제나 떠날 수 있고, 올해 사뿐히 찾아온 분홍꽃처럼 모든 걸 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이방인이 되고 싶다.
욕심도 욕망도 많은 볼품없는 한낱 인간이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지난 쾌락에 의식적인 결별도 고할줄 아는 이방인이 되고 싶다.
겉만 화려해보이는 곳에서 생활하는 ,
난 여전히 무식하고 겁 많은 초짜이다.
오늘도 힘든 하루였고, 내일도 쉽지 않은 연속이지 않을까 예상한다. 이 얼마나 애잔한가!
그 극복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가
그 극복할 수 없는 이방인의 한계가
하지만, 난 어쨋든 저 분홍꽃처럼 용기를 내보련다.
사회적배역에만 충실하는 게 아닌, 나란 인간에 대해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보다듬어줄수 있는 그날이 오기까지.
이방인의 창의성을
이방인의 엉뚱함을
이방인의 특수성을
유연하게 컨트롤 할수 있는 그날까지.
오스카 와일드의 구절 하나 옮겨쓴다. " 이방인은 시류에 영합한 (세상 사람 모두가 시궁창에 있는 동안 별을 보고 있는 몇명) 의 사람이니 말이다."
